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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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M.LAB] 저 거대한 무덤은 무엇이란 말인가? ; 죽음의 서사에 관하여 (편상범 교수)

2024-09-25

저 거대한 무덤은 무엇이란 말인가? ; 죽음의 서사에 관하여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기일에는 각자의 종교에 따라 추모하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이 있을까요? 그런 일들이 고인에게 정말로 도움이 될까요? 아마 산 자들의 자기 위안인지도 모릅니다. 성대한 장례식이나 큰 무덤은 그 후손들의 힘을 과시하는 수단일 수도 있고, 추모 행렬은 고인의 업적이나 정신을 기리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드러내지요. 그러나 죽음과 관련한 이런 모든 의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 의미가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죽은 자는 이미 죽었으니 말입니다.

 

죽음을 위한 죽음의 문화

세계 곳곳에는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고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는 문화도 있지요. 죽음과 관련된 문화유산 중 규모의 면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아마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일 것 같습니다. 파라오의 저 거대한 무덤을 생각하면, 죽은 왕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생했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가장 먼저 듭니다. 그런 막대한 노동으로 산 자들의 집을 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러나 피라미드를 왕의 권력을 드러내는 상징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피라미드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대한 죽음의 성전을 세웠을까요? 오늘 제가 여러분과 검토해 보고 싶은 것은, 저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저들의 세계관입니다. 특히 죽음에 관한 저들의 생각입니다.

죽음에 관한 전통적인 문화는(간단히 죽음의 문화라고 합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죽은 자를 보내고 추모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문화는 별로 없습니다. 모두 나름의 정성으로 장례를 치르지요. 그러나 내세를 확신하는 종교인이 아니라면 죽음의 문화를 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는 대부분 형식만 남아 있는 듯합니다. 장례 절차가 죽은 이의 사후세계에 정말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보다는 죽은 자에 대한 전통적 예의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이겠지요. 그러나 과거의 인류에게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문화가 단지 전통에 따른 문화적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죽음과 오늘날 우리들의 죽음은 같지 않습니다.

 

철학의 탄생: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죽음에 관한 저들의 관점을 - 더 넓게는 저들의 세계관을 - 이해하기 위해 저는 서양철학의 탄생에 관해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서양철학의 탄생은 대체로 신화적 세계관에서 합리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이라고 봅니다. 간단히 뮈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의 이행입니다. 로고스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의 ‘말’입니다. 그 동사형 레게인(legein)은 말한다(to speak)는 뜻이지요. 로고스가 반드시 합리적(이성적)인 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서양의 지성사에서 로고스는 합리성을 함축하는 의미로 좁혀집니다. 논리적 근거나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이야기(신화)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신화적 관점에서 벗어나, 근거를 묻고 따질 수 있는 합리적 관점을 수용하면서 철학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은 그 합리적 사유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과학으로까지 발달하게 됩니다. 물론 철학의 탄생과 전개가, 그리고 인류 문명의 발달이 꼭 그렇게 진행되어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당연히 없겠지만,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화적 세계관

이미 사라진 신화적 세계관의 특징 중 하나는 물질의 세계와 정신(또는 정신의 산물인 관념)의 세계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이 살아있다는 물활론(物活論)이나 물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을 믿습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나무도 산도 강도 바다도 모두 살아있고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남아있지요. 제주도에 가면 남근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반세기 전만 해도 신혼부부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신부가 그것을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알려진 바위랍니다. 그 바위는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을을 지켜준다는 큰 나무나 바위 역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영물입니다.


미신과 과학

그러나 그런 믿음을 우리는 미신으로 여깁니다. 잘못된 또는 근거 없는 믿음이지요. 그러면 무엇이 합리적 근거를 지닌 참된 믿음입니까? 그것은 과학적 근거를 지닌 믿음입니다. 오늘날 합리성의 대표는 바로 과학, 특히 자연과학입니다. 그래서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비합리적’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오늘날의 신뢰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독단적입니다. 첫째로,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해서 모두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과학성’보다 더 넓은 개념입니다. 합리적이지 못하면 과학적일 수 없지만,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서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이 합리성을 독점할 수는 없지요.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특수한 한 가지 방법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서양의 근대과학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에도 과학은 있었고, 서양에만 과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과학 시간에 근대 이전의 과학을 배운 적이 있나요? 근대 이전의 과학은 모두 근대 과학을 준비하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근대의 과학만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는 제대로 된 과학입니다. 수학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정확히 예측하고 검증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갖춘 근대과학은 기술과 자본을 결합하여 엄청난 힘으로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지금도 그 과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지요. 그러나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볼 때 이 과학은 불과 몇백 년의 역사를 지닌 매우 특수한 시기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학에 최고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과학의 합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과학은 근대의 매우 특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성립된 학문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의 세계를 수량화합니다. 그러기 위해 과학은 수량화될 수 없는 측면을 자연에서 배제합니다. 이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 철학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입니다. 조금 과감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정신은 오직 신과 인간의 사유 세계에만 속하고, 자연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일 뿐입니다. 자연에서 정신을 제거한 세계관은 근대과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에는 아무런 정신도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자연은 기계적 법칙에 의해 작동될 뿐이고 과학은 그 프로그램을, 기계적 원리를 발견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정신과 사유는 오직 인간의 것이기에 그 주체도 인간이지요. 하지만 물질로 구성된 자연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뉴턴의 역학을 필두로 자연과학은 그런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하나하나 발견합니다. 너무 거친 묘사이지만 이것이 자연에 대한 근대 과학의 관점, 기계론적인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서사

산도 바위도 강도 정신을 지닌 주체라고 보는 신화적 세계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의 문화가 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저 거대한 피라미드나 죽음에 관련된 의례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죽음에 왜 그렇게 정성을 쏟았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죽음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서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그들이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신화적 세계관을 지닌 옛 문화에는 다양한 죽음의 서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서사들의 공통점은 죽은 자의 삶이 사후에도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또 다른 삶이 전개됩니다.

이제 이 서사의 밑바닥에 놓인 그들의 생각을 살펴봅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생각은 그들이 죽음을 당혹스러운 사태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합니다. 이 당혹스러운 문제에 설명이 필요했죠. 그렇기에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의 서사는 그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설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 ‘설명’을 필요로 할까요?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때, 당혹스러울 때 우리는 설명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우마제인(thaumazein, 경이, 당혹, 놀라움)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신화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태입니다. 바위도 물도 만물이 살아있다는 신화적 세계관에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죽은 자가 아무런 동작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생명의 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돌도 살아있는데 숨 쉬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사람의 삶이 끝나겠습니까. 생명이 사라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설명한다는 것은 낯선 것을 친숙한 것으로 바꿔놓는 일입니다. 우리가 글을 읽다가 낯선 낱말을 보면 사전을 찾습니다. 사전에는 그 낯선 낱말이 친숙한 말로 풀어져 있습니다. 만일 낯선 낱말을 또 다른 낯선 낱말로 설명하면 그것은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의 서사는 죽음이라고 말하는 낯선 현상을 친숙한 것으로 바꾸어 놓는 하나의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생명입니다. 만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있으니까요. 그래서 죽음의 서사는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하데스의 세계가, 천국과 지옥이, 저승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인간의 삶은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생명의 서사

세계를 이해하는 참된 관점은 과학적 관점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죽음의 서사는 설명력이 없습니다. 죽음은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 아닙니다. 자연 세계는 본래 죽어있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원자나 소립자를 살아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죽어있는 무기물의 세계가 자연의 본래 모습이고, 그 속에서 유기체가, 생명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한 현상입니다. 우리에게 설명이 필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는 생명 과학이 있습니다. 도대체 저 죽어있는 무기물로부터 어떻게 생명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이것이 우리의 물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서사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세계관, 죽음의 세계관

정리해 봅시다. 신화를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 문명 이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설명되어야 하는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죽음의 서사와 함께 죽음의 문화가 생겨납니다. 죽음을 그들에게 친숙한 무엇, 즉 생명으로 설명하는 것이 죽음의 서사입니다. 죽음의 서사는 신화적 세계관이 생명의 세계관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만물을 생명의 관점에서 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사물을 구성하는 원소들을 알려준다면, 생명의 낮은 단계, 또는 생명을 구성하는 생명의 소중한 일부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죽음은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설명해야 할 것은 죽어있는 물질들에서 어떻게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은 물질세계의 법칙을, 엔트로피의 법칙을 이겨내야 하는 힘겨운 과정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우주에 널려있는 무기물의 세계,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근대과학적 세계관의 바탕은 죽음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생명 과학은 죽어있는 물질들로 생명을 설명하려는 노력입니다.

철학의 탄생을 뮈토스(신화)에서 로고스(합리성)로의 전환이라고 본다면, 그리고 그 연장선에 과학이 있다면, 철학의 탄생은 인류가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 합리성을 성취한 위대한 발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죽음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 발전은 생명의 세계관에서 죽음의 세계관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런 관점의 전환을 꼭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죽음의 서사는 생명의 세계관에서 탄생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적인 세계관에서는 죽음의 서사가 없습니다. 과학은 생명의 관점을 버리고 죽음의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라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야?’라고 묻는 여러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 신화적 세계관을 되살려 생명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자고요?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 죽음의 서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제 그 의미를 생각해 볼 차례인데, 이어가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져 다음 글로 미루겠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인류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통념이나 상식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며 삽니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하는 과학이 인류 역사의 매우 특수한 시기에 형성된 관점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임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것을 신화와 과학이 갖는 관점의 차이를, 생명의 세계관과 죽음의 세계관의 차이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차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필자_편상범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관련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된 철학적 관심은 근대 이후의 세계와 그 시대의 산물인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주전공인 서양고대철학에 대한 연구도 그 작업의 일부다. 고려대학교와 강원대학교 철학과, 성신여대 윤리교육과에서 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