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세상에 오직 단 하나뿐인 나, 그래서 삶은 소중하다” (세계적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이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

2024-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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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는 그 자체로 이기적, 이타적일 수 없어
● ‘무아’ ‘연기’ 불교 개념은 시스템생물학적 상상력
● 유전자 3만 개, 상호작용은 2×10의 72403 제곱
● “삶은 계속되는 과정, 그러니 삶을 즐기길”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시리즈를 새로 진행한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새로 선보이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는 지역사회나 공간을 기반으로 인문가치를 고민하고 이를 새로운 시대의 언어와 메시지로 알리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로 진행한다. 네 번째 주인공은 한국의 사찰을 돌며 불교 철학과 생명과학 연구를 접목하는 데니스 노블 옥스퍼드대 종신 교수다. <편집자 주>



‘신동아’와 인터뷰하기 위해 마주한 영국의 저명한 생명과학자 데니스 노블 옥스퍼드대 종신 교수. [이상윤 기자]


데니스 노블 교수는 생명과학자다.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났으니 88세다. 23세 때 심장 근육과 박동에 관한 연구 논문이 세계적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실리면서 일약 ‘천재’로 주목받았다. ‘컴퓨터’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1960년대에 컴퓨터로 ‘가상 심장(virtual heart)’을 구현해 심장 작동 원리를 수학적으로 규명한 연구로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인공 장기(臟器) 개발 등 AI를 접목한 생명공학과 의학 분야에서 이룬 성과로 노벨생리학상 후보로도 이름을 올린 그는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 지휘관 훈장(CBE)을 받았으며 현재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그를 만난 건 지난 연말 서울에서였다. 학술대회 참석차 들른 길이었다.

노블 교수는 자신의 과학적 연구(시스템생물학)가 동양사상인 불교철학과 맞닿아 있다고 말해왔다. 한국과도 인연이 많은데 2022년 서울 봉은사, 통도사, 실상사, 백양사 천진암, 미황사 등에서 한 달 반 동안 머물며 큰스님들과 대담을 한 다큐멘터리 ‘노블이 묻다(Noble Asks)’를 찍었고 당시 대화는 책 ‘오래된 질문’으로 묶여 나왔다.



모든 생명 활동은 상호작용


흐트러진 백발에 구부정한 어깨, 천천히 걷는 걸음은 육체의 쇠잔함을 느끼게 했지만 눈빛은 젊은이처럼 형형했다. 하루 종일 행사와 강연에 시달렸는데도 귀찮거나 피곤한 기색 없이 질문 하나하나에 성실하게 답하는 모습에서 삶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가 느껴졌다.

전공인 ‘시스템 생물학’이란 게 뭔지 궁금합니다.

“제 전공은 원래 심장생리학인데 생리학과 진화생물학 교수로 일하면서 생명에 대한 본질적 연구로 확장됐습니다. 시스템생물학이란 한마디로 생명체를 하나의 시스템, 즉 여러 요소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구조로 이해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 같기도 한데,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 한계가 있으니 좀 단순화해 볼까요. 생명체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요즘 사람들 중에는 ‘내가 이러는 게 다 유전자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를 유전자로 보고 몸이라는 것은 결국 유전자의 전달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입니다.

하지만 제가 평생 연구해 온 과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실이 아닙니다. 유전자 정보를 담고 있는 DNA 자체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뇌에 종속되는 것도 아니고요. 생명은 단백질, 세포, 장기(臟器) 등으로 구성된 여러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입니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교류하는 하나의 시스템인 거죠.”

책 ‘오래된 질문’을 보면 그걸 책이나 파이프오르간에 비교했는데요.

“네. DNA를 알파벳 글자라고 하면 생명은 책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란 것은 DNA라는 글자로 만들어진 아주 두껍고 커다란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책 안에 써 있는 글자 한 개 한 개가 책이 아닌 것처럼 유전자가 곧 ‘우리’는 아닌 거죠. 예를 들어 DNA만 끄집어내 배양액에 넣고 영양분을 준다고 생명이 탄생합니까. 절대 아니죠. DNA는 어떤 형태의 성질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 몸이라는 시스템 안에서만 살아 있는 거죠.

또 파이프오르간을 예로 들어볼까요. 인간의 유전자 숫자가 대략 3만 개인데 미국 애틀랜틱시 컨벤션홀에 3만3144개 파이프가 있는 오르간이 있어요. 세계에서 가장 크죠. 여기서 연주되는 음악은 튜브나 파이프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연주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파이프들 간의 상호작용 아니겠어요. 유전자나 DNA는 그 자체로는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해요.”

유전자 하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떠올라요.

“그동안 인류는 눈부신 과학 발전을 이루면서 생명 원리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걸 표현하는 데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적 유전자’가 바로 그렇다고 생각해요.

유전자는 그 자체로 이기적일 수도, 이타적일 수도 없습니다. DNA는 우리를 이기적이게 만들지 않아요. 인간이 그렇게 만드는 거죠.

이 문제는 단순히 과학계 내부 논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유전자는 좋고 어떤 유전자는 나쁘다는 기본 전제에서 생겨난 우생학은 제2차 세계대전 만행이 저질러진 기반이 됐고, 한국도 일본인에게 하류 인종으로 취급받고 박해받았던 아픈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도킨스뿐 아니라 많은 생물학자가 그동안 해온 방식대로, 잘못된 주장을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걸 그만둬야 합니다. 생의 본질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깊어지면서 이기주의적 사회경제 구조들이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거듭 말하지만, 유전자라는 건 좋다 나쁘다 하는 이분법적 존재가 아니고 이기적 존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그렇습니다. 시스템생물학 관점으로 접근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5년 투병 끝에 저세상으로 간 아내


한국 사찰들도 돌아보고 큰 스님들과도 대화를 나눠 다큐멘터리도 찍고 책도 펴냈는데 어떻게 한국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나서 가족처럼 지내는 서울대 의대 엄융의 교수로부터 10여 년 전에 원효스님 책을 소개받고 완전히 빠져들었어요. 한자까지 독학하면서 영어 번역과 대조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원효스님 사상을 접하고 제가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통적인 동양 사상, 불교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과 동물, 식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불교의 중요한 개념인 ‘무아(無我)’나 ‘연기(緣起)’가 바로 시스템생물학적 상상력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본격적으로 한국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 사연이 있었다고 했다.

“긴 투병을 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명석하고 촉망받는 과학자였고 성격도 무척 밝고 외향적이었죠. 하지만 노년 우울증에 빠져 말년에는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던, 그렇게 열정적이던 사람이 깊은 슬픔에 잠겨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니 제 삶 전체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24시간 보살핌이 필요했고 낮에는 학교에서, 저녁에는 가사 일과 아내 간병으로 쉴 틈이 없었습니다. 간호사가 오긴 했지만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온전히 제가 보살펴야 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완전히 번아웃이 왔습니다. 쏜살같이 집으로 와서 아내를 보살피고 아내가 잠든 모습을 지켜본 후 어질러진 집 안을 대충 정리한 어느 날,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어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어요. 허공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일들을 겪게 되지요. 개인적 의지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커다란 문제가 불시에 닥치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고통과 마주하게 되는 일들 말이에요. 아내는 15년간 투병하고 2015년 10월에 세상을 떠났어요. 몹시 슬펐지만 아내가 힘든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오랜 기간 생물학을 연구했지만 개인적으로 아내의 투병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평생 제가 간직했던 질문들에 답을 찾아보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국의 유서 깊은 사찰로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방을 쌌죠.”

노블 교수는 한국 사찰에 체류하던 한 달 반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에 참석하고,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청소했다.

한국 사찰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느꼈나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해 온 저의 생각들이 불교와 굉장히 가깝다는 걸 다시 깨달았지요. 그리고 정말 열심히 사는 능력 있는 수행자가 많았어요. 삶의 어려움에 놓인 사람들에게 참선과 명상을 가르쳐주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평소에도 전쟁 후 폐허에서 선진국을 만든 한국인들을 존경해 왔는데 한달 반 동안 체류하면서 사찰 같은 전통 문화유산과 최첨단 과학기술이 공존하는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원 실상사에 갔을 때 절 안에 공동체가 있고 많은 사람이 연결돼 소통하면서 절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 굉장히 좋아 보였습니다.”



명상적 상상력이 준 치유력


그는 몸을 시스템으로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게 된다고 했다.

“우리 유전자 숫자는 대략 3만 개로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면 그 유전자 사이에서는 얼마나 많은 상호작용과 교류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몇 년 전에 제가 직접 계산해 보았는데 무려 2 곱하기 10의 72403 제곱이에요. 이 숫자만 다 나열해 적는 데만도 A4용지로 30페이지가량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또 다른 나’라는 건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특별하고 하나하나 삶이 귀중한 겁니다. 모든 건 그 자체로 공허합니다. 다른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이 무언가 유의미한 것으로 태어나지요.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까지 가는 걸 길이로 말하면 대략 30cm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이걸 한 번의 행동으로 느끼지만 사실 순간순간의 과정이죠. 하지만 대부분 이 ‘찰나’를 놓치고 살아갑니다. 이 찰나의 연속을 명료하게 보게 되면, 이 세상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죠. 그러니 삶은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을 수만 있다면, 이러한 이치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삶을 즐기세요. 삶에서 재미를 만들어야 해요.”

노블 교수는 단지 책으로만 불교를 접한 게 아니라 실천적 방법으로 오랜 기간 명상을 해왔다고 한다. 그는 “명상이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제가 2006년에 처음으로 시스템 생물학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 때 동료 과학자들의 분노와 비난이 거의 10년 동안 이어졌어요. 어리석다, 멍청하다, 바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젊을 때여서 동료들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과격하게 말싸움을 했어요. 제 논문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똑같이 공격적 방식으로 받아치곤 했었죠. 하지만 불교철학과 만나고 명상을 하면서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왜 저런 말을 하지?’ ‘왜 저렇게 행동하지?’ 하는 명상적 질문을 통해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니 점점 상대의 거친 공격에도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의식하기보다 연구를 더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제 이론을 뒷받침하는 책들을 열심히 쓰고 부지런히 강단에도 서고 학술회의도 열었지요. 이렇게 태도가 바뀌니까 저를 비판하던 사람들도 멈칫하는 것 같았어요. 분노도 잦아들고요. 명상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충분히 증명되고 있습니다.”


 

신동아 2024년 2월호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출처: 신동아:https://shindonga.donga.com/society/article/all/13/4719076/1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하는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세계적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이 말하는 호모 사피엔스

필자_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허문명이 만난 사람'이란 인터뷰 시리즈로 사회문화 각계의 다양한 생각을 조명한다. 저서로 <김지하와 그의 시대>, <여성이여 세상의 멘토가 되라>, <삶의 나침반 1,2>,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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