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증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의료혁신
● 실제 적용해 보니 재입원도 줄고 재활도 빨라
● 핀란드 등 44개국 도입, 세계보건기구도 인정
● 정신과 의사는 힘든 삶을 견디게 해주는 조력자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 선보이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는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듯 공허감을 겪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 <편집자 주>
조현병 전문가인 김성수 전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장(경기도립정신병원의 새 이름). [박해윤 기자]
6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중증 정신질환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전북 완도에 살고 있는 60대 아버지가 18년째 조현병을 앓고 있는 서른네 살 딸이 갑자기 “이웃집이 자신을 감시한다”며 천장을 막대기로 마구 두들기는 망상 증상이 심해지자 정신병원 응급실을 찾아 다녔지만 병상이 없다며 거절당해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버지가 돌아다닌 거리는 해남·나주 등 240㎞나 됐다고 한다.
6월 28일 ‘동아일보’ 인터넷기사에 전북 완도에서 중증 정신질환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이 실렸다. 18년째 조현병을 앓는 30대 딸을 돌보는 60대 아버지는 딸의 망상 증상이 심해지자 응급실을 찾아 240㎞ 거리를 돌아다녔으나 “병상이 없다”며 거절당해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동아일보]
마음도 몸처럼 응급 상황이 닥친다. 정신질환자의 응급 상황이란 피해망상이나 환청 같은 증상이 심해져 자살이나 폭력 등 자신이나 타인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로 추산한 조현병, 지속적 망상장애, 재발성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 중증 정신질환자 수는 지난해 107만 명으로 2017년보다 2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중증 정신질환자는 자신이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기 어려운 상태가 많아 보호자의 동의나 경찰에 의해 입원하는 비자발적 입원이 많다. 하지만 치료 가능한 병상이 부족해 입원도 여의치 않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간 보건예산 가운데 정신건강 예산 비중은 2.7%로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하는 5%의 절반 수준이다.
1인 가구가 늘고 있어 정신질환자의 돌봄을 가족에게 떠넘기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중증 및 응급 정신의료를 필수의료에 포함해 중환자 병상 수를 확보하고, 퇴원 후에도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인프라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야 환자와 가족이 살고 사회도 더 안전해질 수 있다.
조현병 전문가인 김성수 전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장(경기도립정신병원의 새 이름)은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의료 실험을 하고 있다. 이름하여 ‘오픈 다이얼로그’다.
언뜻 ‘열린 대화’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정신질환 치료에서 말하는 개념은 단지 ‘대화’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위급 상황 시 응급처치, 입원 절차, 퇴원 후 재활치료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친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이다.
그는 2022년 9월부터 수원에서 우리나라 지자체 최초로 시험 운영에 들어간 ‘오픈 다이얼로그(Open Dialogue)’ 실행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2024년까지 아주대학병원과 이음병원(경기용인 흥덕지구)이 공동으로 강제 입원이 아닌 비강압치료, 회복 프로그램, 환자가 법적 결정권을 행사할 때 돕는 조력 기술 등 가이드라인을 개발하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개발 과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
최근 두 권의 번역서 ‘정신증을 위한 오픈 다이얼로그’와 ‘대화정신의학’을 펴내기도 한 그는 한국 최초로 영국 오픈 다이얼로그 협회의 공인 훈련을 마쳤다. 현재는 국제 훈련자 양성과정을 밟고 있으며 ‘한국 오픈 다이얼로그 학회(Korean Open Dialogue Society)’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봤다.
김성수 전 병원장이 출간한 두 권의 번역서. [한국임상정신분석연구소 ICP]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하는 의료혁신
우선, 오픈 다이얼로그란 말 자체가 생소하다.
심한 조현병이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취약하고 위태로운 처지라는 점에서 ‘심리사회적 약자’다. 대부분 병원 치료도 거부하고 집에만 고립돼 있는 경우가 많다. 병 자체가 서서히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응급 상황이 왔을 때 당사자나 가족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응급 상황이 발생한 다음에야 허둥지둥 거칠게 치료 시스템으로 떠밀어 넣는 면이 많다. 경찰이 의뢰하는 이른바 ‘응급 입원’을 통해 폐쇄 병동에 보내는 것이다.
환자 입장에서는 심리적 저항이 심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낯선 사람들(구급대원)이 집에 들이닥쳐 몸을 묶은 후 캄캄한 산속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데려다 놓는다고 하면 공포스럽지 않겠는가. 울부짖고 저항하는 환자를 붙들고 병실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당사자 입장에선 엄청난 트라우마가 된다. 게다가 원치 않은 입원이니 치료도 힘들고 퇴원을 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지역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병의원, 정신건강복지센터, 정신재활기관 등은 공급자 중심으로 배치돼 있어 당사자가 일일이 찾아다니기가 쉽지 않다.
‘오픈 다이얼로그’는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대화를 통해 본격적인 치료로 진입하는 신개념 접근법이다. [Gettyimage]
‘오픈 다이얼로그’는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신개념 접근법이다. 여기에는 위급 상황에서부터 재활까지 의료 소비자인 환자를 중심에 놓고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의 치료진이 협업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을 아우른다. 응급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환자들에게 조금 더 일찍 다가가고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면 본격적인 치료로 진입하는 과정이 굉장히 부드러워진다. ‘오픈 다이얼로그’는 이 서비스 과정 전체를 환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치료 효과도 높인다. 비용도 적게 든다. 환자 한 사람을 강제 입원시킬 경우 거기서 발생하는 환자의 부상, 종사자의 부상, 그리고 입원에 따르는 유무형의 비용이 더 든다.”
실제로 그는 병원장으로 일하던 2020년부터 2년간 제도를 도입해 성과를 거뒀다. 도입 1년 후 조사해 보니 퇴원 한 달 이내 재입원율이 6.6%(전국 평균 26.3%)로 크게 떨어졌고, 중환자의 경우 입원할 때 신체적 결박을 경험한 환자도 6%(전국 평균 29%)까지 줄었다. 평균 입원 기간도 국내 평균(199일)보다 엄청나게 짧은 21일이었다.
김성수 병원장은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의료 실험인 ‘오픈 다이얼로그’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위급 상황 시 응급처치, 입원 절차, 퇴원 후 재활치료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친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이다. [박해윤 기자]
현장에 적용된 사례
앞서 동아일보 보도에 나온 전북 완도 부녀의 경우 병실 자체가 없어 입원조차 하지 못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수십 년 전 출발 당시의 우리나라 정신병원은 치료보다는 저비용을 들여 환자를 ‘수용’하는 개념에 가까웠다. 1995년에 정신보건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정신과 환자들이 병원이 아닌 요양원이나 기도원 등에 수용돼 있었다. 법 제정을 통해 비로소 이분들을 위한 병원 치료 규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사회적 자원 자체가 적었다. 예를 들어 일반 병원의 경우 병실 하나에 8명 이상 입원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정신병원은 20여 명까지 가능하게 한 식이다. 또 병실에 화장실이나 세면대 같은 기본 시설을 두지 않아도 됐고, 침대가 아니라 방바닥에 수용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점점 병실에 둘 수 있는 환자 수도 줄이고 시설기준도 강화해 왔는데 의료 수가(酬價) 등 치료 비용은 보전이 안 됐다. 이렇다 보니 집중적인 양질의 돌봄이 필요한 중환자를 위한 입원 치료 시스템이 발달하기가 어려웠다.
동아일보에 소개된 환자의 경우 기사를 읽어보니 조현병과 천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 정신 응급 환자는 이처럼 내외과 질환 또는 부상을 함께 갖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종합병원 정신과 병동에 입원해야 한다. 종합병원들은 병원을 운영할수록 수지가 맞지 않으니 병실을 점차 없애기 시작했다. 중증외상센터가 외상환자를 보면 볼수록 적자가 나니 병원에서 홀대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몸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중환자들이 병원을 찾아 전전하다 급기야 사망하는 일이 뉴스에 자주 나오지 않는가. 정신과도 급성 응급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에 걸맞은 좋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동아일보가 그런 문제를 잘 짚었다.”
만약 기사에 나온 부녀가 오픈 다이얼로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면 어떤 절차로 진행됐을까.
“우선 지역 내 서비스 즉 정신건강복지센터나 병원 치료팀이 가정방문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와 가족이 의료진과 둘러앉아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충분한 대화로 해법을 의논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숙련된 대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대화의 과정에서 당사자와 가족은 의료진을 신뢰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외래 진료든 입원이든 당사자를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 방향이 논의된다. 실제로 많은 경우 입원하지 않고 외래 진료나 센터의 사례 관리 서비스만으로도 위기를 넘긴 경우가 있다. 입원이 불가피하다면 가족만 절박하게 병상을 수소문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도우며 그 과정은 당사자의 의견을 묻고 위로하며 안심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오픈 다이얼로그는 입원 전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비자발적 입원 상태에서도 진행될 수 있다. 하지만 입원을 통해 가족 및 사회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연결되는 작업을 함으로써 치료 효과가 획기적으로 좋아질 수 있다.
그런데 현재는 동아일보 보도에서도 나왔지만 가족이 병상을 수소문하든 경찰이 입원 병원을 섭외하든 병실 찾는 것이 너무 어렵다. 전체 병상수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응급환자가 제때 입원해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급성기 병동이 적은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정신과 중환자들을 위한 의료 수가나 제도가 없는 상황이다. 정부도 심각함을 알고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언뜻 들으면 너무 이상적이다. 치료가 적용된 실제 사례를 들어줄 수 있나.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선에서 소개해 보겠다. 30대 한 젊은이가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환각에 시달리며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가족들이 병원에 가자고 해도 거부했다. 지역 내 오픈 다이얼로그 시범 사업이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부모의 요청으로 우리 팀 네 명이 자택을 방문했다. 당사자, 부모와 같이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걸 우리 쪽에서는 ‘네트워크 모임’이라고 부르는데 환자뿐 아니라 가족을 함께 만나는 것을 말한다.”
실제 만나본 환자는 어땠나.
“많이 긴장해 있었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한 단어를 말하고 다음 단어를 말하기까지 10초에서 30초까지 걸렸다. 우리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끈기 있게 경청했다. 중간중간 당사자와 가족 앞에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오픈 다이얼로그에선 보통의 병원 치료와는 달리 의료진이 당사자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그들은 이해받는다고 느끼며 차츰 스스로를 더 잘 표현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의료진 고유의 훈련된 스킬과 팀워크가 중요하다.”
첫 만남은 어땠나.
“당사자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다. 마음속에 있는 걸 표현할 수 있게 돼서 좋았다’고 했다. 가족들도 이런 반응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낙담했는데 가능하다고 느끼게 된 거다.”
이후 치료는 어떻게 진행됐나.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 날, 당사자가 자신의 환청을 치료받고 싶다며 스스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통원 치료를 통해 상담과 약물로 증상이 매우 호전됐다. 병을 얻고 상당 기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원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직업훈련까지 병행하는 주간 재활기관으로 옮겨갔다.”
김 전 원장은 “당사자가 입원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치료 방식을 택하면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조울증을 겪어온 또 다른 당사자가 있었는데 네트워크 모임을 통해 신뢰가 형성됐다. 이후 입원이 불가피할 정도의 조증으로 인해 환자와 가족들이 당황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치료진이 입원을 권유했고, 흔쾌히 입원 치료를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이 당사자 역시 강제 입원을 피할 수 있었다.”
환자라는 말 대신 ‘당사자’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WHO(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해 최근 정신건강 영역에서는 환자 ‘페이션트(patient)’라는 용어 대신 ‘(질환의) 경험을 지닌 사람’ ‘서비스 이용자’라는 말을 쓴다. (의료)소비자라고 일컫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 운동에서 사용된 ‘당사자’라는 표현이 차츰 많이 사용되고 있다. 치료의 수동적 객체가 아닌, 능동적으로 회복을 일구어가는 ‘당사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스스로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정신과 증상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도 크지만 치료 과정에서 받는 고통 역시 상당하다. 강제로 입원되고, 내키지 않는 약을 먹어야 하며, 약 부작용 또한 적지 않은 등 상당히 거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큰 스트레스는 정신병 환자로 진단받는 일이다. 느닷없이 ‘정신질환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은 대단히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환자라는 명칭 대신 그들의 능동성을 존중하는 당사자라는 명칭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치유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감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김 전원장이 오픈 다이얼로그 전도사가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을 당시 한국 정신의학의 주류는 약물치료였다. 환자들의 정신병 증상을 다 점수로 매겼다. 예컨대 26세 남자 환자 ◯◯는 정신증 척도에서 몇 점이 나왔는데 열심히 약을 써서 몇 점 아래로 떨어뜨려 보자, 이런 식이었다. 전공의 1년차 때 일인데 내가 열심히 치료해 퇴원시킨 환자들이 2년차, 3년차 때마다 반복해 또 입원하는 거다. 정신병은 낫지 않는 병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많이 들었다. 약 처방만으로 환자를 과연 고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깊어갔다.
사실 정신병은 진단 자체가 어렵다. 몸의 경우는 뼈가 부러지면 엑스레이로 진단하고 붙는 것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정신병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단 장비가 없다. 내 진단이 과연 맞는지, 어떻게 치료해야 재발이 안 되는지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문의 자격을 얻었고, 이후 경기도 내 만성 환자 대상 정신병원에서 월급쟁이 의사로 일하게 됐다. 거기서 만난 환자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본래 정신분석가가 되려고 했던 그는 이때의 경험이 진로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했다.
어떤 충격이었나.
“의사 한 사람이 70~80명씩 입원 환자를 돌보는 병원이었다. 군대 내무반식 병실에서 왼쪽과 오른쪽 일자형으로 도열한 침상을 회진하는 게 일이었다. 환자들은 의료수급 혜택에만 의지하며 10년, 20년씩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오는 가족도 없고 퇴원시킬 수 있는 길도, 갈 곳도 없었다.
어느 날 한 여자 환자를 만나게 됐다. 20년 가까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분이었다. 배가 아프다고 해서 진찰해 보니 심상치 않았다. 어렵게 종합병원으로 후송한 뒤에 위암 말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후 그 환자를 잊고 지냈다. 당시 나는 인근 노인병원 야간 당직 아르바이트도 이따금 하고 있었는데 몇 달 뒤 중환자실에 위급한 환자가 있다고 해서 가보니 바로 그 환자였다. 보호자도 없고 치료 시기도 놓쳐서 수술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치의였던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했는데, 금방 돌아가셨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용인정신병원으로 이직하며 새로운 치료 방법을 고심했다.
“이토록 참혹한 상황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고민 끝에 용인정신병원으로 옮겨서 용인시 정신보건센터장으로 일했다. 거기서 10년 넘게 일하며 병원 진료와 지역사회 일을 병행했다. 환자 집에서 밥도 같이 해 먹고, 정신장애 당사자들과 해남까지 국토 종주 자전거 여행도 하고, 이마트에 장애인 고용도 알선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환자들 상태가 호전되고 삶이 나아지는 것을 목격하며 내 방식의 치료에 확신이 생겼다.
미술에 재능 있는 환자들의 창작 공간을 만들었고, 조현병 당사자 세 명과 함께 8일간 스위스를 여행하며 작품을 전시하고, 알프스 전망대에도 같이 올랐다. 음악을 즐기는 환자들과는 밴드를 조직해 콘서트를 열어 함께 연주도 했다. 환자들이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도하다 보니까 오픈 다이얼로그까지 온 거다.”
힘든 삶을 견디게 해주는 조력자
이 대목에서 그가 잠시 하던 말을 멈추더니 이렇게 물었다.
“정신증 치료는 외과랑 비슷할까, 산부인과랑 비슷할까?”
그가 자문자답하듯 말을 이었다.
“사실 외과 치료는 환자가 할 일이 별로 없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취과 의사가 재우고 그동안 수술이 진행된다. 모든 과정에서 환자는 수동적이다. 하지만 산부인과는 다르다. 의사와 간호사는 조력자일 뿐 아이를 낳는 사람은 산모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신과는 외과보다는 산부인과 의사와 비슷하다고 본다. 회복을 해내고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환자 당사자이고, 우리 같은 전문가들은 거드는 사람들이다. 정신과 의사라고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대답할 수 없는 게 훨씬 많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듣고 조력하는 거다.”
그는 오픈 다이얼로그 경험을 통해 의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이 정리할 수 있다고 했다.
“‘불확실성에 대한 인내’라는 개념이 오픈 다이얼로그 핵심 개념 중에 하나인데, 예를 들어 상담을 하다 보면 환자들이 뾰족한 수가 없는 난국에 갇혀 있는 경우가 있다.”
무슨 말인가?
“당사자가 처한 상황의 원인이 남편의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빈곤 같은 상황이라면 이는 쉽게 바꿀 수 없지 않은가. 정신과 의사는 이런 답답하고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는 환자 옆에서 한 달이고 1년이고 꾸준히 함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자체가 굉장히 치료적일 수 있다고 본다. 어찌 보면 우리 같은 의사들이 하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런 앞뒤가 막힌 상황을 당사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때까지 인내하면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의사가 해 준다면 최고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일본 정신과 의사가 쓴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힘’이 바로 그런 이야기다. 영국 정신분석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므로 의사라 하더라도 타인이 가지고 있는 필터로 분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정신 치료, 정신분석이라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고정관념을 겸허히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경청하며 환자의 마음에 함께 공명한다는 거다. 이것이 또한 오픈 다이얼로그의 핵심 정신이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힘. [끌레마]
정신적 위기 상황에 놓인 당사자는 마음속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에 직면한다. 그 순간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 그 기회의 순간에 당사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오픈 다이얼로그가 제공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오픈 다이얼로그 운동을 하면서 의사로서 갖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환자들에게 선택지를 더 많이 제공하게 된 것 같다. 인간은 각자 삶에서 겪는 난관들을 헤쳐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경제적 타격, 건강 문제 등 다양한 위기나 상실을 겪게 될 때 원래 지닌 마음의 힘을 가동하지 못하는 이른바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 못 자고 못 먹고 에너지가 확 떨어지는 등의 생리적 변화까지 겹치면서 역량 발휘가 더 안 된다. 불안은 기본적으로 화재경보기처럼 인간에게 꼭 있어야 되는 생존 기능이다. 이 경보가 아무 때나 막 울리는 게 공황발작이다. 지나치게 각성돼 있는 불안 시스템을 안정화하고 생리적으로 우울한 상태를 보정해 주는 데에 약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약물 외에도 도움 될 수 있는 다른 옵션들 역시 존재한다.”
정신적 위기 상황에 놓인 당사자는 마음속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에 직면한다. 그 순간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 [Gettyimage]
운동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우울증이 심할 때는 운동을 시도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운동은 항우울제 버금가는 효과가 있다는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운동 외에도 이걸 강화하는 여러 다양한 치료가 있는데 명상, 마음 챙김, 다양한 형태의 심리치료가 효과가 있다. 약물이 부담스러우면 이런 거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약도 선택지가 다양하다. 항우울제는 효과가 좀 늦지만 금단이나 내성 같은 의존성이 없다는 장점이 있고 항불안제는 의존성은 있지만 효과가 빠르다. 기본적으로 정신과 치료는 외과처럼 뭔가를 도려내는 게 아니라 환자 내면에 본래 존재하는 힘이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거다. 오픈 다이얼로그를 하면서 나의 이런 조력자 역할을 좀 더 자신감 있게 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오픈 다이얼로그 출발은 외국 경험에서 온 것이라고 들었다.
“1980년대 북유럽 핀란드 라플란드 지역에서 처음 시도됐다. 19년 동안 오픈 다이얼로그의 적용과 정신장애인 치유 과정을 추적 조사한 결과, 초기 정신증 환자의 85%가 회복됐고 사회에 복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오픈 다이알로그는 현재 약 44개 국가에 도입돼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정신건강 서비스 모범 사례로 등재해 적극 권장하고 있다.
1970~80년대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른바 ‘당사자 운동’이라는 게 생긴다. 정신질환 증상을 낮추는 것만이 회복이 아니라 증상이 남아 있더라도, 즉 환청을 듣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정신적 증상이 남아 있더라도 직업과 집이 있고 친구가 있으면 생활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증상을 없애는 것만 회복이라고 정의했는데 ‘남아 있더라도 얼마나 사회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이런 시각으로 당사자를 보자는 거다. 이런 패러다임이 서구에서 시작돼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됐고, WHO의 글로벌 정신건강 정책의 핵심이 됐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인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오픈 다이얼로그 서비스를 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 팀이 하는 일은 현재 수원시에만 국한돼 시험적으로 진행하는 국내 최초의 연구개발 사업이다. 현재로서는 수원시민에 한해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의뢰를 통해서만 입원할 수 있다. 병동의 경우는 연구가 진행되는 아주대병원, 이음병원, 천주의성요한 병원(전남 광주)에서만 시도되고 있다. 우리 팀원들은 현재 10명 정도로 조를 짜서 주 2회 정도 가정이나 병원에서 진행하고 있으며 진행팀 인원을 차츰 늘려나가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은 향후 전국의 병원과 지역정신건강서비스에서 오픈 다이얼로그를 실천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개발하는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전국 단위로 지속적 훈련과 보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앙정부의 정책이 추진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오픈 다이얼로그의 성공적 도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치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양질의 훈련 및 실행 과정에 대한 지속적 자문이 필수적이다. 최근 여러 지역에서 관심과 열정을 공유하는 분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각자의 현장에서 이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한국 오픈 다이얼로그 학회’도 만들게 됐다.”
신동아 2023년 8월호
출처: 신동아: https://shindonga.donga.com/List/3/all/13/3840547/1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하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성공한 사람이 갖는 삶의 태도는 '변화 믿는 마음'" (희망연구소 나진경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 인터뷰
필자_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허문명이 만난 사람'이란 인터뷰 시리즈로 사회문화 각계의 다양한 생각을 조명한다. 저서로 <김지하와 그의 시대>, <여성이여 세상의 멘토가 되라>, <삶의 나침반 1,2>,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가 있다.
● 중증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의료혁신
● 실제 적용해 보니 재입원도 줄고 재활도 빨라
● 핀란드 등 44개국 도입, 세계보건기구도 인정
● 정신과 의사는 힘든 삶을 견디게 해주는 조력자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 선보이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는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세상에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듯 공허감을 겪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 <편집자 주>
조현병 전문가인 김성수 전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장(경기도립정신병원의 새 이름). [박해윤 기자]
6월 28일자 ‘동아일보’는 중증 정신질환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전북 완도에 살고 있는 60대 아버지가 18년째 조현병을 앓고 있는 서른네 살 딸이 갑자기 “이웃집이 자신을 감시한다”며 천장을 막대기로 마구 두들기는 망상 증상이 심해지자 정신병원 응급실을 찾아 다녔지만 병상이 없다며 거절당해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버지가 돌아다닌 거리는 해남·나주 등 240㎞나 됐다고 한다.
6월 28일 ‘동아일보’ 인터넷기사에 전북 완도에서 중증 정신질환자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이 실렸다. 18년째 조현병을 앓는 30대 딸을 돌보는 60대 아버지는 딸의 망상 증상이 심해지자 응급실을 찾아 240㎞ 거리를 돌아다녔으나 “병상이 없다”며 거절당해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동아일보]
마음도 몸처럼 응급 상황이 닥친다. 정신질환자의 응급 상황이란 피해망상이나 환청 같은 증상이 심해져 자살이나 폭력 등 자신이나 타인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로 추산한 조현병, 지속적 망상장애, 재발성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 중증 정신질환자 수는 지난해 107만 명으로 2017년보다 2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중증 정신질환자는 자신이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기 어려운 상태가 많아 보호자의 동의나 경찰에 의해 입원하는 비자발적 입원이 많다. 하지만 치료 가능한 병상이 부족해 입원도 여의치 않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간 보건예산 가운데 정신건강 예산 비중은 2.7%로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하는 5%의 절반 수준이다.
1인 가구가 늘고 있어 정신질환자의 돌봄을 가족에게 떠넘기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중증 및 응급 정신의료를 필수의료에 포함해 중환자 병상 수를 확보하고, 퇴원 후에도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인프라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야 환자와 가족이 살고 사회도 더 안전해질 수 있다.
조현병 전문가인 김성수 전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장(경기도립정신병원의 새 이름)은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의료 실험을 하고 있다. 이름하여 ‘오픈 다이얼로그’다.
언뜻 ‘열린 대화’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정신질환 치료에서 말하는 개념은 단지 ‘대화’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위급 상황 시 응급처치, 입원 절차, 퇴원 후 재활치료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친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이다.
그는 2022년 9월부터 수원에서 우리나라 지자체 최초로 시험 운영에 들어간 ‘오픈 다이얼로그(Open Dialogue)’ 실행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2024년까지 아주대학병원과 이음병원(경기용인 흥덕지구)이 공동으로 강제 입원이 아닌 비강압치료, 회복 프로그램, 환자가 법적 결정권을 행사할 때 돕는 조력 기술 등 가이드라인을 개발하는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개발 과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
최근 두 권의 번역서 ‘정신증을 위한 오픈 다이얼로그’와 ‘대화정신의학’을 펴내기도 한 그는 한국 최초로 영국 오픈 다이얼로그 협회의 공인 훈련을 마쳤다. 현재는 국제 훈련자 양성과정을 밟고 있으며 ‘한국 오픈 다이얼로그 학회(Korean Open Dialogue Society)’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봤다.
김성수 전 병원장이 출간한 두 권의 번역서. [한국임상정신분석연구소 ICP]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하는 의료혁신
우선, 오픈 다이얼로그란 말 자체가 생소하다.
심한 조현병이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취약하고 위태로운 처지라는 점에서 ‘심리사회적 약자’다. 대부분 병원 치료도 거부하고 집에만 고립돼 있는 경우가 많다. 병 자체가 서서히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응급 상황이 왔을 때 당사자나 가족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응급 상황이 발생한 다음에야 허둥지둥 거칠게 치료 시스템으로 떠밀어 넣는 면이 많다. 경찰이 의뢰하는 이른바 ‘응급 입원’을 통해 폐쇄 병동에 보내는 것이다.
환자 입장에서는 심리적 저항이 심할 수밖에 없다. 갑자기 낯선 사람들(구급대원)이 집에 들이닥쳐 몸을 묶은 후 캄캄한 산속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데려다 놓는다고 하면 공포스럽지 않겠는가. 울부짖고 저항하는 환자를 붙들고 병실로 옮기는 과정 자체가 당사자 입장에선 엄청난 트라우마가 된다. 게다가 원치 않은 입원이니 치료도 힘들고 퇴원을 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지역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병의원, 정신건강복지센터, 정신재활기관 등은 공급자 중심으로 배치돼 있어 당사자가 일일이 찾아다니기가 쉽지 않다.
‘오픈 다이얼로그’는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대화를 통해 본격적인 치료로 진입하는 신개념 접근법이다. [Gettyimage]
‘오픈 다이얼로그’는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신개념 접근법이다. 여기에는 위급 상황에서부터 재활까지 의료 소비자인 환자를 중심에 놓고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의 치료진이 협업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을 아우른다. 응급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환자들에게 조금 더 일찍 다가가고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면 본격적인 치료로 진입하는 과정이 굉장히 부드러워진다. ‘오픈 다이얼로그’는 이 서비스 과정 전체를 환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치료 효과도 높인다. 비용도 적게 든다. 환자 한 사람을 강제 입원시킬 경우 거기서 발생하는 환자의 부상, 종사자의 부상, 그리고 입원에 따르는 유무형의 비용이 더 든다.”
실제로 그는 병원장으로 일하던 2020년부터 2년간 제도를 도입해 성과를 거뒀다. 도입 1년 후 조사해 보니 퇴원 한 달 이내 재입원율이 6.6%(전국 평균 26.3%)로 크게 떨어졌고, 중환자의 경우 입원할 때 신체적 결박을 경험한 환자도 6%(전국 평균 29%)까지 줄었다. 평균 입원 기간도 국내 평균(199일)보다 엄청나게 짧은 21일이었다.
김성수 병원장은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의료 실험인 ‘오픈 다이얼로그’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위급 상황 시 응급처치, 입원 절차, 퇴원 후 재활치료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친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이다. [박해윤 기자]
현장에 적용된 사례
앞서 동아일보 보도에 나온 전북 완도 부녀의 경우 병실 자체가 없어 입원조차 하지 못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수십 년 전 출발 당시의 우리나라 정신병원은 치료보다는 저비용을 들여 환자를 ‘수용’하는 개념에 가까웠다. 1995년에 정신보건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정신과 환자들이 병원이 아닌 요양원이나 기도원 등에 수용돼 있었다. 법 제정을 통해 비로소 이분들을 위한 병원 치료 규정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사회적 자원 자체가 적었다. 예를 들어 일반 병원의 경우 병실 하나에 8명 이상 입원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정신병원은 20여 명까지 가능하게 한 식이다. 또 병실에 화장실이나 세면대 같은 기본 시설을 두지 않아도 됐고, 침대가 아니라 방바닥에 수용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점점 병실에 둘 수 있는 환자 수도 줄이고 시설기준도 강화해 왔는데 의료 수가(酬價) 등 치료 비용은 보전이 안 됐다. 이렇다 보니 집중적인 양질의 돌봄이 필요한 중환자를 위한 입원 치료 시스템이 발달하기가 어려웠다.
동아일보에 소개된 환자의 경우 기사를 읽어보니 조현병과 천식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 정신 응급 환자는 이처럼 내외과 질환 또는 부상을 함께 갖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종합병원 정신과 병동에 입원해야 한다. 종합병원들은 병원을 운영할수록 수지가 맞지 않으니 병실을 점차 없애기 시작했다. 중증외상센터가 외상환자를 보면 볼수록 적자가 나니 병원에서 홀대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몸에 심각한 부상을 당한 중환자들이 병원을 찾아 전전하다 급기야 사망하는 일이 뉴스에 자주 나오지 않는가. 정신과도 급성 응급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에 걸맞은 좋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동아일보가 그런 문제를 잘 짚었다.”
만약 기사에 나온 부녀가 오픈 다이얼로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면 어떤 절차로 진행됐을까.
“우선 지역 내 서비스 즉 정신건강복지센터나 병원 치료팀이 가정방문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와 가족이 의료진과 둘러앉아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충분한 대화로 해법을 의논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숙련된 대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런 대화의 과정에서 당사자와 가족은 의료진을 신뢰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외래 진료든 입원이든 당사자를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료 방향이 논의된다. 실제로 많은 경우 입원하지 않고 외래 진료나 센터의 사례 관리 서비스만으로도 위기를 넘긴 경우가 있다. 입원이 불가피하다면 가족만 절박하게 병상을 수소문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도우며 그 과정은 당사자의 의견을 묻고 위로하며 안심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오픈 다이얼로그는 입원 전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비자발적 입원 상태에서도 진행될 수 있다. 하지만 입원을 통해 가족 및 사회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연결되는 작업을 함으로써 치료 효과가 획기적으로 좋아질 수 있다.
그런데 현재는 동아일보 보도에서도 나왔지만 가족이 병상을 수소문하든 경찰이 입원 병원을 섭외하든 병실 찾는 것이 너무 어렵다. 전체 병상수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응급환자가 제때 입원해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급성기 병동이 적은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정신과 중환자들을 위한 의료 수가나 제도가 없는 상황이다. 정부도 심각함을 알고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언뜻 들으면 너무 이상적이다. 치료가 적용된 실제 사례를 들어줄 수 있나.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선에서 소개해 보겠다. 30대 한 젊은이가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환각에 시달리며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가족들이 병원에 가자고 해도 거부했다. 지역 내 오픈 다이얼로그 시범 사업이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부모의 요청으로 우리 팀 네 명이 자택을 방문했다. 당사자, 부모와 같이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걸 우리 쪽에서는 ‘네트워크 모임’이라고 부르는데 환자뿐 아니라 가족을 함께 만나는 것을 말한다.”
실제 만나본 환자는 어땠나.
“많이 긴장해 있었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한 단어를 말하고 다음 단어를 말하기까지 10초에서 30초까지 걸렸다. 우리는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끈기 있게 경청했다. 중간중간 당사자와 가족 앞에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오픈 다이얼로그에선 보통의 병원 치료와는 달리 의료진이 당사자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그들은 이해받는다고 느끼며 차츰 스스로를 더 잘 표현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의료진 고유의 훈련된 스킬과 팀워크가 중요하다.”
첫 만남은 어땠나.
“당사자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다. 마음속에 있는 걸 표현할 수 있게 돼서 좋았다’고 했다. 가족들도 이런 반응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낙담했는데 가능하다고 느끼게 된 거다.”
이후 치료는 어떻게 진행됐나.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던 어느 날, 당사자가 자신의 환청을 치료받고 싶다며 스스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통원 치료를 통해 상담과 약물로 증상이 매우 호전됐다. 병을 얻고 상당 기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원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직업훈련까지 병행하는 주간 재활기관으로 옮겨갔다.”
김 전 원장은 “당사자가 입원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치료 방식을 택하면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조울증을 겪어온 또 다른 당사자가 있었는데 네트워크 모임을 통해 신뢰가 형성됐다. 이후 입원이 불가피할 정도의 조증으로 인해 환자와 가족들이 당황하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치료진이 입원을 권유했고, 흔쾌히 입원 치료를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이 당사자 역시 강제 입원을 피할 수 있었다.”
환자라는 말 대신 ‘당사자’라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WHO(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해 최근 정신건강 영역에서는 환자 ‘페이션트(patient)’라는 용어 대신 ‘(질환의) 경험을 지닌 사람’ ‘서비스 이용자’라는 말을 쓴다. (의료)소비자라고 일컫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 운동에서 사용된 ‘당사자’라는 표현이 차츰 많이 사용되고 있다. 치료의 수동적 객체가 아닌, 능동적으로 회복을 일구어가는 ‘당사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스스로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정신과 증상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도 크지만 치료 과정에서 받는 고통 역시 상당하다. 강제로 입원되고, 내키지 않는 약을 먹어야 하며, 약 부작용 또한 적지 않은 등 상당히 거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큰 스트레스는 정신병 환자로 진단받는 일이다. 느닷없이 ‘정신질환자’라는 딱지가 붙는 것은 대단히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환자라는 명칭 대신 그들의 능동성을 존중하는 당사자라는 명칭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치유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감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한 김 전원장이 오픈 다이얼로그 전도사가 된 데에는 그 나름대로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을 당시 한국 정신의학의 주류는 약물치료였다. 환자들의 정신병 증상을 다 점수로 매겼다. 예컨대 26세 남자 환자 ◯◯는 정신증 척도에서 몇 점이 나왔는데 열심히 약을 써서 몇 점 아래로 떨어뜨려 보자, 이런 식이었다. 전공의 1년차 때 일인데 내가 열심히 치료해 퇴원시킨 환자들이 2년차, 3년차 때마다 반복해 또 입원하는 거다. 정신병은 낫지 않는 병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많이 들었다. 약 처방만으로 환자를 과연 고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깊어갔다.
사실 정신병은 진단 자체가 어렵다. 몸의 경우는 뼈가 부러지면 엑스레이로 진단하고 붙는 것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정신병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단 장비가 없다. 내 진단이 과연 맞는지, 어떻게 치료해야 재발이 안 되는지 하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문의 자격을 얻었고, 이후 경기도 내 만성 환자 대상 정신병원에서 월급쟁이 의사로 일하게 됐다. 거기서 만난 환자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본래 정신분석가가 되려고 했던 그는 이때의 경험이 진로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했다.
어떤 충격이었나.
“의사 한 사람이 70~80명씩 입원 환자를 돌보는 병원이었다. 군대 내무반식 병실에서 왼쪽과 오른쪽 일자형으로 도열한 침상을 회진하는 게 일이었다. 환자들은 의료수급 혜택에만 의지하며 10년, 20년씩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오는 가족도 없고 퇴원시킬 수 있는 길도, 갈 곳도 없었다.
어느 날 한 여자 환자를 만나게 됐다. 20년 가까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분이었다. 배가 아프다고 해서 진찰해 보니 심상치 않았다. 어렵게 종합병원으로 후송한 뒤에 위암 말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후 그 환자를 잊고 지냈다. 당시 나는 인근 노인병원 야간 당직 아르바이트도 이따금 하고 있었는데 몇 달 뒤 중환자실에 위급한 환자가 있다고 해서 가보니 바로 그 환자였다. 보호자도 없고 치료 시기도 놓쳐서 수술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치의였던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했는데, 금방 돌아가셨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용인정신병원으로 이직하며 새로운 치료 방법을 고심했다.
“이토록 참혹한 상황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다. 고민 끝에 용인정신병원으로 옮겨서 용인시 정신보건센터장으로 일했다. 거기서 10년 넘게 일하며 병원 진료와 지역사회 일을 병행했다. 환자 집에서 밥도 같이 해 먹고, 정신장애 당사자들과 해남까지 국토 종주 자전거 여행도 하고, 이마트에 장애인 고용도 알선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환자들 상태가 호전되고 삶이 나아지는 것을 목격하며 내 방식의 치료에 확신이 생겼다.
미술에 재능 있는 환자들의 창작 공간을 만들었고, 조현병 당사자 세 명과 함께 8일간 스위스를 여행하며 작품을 전시하고, 알프스 전망대에도 같이 올랐다. 음악을 즐기는 환자들과는 밴드를 조직해 콘서트를 열어 함께 연주도 했다. 환자들이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도하다 보니까 오픈 다이얼로그까지 온 거다.”
힘든 삶을 견디게 해주는 조력자
이 대목에서 그가 잠시 하던 말을 멈추더니 이렇게 물었다.
“정신증 치료는 외과랑 비슷할까, 산부인과랑 비슷할까?”
그가 자문자답하듯 말을 이었다.
“사실 외과 치료는 환자가 할 일이 별로 없다. 병원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취과 의사가 재우고 그동안 수술이 진행된다. 모든 과정에서 환자는 수동적이다. 하지만 산부인과는 다르다. 의사와 간호사는 조력자일 뿐 아이를 낳는 사람은 산모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신과는 외과보다는 산부인과 의사와 비슷하다고 본다. 회복을 해내고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환자 당사자이고, 우리 같은 전문가들은 거드는 사람들이다. 정신과 의사라고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 대답할 수 없는 게 훨씬 많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듣고 조력하는 거다.”
그는 오픈 다이얼로그 경험을 통해 의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이 정리할 수 있다고 했다.
“‘불확실성에 대한 인내’라는 개념이 오픈 다이얼로그 핵심 개념 중에 하나인데, 예를 들어 상담을 하다 보면 환자들이 뾰족한 수가 없는 난국에 갇혀 있는 경우가 있다.”
무슨 말인가?
“당사자가 처한 상황의 원인이 남편의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빈곤 같은 상황이라면 이는 쉽게 바꿀 수 없지 않은가. 정신과 의사는 이런 답답하고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는 환자 옆에서 한 달이고 1년이고 꾸준히 함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자체가 굉장히 치료적일 수 있다고 본다. 어찌 보면 우리 같은 의사들이 하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런 앞뒤가 막힌 상황을 당사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때까지 인내하면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의사가 해 준다면 최고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일본 정신과 의사가 쓴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힘’이 바로 그런 이야기다. 영국 정신분석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므로 의사라 하더라도 타인이 가지고 있는 필터로 분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정신 치료, 정신분석이라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고정관념을 겸허히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경청하며 환자의 마음에 함께 공명한다는 거다. 이것이 또한 오픈 다이얼로그의 핵심 정신이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힘. [끌레마]
정신적 위기 상황에 놓인 당사자는 마음속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에 직면한다. 그 순간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 그 기회의 순간에 당사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오픈 다이얼로그가 제공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오픈 다이얼로그 운동을 하면서 의사로서 갖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환자들에게 선택지를 더 많이 제공하게 된 것 같다. 인간은 각자 삶에서 겪는 난관들을 헤쳐갈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경제적 타격, 건강 문제 등 다양한 위기나 상실을 겪게 될 때 원래 지닌 마음의 힘을 가동하지 못하는 이른바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다. 못 자고 못 먹고 에너지가 확 떨어지는 등의 생리적 변화까지 겹치면서 역량 발휘가 더 안 된다. 불안은 기본적으로 화재경보기처럼 인간에게 꼭 있어야 되는 생존 기능이다. 이 경보가 아무 때나 막 울리는 게 공황발작이다. 지나치게 각성돼 있는 불안 시스템을 안정화하고 생리적으로 우울한 상태를 보정해 주는 데에 약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약물 외에도 도움 될 수 있는 다른 옵션들 역시 존재한다.”
정신적 위기 상황에 놓인 당사자는 마음속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에 직면한다. 그 순간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 [Gettyimage]
운동도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우울증이 심할 때는 운동을 시도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운동은 항우울제 버금가는 효과가 있다는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운동 외에도 이걸 강화하는 여러 다양한 치료가 있는데 명상, 마음 챙김, 다양한 형태의 심리치료가 효과가 있다. 약물이 부담스러우면 이런 거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약도 선택지가 다양하다. 항우울제는 효과가 좀 늦지만 금단이나 내성 같은 의존성이 없다는 장점이 있고 항불안제는 의존성은 있지만 효과가 빠르다. 기본적으로 정신과 치료는 외과처럼 뭔가를 도려내는 게 아니라 환자 내면에 본래 존재하는 힘이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거다. 오픈 다이얼로그를 하면서 나의 이런 조력자 역할을 좀 더 자신감 있게 해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오픈 다이얼로그 출발은 외국 경험에서 온 것이라고 들었다.
“1980년대 북유럽 핀란드 라플란드 지역에서 처음 시도됐다. 19년 동안 오픈 다이얼로그의 적용과 정신장애인 치유 과정을 추적 조사한 결과, 초기 정신증 환자의 85%가 회복됐고 사회에 복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오픈 다이알로그는 현재 약 44개 국가에 도입돼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정신건강 서비스 모범 사례로 등재해 적극 권장하고 있다.
1970~80년대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른바 ‘당사자 운동’이라는 게 생긴다. 정신질환 증상을 낮추는 것만이 회복이 아니라 증상이 남아 있더라도, 즉 환청을 듣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정신적 증상이 남아 있더라도 직업과 집이 있고 친구가 있으면 생활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증상을 없애는 것만 회복이라고 정의했는데 ‘남아 있더라도 얼마나 사회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할 것인가’ 이런 시각으로 당사자를 보자는 거다. 이런 패러다임이 서구에서 시작돼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됐고, WHO의 글로벌 정신건강 정책의 핵심이 됐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인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오픈 다이얼로그 서비스를 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를 포함한 우리 팀이 하는 일은 현재 수원시에만 국한돼 시험적으로 진행하는 국내 최초의 연구개발 사업이다. 현재로서는 수원시민에 한해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의뢰를 통해서만 입원할 수 있다. 병동의 경우는 연구가 진행되는 아주대병원, 이음병원, 천주의성요한 병원(전남 광주)에서만 시도되고 있다. 우리 팀원들은 현재 10명 정도로 조를 짜서 주 2회 정도 가정이나 병원에서 진행하고 있으며 진행팀 인원을 차츰 늘려나가고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은 향후 전국의 병원과 지역정신건강서비스에서 오픈 다이얼로그를 실천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개발하는 것이다. 빠른 시일 안에 전국 단위로 지속적 훈련과 보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중앙정부의 정책이 추진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오픈 다이얼로그의 성공적 도입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치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양질의 훈련 및 실행 과정에 대한 지속적 자문이 필수적이다. 최근 여러 지역에서 관심과 열정을 공유하는 분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각자의 현장에서 이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한국 오픈 다이얼로그 학회’도 만들게 됐다.”
신동아 2023년 8월호
출처: 신동아: https://shindonga.donga.com/List/3/all/13/3840547/1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하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성공한 사람이 갖는 삶의 태도는 '변화 믿는 마음'" (희망연구소 나진경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 인터뷰
필자_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허문명이 만난 사람'이란 인터뷰 시리즈로 사회문화 각계의 다양한 생각을 조명한다. 저서로 <김지하와 그의 시대>, <여성이여 세상의 멘토가 되라>, <삶의 나침반 1,2>,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