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의 함정
30년 넘게 하루에 두세 잔씩 커피를 꼬박꼬박 마셔왔지만, 스스로를 커피 애호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커피란 그저졸린 눈을 깨워줄 수 있는 카페인이 잔뜩 든 음료에 불과했다. 그런데, 가을 어느 날 옆방 교수님이 손수 내려 주신 커피 한잔이 커피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 버렸다. 커피 원두를 직접 갈고, 물을 끓여 조금씩 부어내린 커피는 그 맛도 맛이었지만, 원두를 뜸 들일 때 나는 향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피곤함을 달래주는 카페인이 아닌, 커피가 지닌 풍미를 처음으로 즐기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핸드 드립을 취미로 삼게 되었다.
사람들은 핸드 드립이 커피 원두 이외에는 따로 돈이 들어갈 일 없는 취미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커피 핸드 드립 장비에도 고가의 럭셔리 브랜드들이 존재하고, 보통의 취미들과 마찬가지로 핸드 드립 동호인들도 한 번쯤은 장비병을 앓게 된다. 핸드 드립을 시작한지 한 일 년이 지나고 나니, 나에게도 어김없이 경증 장비병이 찾아왔다. 멀쩡한 그라인더를 두고 더 좋은, 아니 그냥 새 그라인더를 갖고 싶은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것이다. 마음에 드는 그라인더를 찾기 위해 며칠이고 온라인 커피 동호회를 들락거리다 보니, 자연스레 한 고가의 그라인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할 만큼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호인이 추천하는 그라인더였다. 그런데, 내가 해당 그라인더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단순히 추천이 많아서가 아니라, 한 추천 글에 달린 댓글 때문이었다. 댓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커피 애호가라면 어차피 사게 되어 있어요. 괜히 다른 그라인더 사서 시간과 돈 낭비하지 말고 처음부터 이거 사세요. 그게 절약하는 거에요” 댓글 속 ‘어차피’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어차피 사게 될 거라면 그냥 빨리 사는 게 현명한 소비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미 마음은 넘어간 상태였지만, 비싼 가격에 바로 결제는 못 하고 그라인더를 일단 장바구니에만 담아 놓았다.
다음 날, 결제에 앞서 커피에 조예가 깊은 옆방 교수님을 찾아가 사용하시는 그라인더가 어떤 것인지 물어보았다. 역시나 내가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그 비싼 그라인더를 쓰고 계셨다. 다시 한번 ‘어차피’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면서 망설임은 배송만 늦추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데, 교수님 본인은 해당 그라인더를 사놓은 지는 꽤 되었지만 실제 사용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러셨는지 물으니, 분쇄도 조정을 예민하게 해야 해서 조작이 어려웠고 또 본인이 예전에 주로 드셨던 중저가 원두를 갈 때는 굳이 쓸 필요가 없어서 그동안은 모셔만 두었다고 하셨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그동안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애호가들이 ‘어차피’ 쓰게 된다고 해서, 그걸 일찍부터 쓸 필요가 있는 것도, 그리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가의 그라인더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미세한 원두 분쇄도의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하고, 고가의 커피 원두의 풍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관록과 경험이 필요하다. 커피에 대한 기술, 지식, 그리고 경험이 갖춰진 사람들은 어차피 그 비싼 그라인더를 찾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그라인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초보들에게 고급의 그라인더는 비싼 사치품에 불과하다. 아니, 오히려 어려운 조작법 때문에, 커피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드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어차피’의 의미는 ‘누구나’가 아니라 ‘때가 되면’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삶의 중요한 목표를 세울 때도 ‘어차피’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어차피 앞으로 해야 할 공부니까’. ‘나이 들면 어차피 하게 될 일이니까’, ‘나중에 어차피 필요한 거니까’라는 말에 현혹되어, 현재 본인의 상태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어차피’ 하게 될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일찍부터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선행 학생을 위해 새벽까지 학원 뺑뺑이를 도는 초등학생,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고 취업에만 매달리는 대학생, 회사에서의 성공을 가정도 포기하고 일에 파묻혀 사는 직장인 모두가 ‘어차피’ 해야 할 목표에 목을 매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 ‘어차피’ 추구해야 할 목표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할 필요도 없다. 보통의 경우, ‘어차피’ 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경험이 요구된다.
단순히 열심히 한다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 목표를 추구하기에 필요한 연륜과 지혜가 쌓였을 때 비로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엄청난 노력을 통해 ‘어차피’ 해야 할 목표를 일찍 달성했다고 하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보다 빨리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잠깐의 우월감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우월감의 감정이 행복이나 삶의 의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하고 싶은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내가 원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 행복과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고급 그라인더는 장바구니에 며칠을 더 두고 고민한 끝에, 결국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그라인더를 잘 써먹고,
그 그라인더는 지금이 아니라 ‘어차피’ 사게 될 그때, 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필자_최종안
강원대학교 행정심리학부 조교수 및 희망연구소 소속연구자
‘어차피’의 함정
30년 넘게 하루에 두세 잔씩 커피를 꼬박꼬박 마셔왔지만, 스스로를 커피 애호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커피란 그저졸린 눈을 깨워줄 수 있는 카페인이 잔뜩 든 음료에 불과했다. 그런데, 가을 어느 날 옆방 교수님이 손수 내려 주신 커피 한잔이 커피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 버렸다. 커피 원두를 직접 갈고, 물을 끓여 조금씩 부어내린 커피는 그 맛도 맛이었지만, 원두를 뜸 들일 때 나는 향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피곤함을 달래주는 카페인이 아닌, 커피가 지닌 풍미를 처음으로 즐기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핸드 드립을 취미로 삼게 되었다.
사람들은 핸드 드립이 커피 원두 이외에는 따로 돈이 들어갈 일 없는 취미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커피 핸드 드립 장비에도 고가의 럭셔리 브랜드들이 존재하고, 보통의 취미들과 마찬가지로 핸드 드립 동호인들도 한 번쯤은 장비병을 앓게 된다. 핸드 드립을 시작한지 한 일 년이 지나고 나니, 나에게도 어김없이 경증 장비병이 찾아왔다. 멀쩡한 그라인더를 두고 더 좋은, 아니 그냥 새 그라인더를 갖고 싶은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것이다. 마음에 드는 그라인더를 찾기 위해 며칠이고 온라인 커피 동호회를 들락거리다 보니, 자연스레 한 고가의 그라인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할 만큼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호인이 추천하는 그라인더였다. 그런데, 내가 해당 그라인더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단순히 추천이 많아서가 아니라, 한 추천 글에 달린 댓글 때문이었다. 댓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커피 애호가라면 어차피 사게 되어 있어요. 괜히 다른 그라인더 사서 시간과 돈 낭비하지 말고 처음부터 이거 사세요. 그게 절약하는 거에요” 댓글 속 ‘어차피’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어차피 사게 될 거라면 그냥 빨리 사는 게 현명한 소비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미 마음은 넘어간 상태였지만, 비싼 가격에 바로 결제는 못 하고 그라인더를 일단 장바구니에만 담아 놓았다.
다음 날, 결제에 앞서 커피에 조예가 깊은 옆방 교수님을 찾아가 사용하시는 그라인더가 어떤 것인지 물어보았다. 역시나 내가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그 비싼 그라인더를 쓰고 계셨다. 다시 한번 ‘어차피’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면서 망설임은 배송만 늦추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겼다. 한데, 교수님 본인은 해당 그라인더를 사놓은 지는 꽤 되었지만 실제 사용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러셨는지 물으니, 분쇄도 조정을 예민하게 해야 해서 조작이 어려웠고 또 본인이 예전에 주로 드셨던 중저가 원두를 갈 때는 굳이 쓸 필요가 없어서 그동안은 모셔만 두었다고 하셨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그동안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애호가들이 ‘어차피’ 쓰게 된다고 해서, 그걸 일찍부터 쓸 필요가 있는 것도, 그리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가의 그라인더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미세한 원두 분쇄도의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이 있어야 하고, 고가의 커피 원두의 풍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관록과 경험이 필요하다. 커피에 대한 기술, 지식, 그리고 경험이 갖춰진 사람들은 어차피 그 비싼 그라인더를 찾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그라인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초보들에게 고급의 그라인더는 비싼 사치품에 불과하다. 아니, 오히려 어려운 조작법 때문에, 커피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드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어차피’의 의미는 ‘누구나’가 아니라 ‘때가 되면’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삶의 중요한 목표를 세울 때도 ‘어차피’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어차피 앞으로 해야 할 공부니까’. ‘나이 들면 어차피 하게 될 일이니까’, ‘나중에 어차피 필요한 거니까’라는 말에 현혹되어, 현재 본인의 상태나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어차피’ 하게 될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일찍부터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선행 학생을 위해 새벽까지 학원 뺑뺑이를 도는 초등학생,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고 취업에만 매달리는 대학생, 회사에서의 성공을 가정도 포기하고 일에 파묻혀 사는 직장인 모두가 ‘어차피’ 해야 할 목표에 목을 매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 ‘어차피’ 추구해야 할 목표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할 필요도 없다. 보통의 경우, ‘어차피’ 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경험이 요구된다.
단순히 열심히 한다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그 목표를 추구하기에 필요한 연륜과 지혜가 쌓였을 때 비로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엄청난 노력을 통해 ‘어차피’ 해야 할 목표를 일찍 달성했다고 하여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보다 빨리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잠깐의 우월감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우월감의 감정이 행복이나 삶의 의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하고 싶은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내가 원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 행복과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고급 그라인더는 장바구니에 며칠을 더 두고 고민한 끝에, 결국 사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그라인더를 잘 써먹고,
그 그라인더는 지금이 아니라 ‘어차피’ 사게 될 그때, 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필자_최종안
강원대학교 행정심리학부 조교수 및 희망연구소 소속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