- 반도체 올림픽 ‘VLSI’ 채택된 한국 논문, 전체 23%
- 가장 많은 논문 내고도 판 움직이는 플레이어 못 돼
- 삼성이 부족한 건 ‘철학’… 이제 ‘공존 번영’ 생각할 때
- 엔비디아 전력 소모 측면에서 치명적… 지금이 정점
- 우리 반도체, ‘퍼스트무버’ 되려면 그냥 치고 나가야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이 시대에 새로운 통찰을 주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리즈를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첨단기술이 선도하고 있는 미래 전쟁에서 핵심 부품인 반도체 전쟁과 관련해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들려줄 유회준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다. <편집자 주>
유회준 카이스트 석좌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반도체 올림픽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ed Circuit·초고밀도집적회로) 학회’ 운영위원이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문명 기자]
유회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석좌교수는 세계적 반도체 석학이다. 카이스트 인공지능반도체대학원(KAIST Graduate School of AI Semiconductor) 원장이며 반도체공학회 회장이기도 하다. 지난해 3월 세계적인 반도체학회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 최다 논문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반도체 올림픽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ed Circuit·초고밀도집적회로) 학회’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이 학회는 반도체 공정, 소자, 회로를 한꺼번에 다루는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대회다. 올해는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렸다.
유 교수를 만나 밖에서 보는 한국 반도체의 위상은 어떤지, 미국·일본·중국·대만의 첨단기술 연구 현장은 어떤지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ed Circuit·초고밀도집적회로) 심포지엄’은 반도체 공정, 소자 및 회로를 한 번에 다루는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대회다. [VLSI 홈페이지]
한국은 명실상부 반도체 선진국
“VLSI 심포지엄은 미국과 일본이 주축입니다. 행사도 미국 하와이와 일본 교토에서 번갈아 열리는데 반도체 전공자라면 누구나 여기에 논문을 발표하고 싶어 하죠. 이번 학회는 역대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했고, 가장 많은 수의 논문이 투고돼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줬어요. 참가자도 1340명으로 코로나 전보다 40%나 늘었죠.”
이 중에 한국의 약진이 도드라졌다고 한다.
“올해 주목할 점은 한국,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 논문이 대거 채택됐다는 겁니다. 이 가운데 한국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전체 논문 숫자의 23%를 차지했는데 미국과 동일한 숫자여서 학회를 한국과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죠.
세부적으로 보면 ‘Technology(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74편으로 중국(84편)에 이어 2위였고, 미국(65편)·대만(59편)·일본(19편) 순입니다. 회로 설계 분야에서도 한국과 미국이 나란히 30편, 중국(26편)·대만(16편)·일본(8편)이 뒤를 이었고요. 게다가 참가자들도 한국이 1등(380명)으로 개최지인 미국(316명)보다 많았습니다. 다음이 일본(276명), 중국(123명), 대만(105명) 순이었고요. 논문을 발표한 곳을 기관이나 학교로 추려보면 삼성전자(16편). 카이스트(12편)가 단일 기업, 단일 학교로 가장 많았습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미국과 일본 반도체
명실상부 반도체 세계 1등 강국이네요.
“자타가 공인하는 ‘어른’이죠. 옛날 국제회의에 나가보면 정말 별 볼일 없었습니다. 2000년까지는 껴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아직은 좀 아쉬운 게 많아요.”
뭐죠.
“몸은 어른인데 머리는 아직 어른이 아닌 언밸런스라고 할까. 우선 학회를 끌고 가는 운영진만 해도 미국인과 일본인이 반반이에요. (한국은) 가장 많이 참석하고 가장 많은 논문을 내면서도 아직 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되지 못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조직적이지 못해요. 미국과 일본 사람들이 저한테 맨날 묻는 게 ‘왜 한국은 삼성과 카이스트만 보이냐’는 거예요.”
정부가 보여야 되나요.
“좀 더 다양한 학교와 다양한 회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정부도 안 보입니다. 일본이나 미국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삼성이나 SK하이닉스에 맡긴 채 쏙 빠져 있습니다. 관료들도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지고요.”
이유가 뭘까요.
“최고 학회에 논문 내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지 조직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아요. 조직의 중심이 된다는 건 좀 큰 비전을 갖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이죠. 한마디로 주인의식을 갖는다는 건데 이건 단순히 기술개발로 돈을 버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판을 만드는 거예요.
국제학회에는 어디서 지금 무슨 기업이 뭘 개발하고 있고 뭐에 관심이 있는지 하는 모든 정보가 다 모입니다. 제가 국제고체회로학회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만 참석 기업 인원수만 보면 나중에 주식시장에서 주가 움직임이 보입니다. 참석자가 많은 회사 주식이 곧 오르더라고요(웃음). 나중엔 결국 참석자 숫자를 공개하지 않기로 할 정도였으니까요.”
한국이 몸만 컸지 머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D램은 잘하는데 시스템반도체는 잘 못한다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시스템과 D램 차이가 뭐냐, D램은 표준이 딱 정해져 있어서 딱딱딱 찍어내면 알아서 사가는 거죠. 대량생산에 최적화된 거죠. 시스템반도체는 시장을 만들어야 돼요.”
우리는 왜 안 될까요.
“시장 창출 능력, 어떤 플랫폼을 만드는 능력, 새로운 걸 설득하는 능력 이 부족한 거죠. 남이 깔아놓은 판에서 잘하는 것만 했던 거죠. 중국이 시스템 IC를 참 잘해요. 얄미울 정도예요. 물론 실력보다는 자체 시장이 커서 좀 성능이 떨어져도 정부가 일단 팔아주고 그러다 보면 다시 또 실력이 좋아지고 이런 구조이긴 합니다. 우리는 제일 큰 시장이 삼성, LG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수출해야 되는 그런 문제가 있긴 합니다. 어쨌든 ‘판을 만드는 능력’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는 확장성이 없어요.
옛날에 포드 자동차 T 모델이라고 있었잖아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으로 자동차를 조립해 대량 생산해서 대당 3000달러가 넘던 자동차 가격을 300달러로 떨어뜨리죠. 성능도 무지하게 좋았어요. 포드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싸게 더 좋게 만들 수는 없다는 자신감이 넘쳤죠. 근데 한 20년쯤 지나니까 안 팔려요. 결국 공장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GM이 뜨죠. 포드 자동차는 성냥갑 2개를 올려놓은 것 같은 단순 디자인이었잖아요. 포드가 국민차 시장을 만들었지만 어느 정도 시장이 형성되고 나니까 사람들의 욕구가 바뀐 거예요. 국민차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차 또는 뭔가 세련된 맞춤형 차가 필요했던 거죠.”
7월 31일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4~6월) 연결 기준 매출 74조683억 원, 영업이익 10조4439억 원을 올렸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전경. [뉴시스]
수많은 글로벌 기업이 떴다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우리도 남의 일 같지 않지요. 특히 삼성에 대해 우려가 많습니다.
“그동안 삼성은 자신감이 넘쳤어요. 나보다 더 싸게 더 잘 만드는 데는 없다. HBM도 빨리 대응하지 못했던 거죠.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거를 빨리 파악하고 맞춤형으로 나갔어야 되는데 그게 조금 흔들리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제대로 대처할까요.
“삼성은 최적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문제가 뭔지도 알아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는 키도 자체적으로 다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허둥지둥하고 있다는 거죠. 스피릿이 사라진 거예요. 문제가 터지면 위에서 빨리 방향을 잡아주고 밀어붙여야 합니다. 옛날에 삼성은 이렇게 하다가 안 되면 또 저렇게 하고 그래서 빨리 풀어내는 분위기였죠.
요즘 삼성 엔지니어들 만나보면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생겼다’고 말해요. 옛날에 삼성은 관리는 잘했고 기술이 문제라고 했어요. 요즘은 기술이 아니라 관리에 문제가 있어 보여요. 무노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인사나 관리 쪽에서 선제적으로 문제를 다 풀어주니 불만이 나올 수 없었던 거예요. 요즘 보면 그마저 허둥지둥하는 것 같아요.”
지금 삼성에 필요한 건 뭘까요.
“이건희 회장 때처럼 뭔가 삼성만의 어떤 철학을 빨리 세워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는 저력이 있다. 해낼 수 있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여러분하고 이익을 나눈다’ 이런 메시지도 필요할 것 같아요.
제 제자들 가운데 박사학위 받고 미국 가면 초봉이 5억 원이 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걸 보면 ‘굳이 한국 기업에 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죠. 또 미국에서 일하고 왔다고 하면 바로 임원으로 뽑아주는데 국내에서만 오래 일하던 친구들은 ‘이게 뭐지 이러면서 내가 여기 계속 있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있는 거예요. 옛날부터 그런 조짐은 조금 보였지만 최근 들어서 두드러진 건 자기 거보다 밖의 것을 우대하면서 찾는 것 같아요.”
밖의 것이라면?
“무조건 미국 기업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는 식이죠. 사실 그 사람들,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기술적으로 낫지도 않아요. 제가 요즘 계속 얘기하는 게 ‘이제 우리도 우리만의 것, 그리고 어떤 자부심을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몸만 커졌다’는 표현이 그래서 나온 건데 뭔가 아직도 항상 밖의 것을 찾아요.
우리가 아무것도 없었을 땐 그게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30년 가까이 메모리 쪽으로 1등을 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만의 성공 키워드가 있는 거거든요. 살아남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비전과 철학을 만들어 우리가 끌고 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미래는 이렇게 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해요.
소통이나 공정, 행복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일 밖에서 그걸 구현하는 게 아니라 일 속에서 구현해야죠. 일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밤새 일해도 행복하죠. 이 조직에 내 운명을 걸겠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는 운명을 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맨 처음에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 생존 투쟁을 많이 하지만 다음에는 공존 번영을 생각합니다. 삼성도 이제 공존 번영을 할 때가 됐습니다. 그러려면 머리가 있어야 됩니다. 기브 앤드 테이크를 하면서 판을 만들어나가야 되는 거죠. 제가 몇 년 전 중국 한 반도체 D램 공장을 가보고 ‘이 사람들은 반도체를 그냥 돈으로 보는구나’ 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도체는 비즈니스이니까 돈으로 보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제 뜻은 반도체를 통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회사 가치를 좀 올려서 팔아먹고 빠지고 이런 생각을 하더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 점에서 희망적이고요.”
일본 젊은이들, 반도체 안 한다
중국 이야기가 나와서 일본도 궁금합니다. 요즘 반도체의 영광을 다시 한번 찾자는 분위기잖아요.
“제가 지난주에 일주일간 일본에 있었거든요. 아직도 일본의 60대, 70대는 지금 일본 반도체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해요. 자기네가 1등을 했던 기억이 강한 거죠. 그래서 지금 분위기를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라고도 합니다. 무조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문제는 젊은 사람들이 반도체를 안 해요. 제가 서울-도쿄-베이징을 잇는 학생 교류를 20년째 하고 있는데 일본 유수의 대학 반도체 연구실에 일본 학생보다 중국 학생이 더 많이 공부하고 있더라고요. 공항에 마중 나온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이 아니라 중국 학생들이었어요. 저보다도 오히려 도쿄 지리를 몰라요(웃음).
일본에는 정말 세계적 엔지니어가 많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잡(job)을 못 구하고 잘해야 지방대학 교수로 가 있고 그래요. 그렇게 잘나갔던 선배들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친구들이 반도체에 미래가 없다고 보는 거죠.”
저도 지난해 일본에서 반도체 취재를 했는데 그래도 역시 저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그건 맞아요. 워낙 반도체 황금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국제 인맥이 탄탄합니다. 이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학계를 움직이는 리더 혹은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일본 학자들이 대만 싱가포르 등 학자들과 함께 도쿄에 연구소를 만든다는데 여기에 우리 기업들도 빨리 조인하면 좋겠어요.
제가 반도체공학회 회장도 하고 있는데 지난해 10월에 일본 전자공학회와 한국반도체공학회 사이에 자매결연을 했어요. 논문지도 같이 발간하고 워크숍도 같이 하면서 말이죠.
아시아 국제고체회로학회장도 5년째 하고 있는데 지난주 삿포로에서 열린 학회에서 우리나라 논문은 59편이나 나왔는데 일본은 18개밖에 안 들어왔어요. 하지만 제가 부러운 건 그들의 정보력과 인맥이에요. 세계적으로 뭔가 엮어내고 하는 거 보면 조금 두려워요.”
엔비디아(NVIDIA)의 미래는 어떻게 보십니까.
“운이 좋았다고 보고요. 그다음에 쿠다(CUDA)라고 하는 자체 소프트웨어가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당분간 그 아성을 무너뜨리기는 힘들 거예요. AI를 돌릴 수 있는 하드웨어가 지금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GPU는 말 그대로 게임용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전기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듭니다. 데이터센터를 설치하려면 냉각탑을 설치해야 되고 전기도, 물도 끌어와야 합니다. 웬만한 회사가 구축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서울에는 데이터센터를 못 짓습니다. 현재 엔비디아의 장악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전력 소모 측면에서 치명적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에 변화가 있을 겁니다. 인텔이 힘이 빠질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엔비디아도 지금이 ‘피크(정점)’라고 봅니다.”
앞으로 메모리가 주도하는 시대 온다
새로운 시장을 뭐로 보고 계시죠?
“저는 온 디바이스 AI라고 하는데 컴퓨터의 히스토리를 보면 맨 처음에 데이터센터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단말로 오거든요. AI칩이 모든 사물에 다 들어가는 거죠. (식당 주문 단말기를 가리키며) 이런 데도 들어가 있고요. 모든 사물 자체가 AI 시스템이 되는 거죠. 앞으로 사이버와 현실 공간이라는 두 개의 공간을 살아갈 텐데 그걸 연결해 주는 게 AI입니다. 모든 사물에 다 AI 칩이 들어가 사이버 세계와 하나로 융합되는 그런 걸로 갈 것 같아요. AI가 앞으로는 더더욱 많이 쓰일 거란 게 제 생각입니다.”
엔비디아도 준비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준비하죠. 근데 과거 인텔이 그랬고, 지금 삼성이 그렇듯 내가 너무 잘하고 있는 게 있으면 새로 뭘 하기가 힘들어요. 당장 돈이 되는 게 보이기 때문에 그걸 벗어나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
아까 ‘우리만의 것이라는 걸 찾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찾으셨나요.
“저는 메모리를 오래 하다 보니 메모리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온다고 봅니다. 이미 다른 나라들도 그런 움직임이 있어요. ‘CPU보다 메모리가 더 중요하다. 메모리에서 연산하는 게 더 낫다, 메모리 중심으로 가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메모리와 CPU를 나누지 말고 메모리 안에서 연산 메모리가 CPU 역할을 하는 거죠. 메모리를 더 파고들자는 생각입니다.
사실 컴퓨터 안에서는 CPU가 마스터고 메모리는 노예, 슬레이브입니다. 지금도 계속 그런 상태죠. 돈은 마스터가 벌고 슬레이브는 일만 합니다. 그러니까 엔비디아 칩은 어마어마하게 비싼데 D램은 아직도 2달러 5달러 이런 식이죠.
우리는 아직도 슬레이브에 머물러 있어요. 엔비디아에 쩔쩔 맬 것이 아니라 우리도 미래를 보고 우리 자신을 믿어보고 끝까지 한번 가보면 거기서 뭔가 해볼 수 있는 건데 자꾸 중간에 흔들려 포기하면 안 됩니다. 퍼스트무버가 되려면 그냥 치고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꾸 두리번, 두리번거리고 눈치를 봐요. 그냥 우리가 우리 거 하면 돼 그러면 다 따라온다,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선진국이면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할 수 있어야죠. 우리가 이 정도 됐으면 사회 곳곳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있어야 그게 선진국 아니겠습니까?”
지금 다들 위축돼 있는데 학회 현장에서 볼 때 우리 열기나 의욕은 식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잠재력이 있잖아요. 다들 처음 해보는 거를 열심히 해서 성공시킨 것을 많이 경험해 봤잖습니까. 그래서 자신 있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하면 된다!’ 미국도 일본도 반도체 제조를 안 해요. 소프트웨어 하지. 근데 우리는 지난 2월에 경주에서 반도체 학술대회라는 걸 했는데 전국에서 대학생 3000명이 몰렸습니다. 희망이 있는 거죠.
다만 요즘에는 거트(Gut)라고 어떤 오기 같은 게 자꾸 없어져서 문제예요. 하지만 잘만 유도해 주면 정말 좋은 아이디어 많이 냅니다. 가능성을 보여주면 죽어라 일합니다. 어제도 학생들하고 회의하면서 느낀 게 아이디어들이 정말 기발해요. 뭔가 해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요.”
일본 남서부 구마모토 외곽의 기쿠요 마을에 지어진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 TSMC는 올해 2월 24일 글로벌 확장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첫 번째 반도체 공장을 개장했다고 밝혔다. [AP/뉴시스]
중국의 인해전술에 준비해야
의대 열풍도 걱정입니다.
“의대로만 가는 건 좀 걱정이에요. 미국도 의대가 좋긴 하지만 그래도 공대를 선택하는 애들이 있거든요. 구글이나 애플 같은 데서 연봉 5억을 준단 말이에요. 창업해서 회사 차리면 더 많이 벌 수 있고요. 무조건 돈이나 직업의 안정성 때문에 의사를 택하지는 않죠. 우리도 빨리 엔지니어 대접을 더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중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중국은 공산당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잖아요. 모든 게 공산당에서 결정을 내리고 공산당에서 해요. 좋은 방향을 제시하면 잘 뚫리고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제시하면 엉망이 되는 거죠. 미·중 갈등이라고 하지만 미국의 인텔이나 AMD나 퀄컴의 3분의 1 시장이 중국이에요. 중국에 팔아먹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연구도 잘해요. 지난해 국제고체회로학회에 논문이 230편 발표됐는데 그중에 70개가 중국 거예요. 1등이에요. 우리가 50개로 2등이고요. 중국은 이미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미국과 경쟁할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고 봅니다. 제조공정에서 미국의 제재 때문에 밀리고 있지만 오히려 미국의 제재 때문에 기술 자립이 더 빨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을 상대할 때는 정경분리 원칙이 필요해 보여요. 저는 항상 대만한테 배우자고 그래요. 지정학적 위험으로 보면 대만은 우리보다 더 심각하거든요. 중국으로부터 위협도 받고 있고, 미국한테 붙어야 하고. TSMC 공장이나 연구소도 중국에 많아요. 어쨌든 같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죠. 현장에서 대만을 보면 중국을 달래고 어르는 모습이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생각될 때가 있을 정도예요.”
우리 정부에 조언한다면요.
“지금 대학교 1학년 애들이 반도체로 먹고살게 15년 후를 내다보고 컨트롤타워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다 각 부처에 흩어져 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도 계속 기술이 주도하는 세상이죠. 다른 나라 기술이 주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해왔고 저력도 있으니 이제 어떻게 갈지 볼 수 있는 안목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사람도 키우고 또 비전도 만들어야 하는데 계속 뒷북만 치고 있을 수는 없죠.”
출처: 신동아 https://shindonga.donga.com/society/article/all/13/5140960/1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하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한국 반도체, 몸은 어른인데 머리는 아직 멀었다" [플라톤 아카데미] 유회준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밖에서 본’ 한국 반도체
필자_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허문명이 만난 사람'이란 인터뷰 시리즈로 사회문화 각계의 다양한 생각을 조명한다. 저서로 <김지하와 그의 시대>, <여성이여 세상의 멘토가 되라>, <삶의 나침반 1,2>,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가 있다.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이 시대에 새로운 통찰을 주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리즈를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첨단기술이 선도하고 있는 미래 전쟁에서 핵심 부품인 반도체 전쟁과 관련해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들려줄 유회준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다. <편집자 주>
유회준 카이스트 석좌교수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반도체 올림픽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ed Circuit·초고밀도집적회로) 학회’ 운영위원이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문명 기자]
유회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석좌교수는 세계적 반도체 석학이다. 카이스트 인공지능반도체대학원(KAIST Graduate School of AI Semiconductor) 원장이며 반도체공학회 회장이기도 하다. 지난해 3월 세계적인 반도체학회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 최다 논문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반도체 올림픽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ed Circuit·초고밀도집적회로) 학회’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이 학회는 반도체 공정, 소자, 회로를 한꺼번에 다루는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대회다. 올해는 6월 17일부터 20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렸다.
유 교수를 만나 밖에서 보는 한국 반도체의 위상은 어떤지, 미국·일본·중국·대만의 첨단기술 연구 현장은 어떤지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VLSI(Very Large Scale Integrated Circuit·초고밀도집적회로) 심포지엄’은 반도체 공정, 소자 및 회로를 한 번에 다루는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대회다. [VLSI 홈페이지]
한국은 명실상부 반도체 선진국
“VLSI 심포지엄은 미국과 일본이 주축입니다. 행사도 미국 하와이와 일본 교토에서 번갈아 열리는데 반도체 전공자라면 누구나 여기에 논문을 발표하고 싶어 하죠. 이번 학회는 역대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했고, 가장 많은 수의 논문이 투고돼 반도체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줬어요. 참가자도 1340명으로 코로나 전보다 40%나 늘었죠.”
이 중에 한국의 약진이 도드라졌다고 한다.
“올해 주목할 점은 한국,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 논문이 대거 채택됐다는 겁니다. 이 가운데 한국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전체 논문 숫자의 23%를 차지했는데 미국과 동일한 숫자여서 학회를 한국과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죠.
세부적으로 보면 ‘Technology(기술)’ 분야에서 한국은 74편으로 중국(84편)에 이어 2위였고, 미국(65편)·대만(59편)·일본(19편) 순입니다. 회로 설계 분야에서도 한국과 미국이 나란히 30편, 중국(26편)·대만(16편)·일본(8편)이 뒤를 이었고요. 게다가 참가자들도 한국이 1등(380명)으로 개최지인 미국(316명)보다 많았습니다. 다음이 일본(276명), 중국(123명), 대만(105명) 순이었고요. 논문을 발표한 곳을 기관이나 학교로 추려보면 삼성전자(16편). 카이스트(12편)가 단일 기업, 단일 학교로 가장 많았습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미국과 일본 반도체
명실상부 반도체 세계 1등 강국이네요.
“자타가 공인하는 ‘어른’이죠. 옛날 국제회의에 나가보면 정말 별 볼일 없었습니다. 2000년까지는 껴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아직은 좀 아쉬운 게 많아요.”
뭐죠.
“몸은 어른인데 머리는 아직 어른이 아닌 언밸런스라고 할까. 우선 학회를 끌고 가는 운영진만 해도 미국인과 일본인이 반반이에요. (한국은) 가장 많이 참석하고 가장 많은 논문을 내면서도 아직 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되지 못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조직적이지 못해요. 미국과 일본 사람들이 저한테 맨날 묻는 게 ‘왜 한국은 삼성과 카이스트만 보이냐’는 거예요.”
정부가 보여야 되나요.
“좀 더 다양한 학교와 다양한 회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정부도 안 보입니다. 일본이나 미국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삼성이나 SK하이닉스에 맡긴 채 쏙 빠져 있습니다. 관료들도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지고요.”
이유가 뭘까요.
“최고 학회에 논문 내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지 조직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아요. 조직의 중심이 된다는 건 좀 큰 비전을 갖고 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이죠. 한마디로 주인의식을 갖는다는 건데 이건 단순히 기술개발로 돈을 버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판을 만드는 거예요.
국제학회에는 어디서 지금 무슨 기업이 뭘 개발하고 있고 뭐에 관심이 있는지 하는 모든 정보가 다 모입니다. 제가 국제고체회로학회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만 참석 기업 인원수만 보면 나중에 주식시장에서 주가 움직임이 보입니다. 참석자가 많은 회사 주식이 곧 오르더라고요(웃음). 나중엔 결국 참석자 숫자를 공개하지 않기로 할 정도였으니까요.”
한국이 몸만 컸지 머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D램은 잘하는데 시스템반도체는 잘 못한다 이런 얘기 많이 하잖아요. 시스템과 D램 차이가 뭐냐, D램은 표준이 딱 정해져 있어서 딱딱딱 찍어내면 알아서 사가는 거죠. 대량생산에 최적화된 거죠. 시스템반도체는 시장을 만들어야 돼요.”
우리는 왜 안 될까요.
“시장 창출 능력, 어떤 플랫폼을 만드는 능력, 새로운 걸 설득하는 능력 이 부족한 거죠. 남이 깔아놓은 판에서 잘하는 것만 했던 거죠. 중국이 시스템 IC를 참 잘해요. 얄미울 정도예요. 물론 실력보다는 자체 시장이 커서 좀 성능이 떨어져도 정부가 일단 팔아주고 그러다 보면 다시 또 실력이 좋아지고 이런 구조이긴 합니다. 우리는 제일 큰 시장이 삼성, LG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수출해야 되는 그런 문제가 있긴 합니다. 어쨌든 ‘판을 만드는 능력’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는 확장성이 없어요.
옛날에 포드 자동차 T 모델이라고 있었잖아요.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으로 자동차를 조립해 대량 생산해서 대당 3000달러가 넘던 자동차 가격을 300달러로 떨어뜨리죠. 성능도 무지하게 좋았어요. 포드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싸게 더 좋게 만들 수는 없다는 자신감이 넘쳤죠. 근데 한 20년쯤 지나니까 안 팔려요. 결국 공장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GM이 뜨죠. 포드 자동차는 성냥갑 2개를 올려놓은 것 같은 단순 디자인이었잖아요. 포드가 국민차 시장을 만들었지만 어느 정도 시장이 형성되고 나니까 사람들의 욕구가 바뀐 거예요. 국민차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차 또는 뭔가 세련된 맞춤형 차가 필요했던 거죠.”
7월 31일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4~6월) 연결 기준 매출 74조683억 원, 영업이익 10조4439억 원을 올렸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전경. [뉴시스]
수많은 글로벌 기업이 떴다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우리도 남의 일 같지 않지요. 특히 삼성에 대해 우려가 많습니다.
“그동안 삼성은 자신감이 넘쳤어요. 나보다 더 싸게 더 잘 만드는 데는 없다. HBM도 빨리 대응하지 못했던 거죠.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거를 빨리 파악하고 맞춤형으로 나갔어야 되는데 그게 조금 흔들리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제대로 대처할까요.
“삼성은 최적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문제가 뭔지도 알아요. 그리고 해결할 수 있는 키도 자체적으로 다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허둥지둥하고 있다는 거죠. 스피릿이 사라진 거예요. 문제가 터지면 위에서 빨리 방향을 잡아주고 밀어붙여야 합니다. 옛날에 삼성은 이렇게 하다가 안 되면 또 저렇게 하고 그래서 빨리 풀어내는 분위기였죠.
요즘 삼성 엔지니어들 만나보면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지금의 문제가 생겼다’고 말해요. 옛날에 삼성은 관리는 잘했고 기술이 문제라고 했어요. 요즘은 기술이 아니라 관리에 문제가 있어 보여요. 무노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인사나 관리 쪽에서 선제적으로 문제를 다 풀어주니 불만이 나올 수 없었던 거예요. 요즘 보면 그마저 허둥지둥하는 것 같아요.”
지금 삼성에 필요한 건 뭘까요.
“이건희 회장 때처럼 뭔가 삼성만의 어떤 철학을 빨리 세워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는 저력이 있다. 해낼 수 있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여러분하고 이익을 나눈다’ 이런 메시지도 필요할 것 같아요.
제 제자들 가운데 박사학위 받고 미국 가면 초봉이 5억 원이 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걸 보면 ‘굳이 한국 기업에 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죠. 또 미국에서 일하고 왔다고 하면 바로 임원으로 뽑아주는데 국내에서만 오래 일하던 친구들은 ‘이게 뭐지 이러면서 내가 여기 계속 있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있는 거예요. 옛날부터 그런 조짐은 조금 보였지만 최근 들어서 두드러진 건 자기 거보다 밖의 것을 우대하면서 찾는 것 같아요.”
밖의 것이라면?
“무조건 미국 기업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오는 식이죠. 사실 그 사람들,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기술적으로 낫지도 않아요. 제가 요즘 계속 얘기하는 게 ‘이제 우리도 우리만의 것, 그리고 어떤 자부심을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몸만 커졌다’는 표현이 그래서 나온 건데 뭔가 아직도 항상 밖의 것을 찾아요.
우리가 아무것도 없었을 땐 그게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30년 가까이 메모리 쪽으로 1등을 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만의 성공 키워드가 있는 거거든요. 살아남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비전과 철학을 만들어 우리가 끌고 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미래는 이렇게 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해요.
소통이나 공정, 행복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일 밖에서 그걸 구현하는 게 아니라 일 속에서 구현해야죠. 일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밤새 일해도 행복하죠. 이 조직에 내 운명을 걸겠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는 운명을 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어떤 조직이든지 맨 처음에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니까 생존 투쟁을 많이 하지만 다음에는 공존 번영을 생각합니다. 삼성도 이제 공존 번영을 할 때가 됐습니다. 그러려면 머리가 있어야 됩니다. 기브 앤드 테이크를 하면서 판을 만들어나가야 되는 거죠. 제가 몇 년 전 중국 한 반도체 D램 공장을 가보고 ‘이 사람들은 반도체를 그냥 돈으로 보는구나’ 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도체는 비즈니스이니까 돈으로 보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제 뜻은 반도체를 통한 기술혁신이 아니라 회사 가치를 좀 올려서 팔아먹고 빠지고 이런 생각을 하더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 점에서 희망적이고요.”
일본 젊은이들, 반도체 안 한다
중국 이야기가 나와서 일본도 궁금합니다. 요즘 반도체의 영광을 다시 한번 찾자는 분위기잖아요.
“제가 지난주에 일주일간 일본에 있었거든요. 아직도 일본의 60대, 70대는 지금 일본 반도체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해요. 자기네가 1등을 했던 기억이 강한 거죠. 그래서 지금 분위기를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라고도 합니다. 무조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문제는 젊은 사람들이 반도체를 안 해요. 제가 서울-도쿄-베이징을 잇는 학생 교류를 20년째 하고 있는데 일본 유수의 대학 반도체 연구실에 일본 학생보다 중국 학생이 더 많이 공부하고 있더라고요. 공항에 마중 나온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이 아니라 중국 학생들이었어요. 저보다도 오히려 도쿄 지리를 몰라요(웃음).
일본에는 정말 세계적 엔지니어가 많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잡(job)을 못 구하고 잘해야 지방대학 교수로 가 있고 그래요. 그렇게 잘나갔던 선배들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젊은 친구들이 반도체에 미래가 없다고 보는 거죠.”
저도 지난해 일본에서 반도체 취재를 했는데 그래도 역시 저력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그건 맞아요. 워낙 반도체 황금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국제 인맥이 탄탄합니다. 이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학계를 움직이는 리더 혹은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일본 학자들이 대만 싱가포르 등 학자들과 함께 도쿄에 연구소를 만든다는데 여기에 우리 기업들도 빨리 조인하면 좋겠어요.
제가 반도체공학회 회장도 하고 있는데 지난해 10월에 일본 전자공학회와 한국반도체공학회 사이에 자매결연을 했어요. 논문지도 같이 발간하고 워크숍도 같이 하면서 말이죠.
아시아 국제고체회로학회장도 5년째 하고 있는데 지난주 삿포로에서 열린 학회에서 우리나라 논문은 59편이나 나왔는데 일본은 18개밖에 안 들어왔어요. 하지만 제가 부러운 건 그들의 정보력과 인맥이에요. 세계적으로 뭔가 엮어내고 하는 거 보면 조금 두려워요.”
엔비디아(NVIDIA)의 미래는 어떻게 보십니까.
“운이 좋았다고 보고요. 그다음에 쿠다(CUDA)라고 하는 자체 소프트웨어가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당분간 그 아성을 무너뜨리기는 힘들 거예요. AI를 돌릴 수 있는 하드웨어가 지금 엔비디아 GPU(그래픽처리장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GPU는 말 그대로 게임용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전기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듭니다. 데이터센터를 설치하려면 냉각탑을 설치해야 되고 전기도, 물도 끌어와야 합니다. 웬만한 회사가 구축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서울에는 데이터센터를 못 짓습니다. 현재 엔비디아의 장악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전력 소모 측면에서 치명적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에 변화가 있을 겁니다. 인텔이 힘이 빠질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엔비디아도 지금이 ‘피크(정점)’라고 봅니다.”
앞으로 메모리가 주도하는 시대 온다
새로운 시장을 뭐로 보고 계시죠?
“저는 온 디바이스 AI라고 하는데 컴퓨터의 히스토리를 보면 맨 처음에 데이터센터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단말로 오거든요. AI칩이 모든 사물에 다 들어가는 거죠. (식당 주문 단말기를 가리키며) 이런 데도 들어가 있고요. 모든 사물 자체가 AI 시스템이 되는 거죠. 앞으로 사이버와 현실 공간이라는 두 개의 공간을 살아갈 텐데 그걸 연결해 주는 게 AI입니다. 모든 사물에 다 AI 칩이 들어가 사이버 세계와 하나로 융합되는 그런 걸로 갈 것 같아요. AI가 앞으로는 더더욱 많이 쓰일 거란 게 제 생각입니다.”
엔비디아도 준비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준비하죠. 근데 과거 인텔이 그랬고, 지금 삼성이 그렇듯 내가 너무 잘하고 있는 게 있으면 새로 뭘 하기가 힘들어요. 당장 돈이 되는 게 보이기 때문에 그걸 벗어나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
아까 ‘우리만의 것이라는 걸 찾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찾으셨나요.
“저는 메모리를 오래 하다 보니 메모리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온다고 봅니다. 이미 다른 나라들도 그런 움직임이 있어요. ‘CPU보다 메모리가 더 중요하다. 메모리에서 연산하는 게 더 낫다, 메모리 중심으로 가야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메모리와 CPU를 나누지 말고 메모리 안에서 연산 메모리가 CPU 역할을 하는 거죠. 메모리를 더 파고들자는 생각입니다.
사실 컴퓨터 안에서는 CPU가 마스터고 메모리는 노예, 슬레이브입니다. 지금도 계속 그런 상태죠. 돈은 마스터가 벌고 슬레이브는 일만 합니다. 그러니까 엔비디아 칩은 어마어마하게 비싼데 D램은 아직도 2달러 5달러 이런 식이죠.
우리는 아직도 슬레이브에 머물러 있어요. 엔비디아에 쩔쩔 맬 것이 아니라 우리도 미래를 보고 우리 자신을 믿어보고 끝까지 한번 가보면 거기서 뭔가 해볼 수 있는 건데 자꾸 중간에 흔들려 포기하면 안 됩니다. 퍼스트무버가 되려면 그냥 치고 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자꾸 두리번, 두리번거리고 눈치를 봐요. 그냥 우리가 우리 거 하면 돼 그러면 다 따라온다,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선진국이면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할 수 있어야죠. 우리가 이 정도 됐으면 사회 곳곳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있어야 그게 선진국 아니겠습니까?”
지금 다들 위축돼 있는데 학회 현장에서 볼 때 우리 열기나 의욕은 식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잠재력이 있잖아요. 다들 처음 해보는 거를 열심히 해서 성공시킨 것을 많이 경험해 봤잖습니까. 그래서 자신 있게 얘기해 줄 수 있어요. ‘하면 된다!’ 미국도 일본도 반도체 제조를 안 해요. 소프트웨어 하지. 근데 우리는 지난 2월에 경주에서 반도체 학술대회라는 걸 했는데 전국에서 대학생 3000명이 몰렸습니다. 희망이 있는 거죠.
다만 요즘에는 거트(Gut)라고 어떤 오기 같은 게 자꾸 없어져서 문제예요. 하지만 잘만 유도해 주면 정말 좋은 아이디어 많이 냅니다. 가능성을 보여주면 죽어라 일합니다. 어제도 학생들하고 회의하면서 느낀 게 아이디어들이 정말 기발해요. 뭔가 해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요.”
일본 남서부 구마모토 외곽의 기쿠요 마을에 지어진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 TSMC는 올해 2월 24일 글로벌 확장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첫 번째 반도체 공장을 개장했다고 밝혔다. [AP/뉴시스]
중국의 인해전술에 준비해야
의대 열풍도 걱정입니다.
“의대로만 가는 건 좀 걱정이에요. 미국도 의대가 좋긴 하지만 그래도 공대를 선택하는 애들이 있거든요. 구글이나 애플 같은 데서 연봉 5억을 준단 말이에요. 창업해서 회사 차리면 더 많이 벌 수 있고요. 무조건 돈이나 직업의 안정성 때문에 의사를 택하지는 않죠. 우리도 빨리 엔지니어 대접을 더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중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중국은 공산당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잖아요. 모든 게 공산당에서 결정을 내리고 공산당에서 해요. 좋은 방향을 제시하면 잘 뚫리고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제시하면 엉망이 되는 거죠. 미·중 갈등이라고 하지만 미국의 인텔이나 AMD나 퀄컴의 3분의 1 시장이 중국이에요. 중국에 팔아먹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연구도 잘해요. 지난해 국제고체회로학회에 논문이 230편 발표됐는데 그중에 70개가 중국 거예요. 1등이에요. 우리가 50개로 2등이고요. 중국은 이미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는 미국과 경쟁할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고 봅니다. 제조공정에서 미국의 제재 때문에 밀리고 있지만 오히려 미국의 제재 때문에 기술 자립이 더 빨라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을 상대할 때는 정경분리 원칙이 필요해 보여요. 저는 항상 대만한테 배우자고 그래요. 지정학적 위험으로 보면 대만은 우리보다 더 심각하거든요. 중국으로부터 위협도 받고 있고, 미국한테 붙어야 하고. TSMC 공장이나 연구소도 중국에 많아요. 어쨌든 같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죠. 현장에서 대만을 보면 중국을 달래고 어르는 모습이 ‘저렇게까지 하는구나’ 생각될 때가 있을 정도예요.”
우리 정부에 조언한다면요.
“지금 대학교 1학년 애들이 반도체로 먹고살게 15년 후를 내다보고 컨트롤타워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다 각 부처에 흩어져 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도 계속 기술이 주도하는 세상이죠. 다른 나라 기술이 주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잘 해왔고 저력도 있으니 이제 어떻게 갈지 볼 수 있는 안목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사람도 키우고 또 비전도 만들어야 하는데 계속 뒷북만 치고 있을 수는 없죠.”
출처: 신동아 https://shindonga.donga.com/society/article/all/13/5140960/1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하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한국 반도체, 몸은 어른인데 머리는 아직 멀었다" [플라톤 아카데미] 유회준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밖에서 본’ 한국 반도체
필자_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허문명이 만난 사람'이란 인터뷰 시리즈로 사회문화 각계의 다양한 생각을 조명한다. 저서로 <김지하와 그의 시대>, <여성이여 세상의 멘토가 되라>, <삶의 나침반 1,2>,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