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학 차담 시리즈 1에서 이어짐)
■ '명상과학' 정의하기
(미) 명상과학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다 보니 명상(meditation), 마음챙김(mindfulness), 관상/관조(contemplation) 등 용어들의 혼선이 크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고,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에 있어서 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립이 없으면 혼란스럽습니다. 용어가 불확실하면 연구 결과도 명확히 기술하기 어렵고요.
그래서 지금 몇 주째 고민 중입니다. ‘명상과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리저리 외국 논문들을 읽어봐도 복잡할 뿐이더군요. 존재론적 정의, 인식론적 정의 등... 저는 그 모든 복잡한 말들을 다 내려놓고 단순화하여 생각을 정리해 보았어요. 명상과학의 정의를 표 하나에 담아 보았더니, 스스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너무 간략해서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 표를 하나씩 분리해 보았지요.
명상과학은 인류가 지향하는 가장 보편적 가치입니다. ‘행복’, ‘진리’, ‘사랑’이 있고 그 삼각형 안에 명상이 들어갑니다. 실은 과학 역시 이러한 세 가지를 궁극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행위이기에 삼각형 안에 들어갑니다. 둘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명상과학이라 부르자는 것입니다. 아직 과학이 명상을 완전히 규명하지 못했고, 명상이 과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영역이기에, 서로를 존중해야 하고요. 명상과 과학 모두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목표를 공유하고 만나다 보면 점차 겹치는 부분이 확장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서로 진보하고 성숙된 학문으로 발전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공통부분을 새로운 학문으로 상정하고, 명상과학이라는 이름의 작업가설적 정의를 해 보았습니다.
■ 용어의 문제
(배) 정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소장님 말씀을 들으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종의 ‘명상 개념어 사전’을 만들면 어떨까요? 관조, 관찰, 명상 등 명상에 관한 어휘들을 정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명상과학에 관련된 주요 개념어 100개를 뽑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각 개념어를 한 페이지 정도로 간단히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개념들을 제시하면, 앞으로 연구의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근대화를 시작하며 함께 진행한 것이 사전작업이었고, 막스 뮐러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명상과 과학이라는 이질적인 대상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 개념 정리를 하는 것이 향후 매우 중요한 기반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미) 굉장히 훌륭한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정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군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어서, 거기서 혼선이 발생합니다. 저는 ‘명상’에 대응하는 단어로 contemplati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meditation이라는 단어도 있어요. contemplation은 우리말로 보통 ‘관상·관조’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관상과학’은 한국어 어감이 좋지 못합니다 서양에서는 우리말의 ‘명상과학’에 해당하는 말로, contemplative science라는 조어를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상과학연구소는 그 영어 표현을 채택하되, contemplation의 번역어로 관상 대신 명상을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용어들과 그 특수한 용법에 대한 해설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저는 contemplation과 meditation을 모두 ‘명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 의미 상으로는 contemplation이 meditation을 포함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mindfulness(마음챙김)과 앞의 두 용어는 어떻게 다를까요? contemplation과 meditation 안에 mindfulness가 포함됩니다. 전통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그러하지요.
명상에는 몰입명상이 있고 통찰명상이 있습니다. 몰입명상·통찰명상과 mindfulness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mindfulness가 기반이고 그 위에 몰입명상과 통찰명상이 있습니다. mindfulness 없이 둘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mindfulness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존 카밧진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혼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명상과학 연구소에서 도표로 리포트에 정리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자비명상은 어디에 위치할까요? 전통적으로 자비명상은 몰입명상에 포함됩니다. 자애구26), 따뜻하고 좋은 느낌 등을 끊임없이 집중해서 확대·방사하는 것이기에 방법론적으로 정확하게 몰입 명상입니다. 그러한 기본 분류를 이번 리포트에서 하고 있습니다.
(배) 용어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칼 린네27)가 생물학 분류를 시작했고, 다윈이 그것을 이어받아 종의 기원에서 종·속·과·목을 나누었죠. mindfulness, contemplation, meditation 등의 구분이 이과 비슷한 관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요소의 관계는 수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지요. 의미는 유사하지만 어원이 다르고 사용되어 왔던 방식도 다를 수 있는 것이지요.
contemplation은 그리스 델피28) 전통에서 온 단어로 추정됩니다. 델피 신전에서는 사제가 하늘의 새를 보며 점(augury)을 쳤다고 합니다. 당시에 점을 치던 제단을 템플룸(templum)이라 불렀습니다. 라틴어 contemplatio29)는 제단에서 하늘에 날아가는 새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제단에 있는 내 모습을 하늘 위에서 조망하기는 내가 가야 할 목적지에 가고 있는지를 내 자신이 3인칭이 되어 나를 보는 연습이자, 나를 대상화하는 연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contemplation의 본래 의미입니다.
(미) 동양의 명상전통에서는 바로 그것이 가장 기본이자 매우 중요한 행법이고 개념으로 여겨집니다. 몸과 마음의 현재 상태를 대상화해서 보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위빠사나30)입니다. 위빠사나의 한역어인 볼 관(觀) 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황새가 물여울이 내려가는 것을 보는 모양입니다. 황새가 보는 이유는 고기를 잡기 위함이지요. 그저 물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를 꿰뚫어 보아야만 황새는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깊이 보고, 순간을 포착하는 것, 존재의 본질을 보는 것이 관인 셈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본질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변화입니다. 변화는 존재하는 현상의 본질입니다. 그 무엇도 한순간도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지요. 둘째는 갈등 구조입니다. 현상의 본질인 변화는 갈등 구조로 일어납니다. 이를 불교용어로 두카31)(괴로움)라 부릅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영구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체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며,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순간 또 변해 있기에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관점을 통해 존재를 분석적으로 보는 것이 ‘관’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보고 통찰을 얻을 때 중요한 점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의식이 대상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몰입명상, 의식이 현상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관점을 놓치지 않는 통찰명상(=지혜명상)의 방법이 있습니다. 둘은 다르지요.
(배) 말씀하신 것을 듣고 비슷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과학을 하며 종교적 관상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피타고라스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일종의 종교 교주였지요.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 두 부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듣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계산하는 부류입니다. 피타고라스는 둘 중에서 듣는 부류야말로 진정한 제자라 여겼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근원이 수학이라 말했어요. 그의 저작이나 삶을 보면 피타고라스는 과학과 명상의 조화를 추구한 최초의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과학과 명상(직관)이 합해진 ‘명상과학’이라는 모순어법(oxymoron)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을 때, 피타고라스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수학과 종교를 하나로 보았기 때문에 음악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5음계를 발견하기도 한 피타고라스에게 음악은 우주의 질서가 수학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지요.
말씀하셨던 ‘관’ 이라는 것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서양철학 전통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를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테오리아(θεωρία, theōría)는 ‘관’과 매우 유사한 개념으로, 깊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깊이 봄으로부터 이론(theory)이 나오는 것이지요. 둘째,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 poíēsis)는 깊이 바라봄으로써 나온 이론을 통해 무언가를 만드는 것, 창작을 뜻합니다. 셋째, 프락시스(πρᾶξις, prâxis)는 깊이 바라본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 수련을 의미합니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프락시스 개념을 만들어냈기에 서양사상사에 영원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까지는 테오리아, 본 것만이 진리이고 포이에시스는 그저 본 것의 흉내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은 ‘아름다움’의 이데아만 중요하지, 아름다운 여인은 ‘아름다움 그 자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뒤집습니다. 아름다운 여인가 아름다움 자체를 대체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여인에 의해 구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프락시스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와의 연결점이 등장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과외 선생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사상을 알렉산더에게 알려 줍니다. 알렉산더는 불교와의 접촉이 있었지요. 알렉산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것을 간다라에 가서 실현시킨 것이 간다라 불상입니다. 부처의 모습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아는 불교예술의 뿌리는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일부 빚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신인동형론32)과도 연관됩니다. 알렉산더는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에 전해져 예수가 인간이지만 신이라는 사상에 영향을 주었지요. 말씀(진리)이 곧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incarnation) 사상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를 거쳐 그리스도교까지 이른 것입니다.
(미) 그리스 문명과 불교의 만남으로 유명한 일화가 또 있습니다. 그리스인 밀린다(메난드로스 1세) 왕이 비구(比丘) 나가세나(那先)와 나눈 문답이 바로 《밀린다 팡하》33)입니다. 밀린다 왕이 질문하면 나가세나가 답하는 형식이었는데, 질문이 매우 서양인다운 질문이었습니다. 구체적이고 날카롭고 실제적인 질문들이었지요. ‘무아(無我)’가 어떻게 무아일 수 있는지 묻기도 했고요. 또한 유명한 비유 중 하나인 ‘촛불 비유’도 등장합니다. 밀린다 왕이 하나의 촛불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때, 두 촛불이 같은지 다른지 물었고, 나가세나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연속성이 있다고 말하지요. 무아윤회(無我輪廻)를 그렇게 합리적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배) 이전에 읽으려 시도했다가 지루한 대담집인 것 같아 그냥 넘겼었는데, 다시 읽어보아야겠군요.
(미) 기원전이라 꽤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중요한 문헌이죠.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이라고 한역되기도 했고요.
(배) 영어에도 ‘봄/보다’와 관련된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look은 그저 보는 것으로, 자기중심성이 전제된 봄입니다. look의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외부 대상으로 시점이 전이되기 위해서는 전치사가 필요합니다. “look at(자세히 살피다)”, “look upon(관여하지 않고 지켜보다, 구경하다)” 처럼요. 그러면서 점차 내 시선이 머물 구체적 대상을 고르고 자기중심성에서 대상의 움직임으로 시점이 옮겨갑니다. 그것이 see입니다. see의 어원은 라틴어로 ‘따라간다’는 의미의 sequi입니다. 따라간다는 것은 자기중심성이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완전히 없고 대상만 있는 것을 watch라 합니다. watch의 게르만 어원인 wæccende는 깨어있음(wakefulness)을 뜻합니다. 그래서 중세 수도사들은 밤의 보초를 nightwatch라 불렀지요. watch는 서양 문학과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극장은 watch를 연습하는 장소인데, 그 시초가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이지요. 기원전 472년에 2만 명의 관중이 그리스 비극을 관람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배우를 보며 심지어 원수의 입장에서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게 된 것이 최초의 비극이자, 엔터테인먼트였고 대중교육이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본래 의미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연민과 자아를 확장하는 것이며, 그것은 명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감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는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지요.
(미) 우리가 사용하는 명상 관련 용어들의 어원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어떻게 원래의 의미가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meditaiton, contemplation 등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매우 특수한 의미를 지녔었지만, 이제 두 단어는 이미 기독교 전통의 울타리를 벗어났습니다. 불교적 의미도 섞였으나, 결과적으로 매우 보편적 색채를 띠게 되었지요. mindfulness도 불교의 스므르띠/사띠34)에서 나온 단어였지만 지금은 확대·재생산되고 현대화되면서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불교학자들이 그것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의 혼동을 경험한 일이 최근에 있었습니다. 한 명상 워크숍에 다녀왔는데요, 그 곳의 명상 지도자와도 이러한 용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명상 워크숍을 진행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 스스로도 용어와 개념들이 혼란스럽고 중구난방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고백하셨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학자들조차 이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지요. 그래서 명상과학연구소에서 이러한 개념적 기반작업을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침묵의 소리
(배) 조금 전에 언급했던 피타고라스는 최고의 종교적 경지를 아쿠스티코스35)라고 했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을 통해 최고의 종교적 경지에 들어가고, 우주의 원리를 깨닫는 것을 말했지요. 아쿠스티코스는 화음과 음악을 통해 표현된 우주의 원리를 듣는 명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 흥미롭네요. 비슷한 예로, 불교의 수행법 중 《능엄경》에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이근(耳根, auditory faculty)은 청각기관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이근을 통해 소리를 들을 때는 기본적으로 의식이 대상으로 향합니다. 이근원통은 외부 소리로 향했던 의식을 되돌려, 그 소리를 듣는 자를 바라보는 것, 의식이 밖으로 갔다가 다시 안으로 수렴하며 하나로 소통되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소리를 이용한 매우 구체적인 명상법이지요.
(배) 유대교 전통에서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항상 몸에 지니는 ‘성구함(phylactery)’이 있다. 성구함에는 성경 구절이 들어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구절은 신명기 6장 4-9절36)입니다. 그 첫 구절은 “이스라엘아 들어라(셰마 이스라엘37)”입니다. 셰마, 듣는다는 것이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유대교의 신의 존재는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기에, 듣는 것은 곧 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셰마, 들음은 또한 신에 대한 완전한 승복(surrender)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듣는 전통은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 “sound of silence” 개념으로 표현됩니다.
(미) 놀랍군요. 바로 그것이 이근원통 수행법의 핵심이거든요. 소리가 사라졌을 때, 소리의 사라짐은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그 침묵의 공간을 인지하면 의식이 확장되지요.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두뇌는 공간을 인지하는 19번 영역이 매우 넓습니다. 따라서 공간인지에서 가장 의식이 편안해지고 확장됩니다. 종소리의 여음(잔향; reverberation)을 따라가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특정 소리가 사라지는 침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침묵에 일정 시간동안 몰입하는 것이 수행이지요. 침묵의 공간은 내가 현재 몰입하고 있는 것과 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침묵의 공간으로 준 뒤에, 그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간화선이며, 계속 의식을 비춰주면 묵조선, 바로 깨달으면 조사선의 수행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근원통은 매우 좋은 수행법인데 실천적 전통은 사라져 버리고 텍스트만 남은 상황이지요.
(배) 침묵의 소리가 유대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은 기원전 8세기의 텍스트인 열왕기상 19장38)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신을 따라 다니다가 동굴로 들어가서 신에게 한탄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평생 일했는데 내게 닥친 것은 죽음뿐이라고요. 신은 엘리야에게 모습을 드러낼 테니 동굴 입구에 서서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 명령합니다. 동굴 입구에 서서 신을 기다리던 엘리야에게 찾아온 것은 미세한 침묵의 소리로 나타난 신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sound of silence입니다. ‘침묵의 소리’라는 모순어법, 소리로 드러나고 말하는 신이 ‘침묵’으로 나타난다는 모순이 참 흥미롭지요. 침묵의 소리의 본질은 이근원통법과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몰입을 하면 들리는 소리’이지요. 저는 요즘 이 텍스트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신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침묵의 소리를 통해 인간의 마음으로 옮겨간 사건이 아닐까요?
(미) 정말 흥미롭군요. 《유마경》39)에는 유마 거사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가서 나눈 대담 중에서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서양인들은 ‘우레와 같은 침묵(thundering silence)’라 멋지게 번역했지요. 여기서 침묵은 정말 엄청난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배) 경전 해석에서도 그와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경전 해석의 뿌리는 구조주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나 사회학이나 인류학 건축 나중에는 피카소에게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었으나, 그 시작은 로만 야콥슨40)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언어를 기능적으로 분석하는 프라하 학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어 분석을 인간의 자음(consonant)으로 구별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입술소리인 ‘b’와 ‘p’는 유성음과 무성음으로 구별되지요. 구조주의 음성학(phonetics)은 이러한 식으로 모든 요소를 +, -로 나누었습니다. 이들이 북유럽이나 러시아의 전설을 이 틀로 전부 해석한 것이지요. 악당과 선인,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적 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구조주의 신화 분석입니다.
소쉬르41)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지만, 야콥슨은 언어를 문자언어(verbal language)와, 비문자언어(non-verbal language)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A is B”라는 문장에서 A와 is와 B는 문자언어이고, 단어들 사이의 빈 공간은 비문자언어입니다. 그는 의미가 이러한 ‘빈 공간’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침표(.), 느낌표(!), 물음표(?) 등도 19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이전에는 모두 운율로만 존재하던 것(비문자언어)인데, 노래가 사라지면서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부호(문자언어)가 등장한 것이지요.
야콥슨은 또한 진하게 쓴 것이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했습니다. 제목은 크고 굵은 글씨로, 가운데, 중간에 위치합니다. 그러한 위치와 크기 같은 요소들이 바로 비문자언어이며, 배경처럼 의미를 확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야콥슨이 강조한 것이 침묵. 문법이 아닌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 공간입니다. 그러한 침묵이야말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구조주의적 언어해석입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미메시스』42)에서, 서양 전통 문학 표현양식을 둘로 나눕니다. 『오디세이아』처럼 모든 걸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 언어입니다. 과학적 언어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언어지요.43) 반면에, 오리엔트 전통(꾸란, 성경 등)에서는, 중요한 것일수록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적이고, 은유적이며. 빈 공간이 큰 언어이지요. 그는 이를 침묵 속의 웅변(eloquence from silenc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서양의 과학적 언어가 지루하게 모든 걸 설명해야 하는 것이라면, 동양적 언어는 침묵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미) 침묵의 중요성은 동양의 문학 뿐 아니라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림에서도 동양화는 강력한 여백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한 특징은 남종화44)의 경우에 두드러집니다. 심플한 공간 속에서 주는 강력한 느낌과 메시지가 있지요. 추사의 세한도45)가 좋은 예입니다.
■ 세계의 명상과학연구소
(미) 명상과학연구소에서 향후 3년 간 좋은 연구결과가 발표된다면, 전국의 과학기술계열 대학에 명상연구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상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복합적으로 결합하기에 매우 좋은 주제이기 때문이죠. 명상과학은 인문학이면서도 뇌과학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미 스탠포드46)·하버드47)·예일대학교48)에 명상과 관련된 임상/연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브라운대학에는 명상학 이니셔티브와 학부 전공학습 과정이 있을 정도입니다.49) 또한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50)에서도 매우 중요한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카이스트의 김대식 교수가 공부했던 곳이며, 그의 은사인 뇌신경과학계의 거장 볼프 싱어51)가 있는 곳이기도 하죠. 최근에는 볼프 싱어가 프랑스의 과학자였다가 티벳 승려가 된 마티유 리카르52)와 함께 의식과 신경과학을 주제로 8년 간 나눈 대담의 결과인 『나를 넘다』53)가 번역·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볼프 싱어의 딸 타냐 싱어54)도 뇌과학자이자 명상가로서 명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특히 자비·사랑·연민·공감이 사회화되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 세계의 자비명상 전문가를 모아 대대적 세미나를 연 뒤에, 후속연구와 종합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향후 막스플랑크의 연구결과가 수십 편의 논문으로 쏟아지면 명상과학계의 지형도가 바뀔 정도로 대단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9개월간 300여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17명의 명상지도자이자 연구자인 사람들이 세계 각국의 연구소에서 협업해서 연구하고 있는 대단한 프로젝트입니다. 예산은 거의 한도가 없고 fMRI 기계 3대를 사용하여 한 사람당 5회 이상씩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불가능한 연구환경입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질 높고 좋은 연구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 나가며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대담의 열기도 뜨거웠다. 대담은 명상과 창조성, 명상과 단절이라는 비교적 일상적인 주제로 시작해서 의식의 스펙트럼과 명상의 궁극적 경지인 비이원성/무경계에 대한 종교철학적 논의로 향했다. 다음으로 현대사회에서 명상이 각광받는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본 뒤, 명상과학의 정의와 명상에 관련된 용어들의 난점을 어원을 짚으며 들여다보았다. 소리를 이용한 명상과 “침묵의 소리”라는 역설적 표현 안에서는 동서양의 명상 전통의 만남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명상 연구와 연구소의 흐름을 보며 한국의 명상과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26) 자애구(慈愛句): 1. 부디 내가 행복하기를, 고통이 없기를, 2. 부디 내가 원한이 없기를, 3. 부디 내가 악의가 없기를, 4. 부디 내가 근심이 없기를
27) 칼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 현대 생물 분류학의 초석을 놓은 스웨덴의 식물학자.
28) 델피(Δελφοί, Delphi):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세상의 중심(axis mundi)으로 여겨진 곳. 파르나소스 산에 위치한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는 지구의 배꼽을 상징하는 커다란 돌인 옴팔로스(Omphalos)가 보관되어 있었음.
29) contemplatio는 접두사 con(with; ~와 함께)과 templum(altar; 제단)이 합쳐진 단어.
30) 위빠사나(विपश्यन, Vipassanā): vi(자르다, 분석하다) + passanā(보다; 觀)
31) 두카(दुक्ख, duḥkha): 팔리어 두카가 가진 세 가지 의미는 통상적인 번역어인 ‘고(苦)’만으로는 너무 단순화되는 한계가 있다. 두카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며 세 겹의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두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의 일차적 의미인 실제적 괴로움을 뜻한다. 둘째, 두카는 현재의 행복이 유지·지속되지 않아 행복이 괴로움의 씨앗이 되는 것을 뜻한다. 셋째, 두카는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존재나 현상은 그 속성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 형성된 것은 다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출처: 미산 소장)
32)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 신이 인간과 같은 형태와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함.
33) 밀린다 팡하(Milinda Pañha): 제목은 밀린다의 질문이라는 의미이며, 그리스적 사유와 인도/불교적 사유의 대결이라는 사상적 의미를 지니는 책이다.
34) mindfulness의 기원은 팔리어 사띠(sati)와 거기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어 스므르띠(smṛti)이다. 스므르띠는 본래 베다 전통에서 성스러운 경전을 “기억하다”, “마음에 품다”는 의미이며, 사띠 역시 “(다르마를)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팔리어 학자 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가 1881년에 사띠를 처음 mindfulness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35) akoustikos: 음향학(acoustics)의 어원인 그리스어. “듣는 것과 관련되는”을 뜻함.
36) (개역개정) 신명기 6장 4-9절: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하 생략)
37) 셰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 때에 읊는 기도를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을 표명하는 세 절(節)로 되어 있고, 유대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38) (개역개정) 왕상 19장.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화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39) 《유마경(維摩經)》: 원명은 비말라키르티 수트라(Vimalakīrti Sūtra). 반야부 계통에 속하는 초기 대승경전 중 하나. 유마 거사를 통해 불법의 진수를 터득하고 올바른 행위의 모범이 된 재가 신자의 이상향을 그려냄.
40)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 러시아의 언어학자, 문학이론가.
41)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스위스의 언어학자.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
42) 『미메시스』,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 유종호 옮김, 서울: 민음사, 2012. (원서: Erich Auerbach,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Willard R. Trask (Eng. trans.), Princeteon, N.Y.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43) (배철현): 예를 들면, 오디세우스 19장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오디세우스가 20년 만에 집에 갔더니, 유클레오라는 유모가 그의 다리에 난 상처를 통해 그를 알아봅니다. 이 장면에서 그 상처를 설명하기 위해 갑자기 약 300행이나 되는 어린 시절의 곰 사냥 이야기가 삽입됩니다. 이러한 내러티브적 장치를 in medias res(into the middle of things)라 한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중요한 이야기를 중간에 갑자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44) 남종화(南宗畵):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라고도 불리는 동양화의 한 분파로, 북종화(北宗畵)에 대비되는 화파(畵派)이다.
45) 김정희필 세한도(金正喜筆 歲寒圖)(1844): 국보 180호.
46) 스탠포드 의과대학(Stanford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의 자비와 이타심 연구소(Center for Compassion & Altruism Research & Education; CCARE). (http://ccare.stanford.edu/)
47) 하버드 의과대학(Harvard Medical School)과 협력 관계인 Bringham and Women's Hospital의 David R. Vago의 명상 뇌과학 및 통합의료 연구소(Contemplative Neuroscience and Integrative Medicine(CNIM) Laboratory). (http://davidvago.bwh.harvard.edu/)
48) 예일 의과대학(Yale School of Medicine)의 임상 뇌과학 클리닉(Yale Therapeutic Neuroscience Clinic)에서는 명상을 임상적으로 활용하고 있음. (https://medicine.yale.edu/people/organizations/org.aspx?orgID=114639)
49) 이니셔티브(initiative)는 특정 연구 목표 달성을 위한 핵심적/전략적 실천 프로그램을 뜻한다. 브라운 대학의 명상학 이니셔티브(Contemplative Studies Initiative)는 인간의 명상적 경험을 다학제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공식 프로그램과 학부 전공학습 과정(Contemplatice Studies Concentration)을 운영중이며, 명상학 연구 센터(Center for Contemplative Studies)를 목표로 하고 있다. (https://www.brown.edu/academics/contemplative-studies/)
50)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막스 플랑크 협회(Max-Planck Gesellschaft)에서 관리하는 연구소로, 단일기관 세계 최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유서깊은 기관이다. 이곳의 Social Neuroscience Department에서는 자비심에 관련된 연구인 “Raising Compassion"을 진행중이다.
51) 볼프 싱어(Wolf Joachim Singer, 1943-): 독일의 뇌신경과학자. 딸인 타이아 싱어(Tania Singer)도 뇌인지과학자이다.
52) 마티유 리카르(Matthieu Ricard, 1946-):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세포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과학자의 길을 내려놓고 티벳 불교 승려가 되었음. 현재 Mind and Life Institute의 이사진임.
53) 『나를 넘다: 뇌과학과 명상, 지성과 영성의 만남』, 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지음, 임영신 옮김, 파주: 쌤앤파커스, 2017. (원서: Matthieu Ricard; Wolf Singer, Cerveau et méditation : Dialogue entre le bouddhisme et les neurosciences, Allary éditions, 2017.)
54) 타냐 싱어(Tania Singer, 1969-): 막스 플랑크 인지/뇌과학 연구소의 사회뇌과학 소장으로, 인간의 사회적 행동 저변에 존재하는 뉴런/호르몬의 메커니즘과 자비(empathy)를 연구하고 있다.
| 미산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 소장)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남방불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하버드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과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대인을 위한 자비명상 프로그램인 하트스마일명상(HST)를 개발했다. 저서로는 『초기경전강의』, 『행복』, 『자비』 등이 있다. |
| 배철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하버드대학교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심연≫,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여정≫ 등이 있다. |
(명상과학 차담 시리즈 1에서 이어짐)
■ '명상과학' 정의하기
(미) 명상과학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다 보니 명상(meditation), 마음챙김(mindfulness), 관상/관조(contemplation) 등 용어들의 혼선이 크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고,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에 있어서 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립이 없으면 혼란스럽습니다. 용어가 불확실하면 연구 결과도 명확히 기술하기 어렵고요.
그래서 지금 몇 주째 고민 중입니다. ‘명상과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리저리 외국 논문들을 읽어봐도 복잡할 뿐이더군요. 존재론적 정의, 인식론적 정의 등... 저는 그 모든 복잡한 말들을 다 내려놓고 단순화하여 생각을 정리해 보았어요. 명상과학의 정의를 표 하나에 담아 보았더니, 스스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너무 간략해서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 표를 하나씩 분리해 보았지요.
명상과학은 인류가 지향하는 가장 보편적 가치입니다. ‘행복’, ‘진리’, ‘사랑’이 있고 그 삼각형 안에 명상이 들어갑니다. 실은 과학 역시 이러한 세 가지를 궁극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행위이기에 삼각형 안에 들어갑니다. 둘 사이에는 겹치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명상과학이라 부르자는 것입니다. 아직 과학이 명상을 완전히 규명하지 못했고, 명상이 과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영역이기에, 서로를 존중해야 하고요. 명상과 과학 모두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목표를 공유하고 만나다 보면 점차 겹치는 부분이 확장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서로 진보하고 성숙된 학문으로 발전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공통부분을 새로운 학문으로 상정하고, 명상과학이라는 이름의 작업가설적 정의를 해 보았습니다.
■ 용어의 문제
(배) 정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소장님 말씀을 들으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종의 ‘명상 개념어 사전’을 만들면 어떨까요? 관조, 관찰, 명상 등 명상에 관한 어휘들을 정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명상과학에 관련된 주요 개념어 100개를 뽑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각 개념어를 한 페이지 정도로 간단히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개념들을 제시하면, 앞으로 연구의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근대화를 시작하며 함께 진행한 것이 사전작업이었고, 막스 뮐러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명상과 과학이라는 이질적인 대상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 개념 정리를 하는 것이 향후 매우 중요한 기반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미) 굉장히 훌륭한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정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군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어서, 거기서 혼선이 발생합니다. 저는 ‘명상’에 대응하는 단어로 contemplati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meditation이라는 단어도 있어요. contemplation은 우리말로 보통 ‘관상·관조’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관상과학’은 한국어 어감이 좋지 못합니다 서양에서는 우리말의 ‘명상과학’에 해당하는 말로, contemplative science라는 조어를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상과학연구소는 그 영어 표현을 채택하되, contemplation의 번역어로 관상 대신 명상을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용어들과 그 특수한 용법에 대한 해설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저는 contemplation과 meditation을 모두 ‘명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 의미 상으로는 contemplation이 meditation을 포함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mindfulness(마음챙김)과 앞의 두 용어는 어떻게 다를까요? contemplation과 meditation 안에 mindfulness가 포함됩니다. 전통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그러하지요.
명상에는 몰입명상이 있고 통찰명상이 있습니다. 몰입명상·통찰명상과 mindfulness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mindfulness가 기반이고 그 위에 몰입명상과 통찰명상이 있습니다. mindfulness 없이 둘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mindfulness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존 카밧진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혼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명상과학 연구소에서 도표로 리포트에 정리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자비명상은 어디에 위치할까요? 전통적으로 자비명상은 몰입명상에 포함됩니다. 자애구26), 따뜻하고 좋은 느낌 등을 끊임없이 집중해서 확대·방사하는 것이기에 방법론적으로 정확하게 몰입 명상입니다. 그러한 기본 분류를 이번 리포트에서 하고 있습니다.
(배) 용어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칼 린네27)가 생물학 분류를 시작했고, 다윈이 그것을 이어받아 종의 기원에서 종·속·과·목을 나누었죠. mindfulness, contemplation, meditation 등의 구분이 이과 비슷한 관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 요소의 관계는 수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지요. 의미는 유사하지만 어원이 다르고 사용되어 왔던 방식도 다를 수 있는 것이지요.
contemplation은 그리스 델피28) 전통에서 온 단어로 추정됩니다. 델피 신전에서는 사제가 하늘의 새를 보며 점(augury)을 쳤다고 합니다. 당시에 점을 치던 제단을 템플룸(templum)이라 불렀습니다. 라틴어 contemplatio29)는 제단에서 하늘에 날아가는 새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제단에 있는 내 모습을 하늘 위에서 조망하기는 내가 가야 할 목적지에 가고 있는지를 내 자신이 3인칭이 되어 나를 보는 연습이자, 나를 대상화하는 연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contemplation의 본래 의미입니다.
(미) 동양의 명상전통에서는 바로 그것이 가장 기본이자 매우 중요한 행법이고 개념으로 여겨집니다. 몸과 마음의 현재 상태를 대상화해서 보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위빠사나30)입니다. 위빠사나의 한역어인 볼 관(觀) 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황새가 물여울이 내려가는 것을 보는 모양입니다. 황새가 보는 이유는 고기를 잡기 위함이지요. 그저 물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를 꿰뚫어 보아야만 황새는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깊이 보고, 순간을 포착하는 것, 존재의 본질을 보는 것이 관인 셈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본질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변화입니다. 변화는 존재하는 현상의 본질입니다. 그 무엇도 한순간도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지요. 둘째는 갈등 구조입니다. 현상의 본질인 변화는 갈등 구조로 일어납니다. 이를 불교용어로 두카31)(괴로움)라 부릅니다. 셋째는 그러므로 영구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체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며,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순간 또 변해 있기에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관점을 통해 존재를 분석적으로 보는 것이 ‘관’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보고 통찰을 얻을 때 중요한 점은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의식이 대상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몰입명상, 의식이 현상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관점을 놓치지 않는 통찰명상(=지혜명상)의 방법이 있습니다. 둘은 다르지요.
(배) 말씀하신 것을 듣고 비슷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과학을 하며 종교적 관상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피타고라스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일종의 종교 교주였지요.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 두 부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듣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계산하는 부류입니다. 피타고라스는 둘 중에서 듣는 부류야말로 진정한 제자라 여겼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근원이 수학이라 말했어요. 그의 저작이나 삶을 보면 피타고라스는 과학과 명상의 조화를 추구한 최초의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과학과 명상(직관)이 합해진 ‘명상과학’이라는 모순어법(oxymoron)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을 때, 피타고라스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수학과 종교를 하나로 보았기 때문에 음악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5음계를 발견하기도 한 피타고라스에게 음악은 우주의 질서가 수학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지요.
말씀하셨던 ‘관’ 이라는 것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서양철학 전통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를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테오리아(θεωρία, theōría)는 ‘관’과 매우 유사한 개념으로, 깊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깊이 봄으로부터 이론(theory)이 나오는 것이지요. 둘째, 포이에시스(ποίησις, poíēsis)는 깊이 바라봄으로써 나온 이론을 통해 무언가를 만드는 것, 창작을 뜻합니다. 셋째, 프락시스(πρᾶξις, prâxis)는 깊이 바라본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 수련을 의미합니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프락시스 개념을 만들어냈기에 서양사상사에 영원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까지는 테오리아, 본 것만이 진리이고 포이에시스는 그저 본 것의 흉내일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은 ‘아름다움’의 이데아만 중요하지, 아름다운 여인은 ‘아름다움 그 자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뒤집습니다. 아름다운 여인가 아름다움 자체를 대체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여인에 의해 구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프락시스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와의 연결점이 등장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과외 선생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사상을 알렉산더에게 알려 줍니다. 알렉산더는 불교와의 접촉이 있었지요. 알렉산더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것을 간다라에 가서 실현시킨 것이 간다라 불상입니다. 부처의 모습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아는 불교예술의 뿌리는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일부 빚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신인동형론32)과도 연관됩니다. 알렉산더는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에 전해져 예수가 인간이지만 신이라는 사상에 영향을 주었지요. 말씀(진리)이 곧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incarnation) 사상은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를 거쳐 그리스도교까지 이른 것입니다.
(미) 그리스 문명과 불교의 만남으로 유명한 일화가 또 있습니다. 그리스인 밀린다(메난드로스 1세) 왕이 비구(比丘) 나가세나(那先)와 나눈 문답이 바로 《밀린다 팡하》33)입니다. 밀린다 왕이 질문하면 나가세나가 답하는 형식이었는데, 질문이 매우 서양인다운 질문이었습니다. 구체적이고 날카롭고 실제적인 질문들이었지요. ‘무아(無我)’가 어떻게 무아일 수 있는지 묻기도 했고요. 또한 유명한 비유 중 하나인 ‘촛불 비유’도 등장합니다. 밀린다 왕이 하나의 촛불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 때, 두 촛불이 같은지 다른지 물었고, 나가세나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연속성이 있다고 말하지요. 무아윤회(無我輪廻)를 그렇게 합리적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배) 이전에 읽으려 시도했다가 지루한 대담집인 것 같아 그냥 넘겼었는데, 다시 읽어보아야겠군요.
(미) 기원전이라 꽤 역사가 오래 되었지만 중요한 문헌이죠.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이라고 한역되기도 했고요.
(배) 영어에도 ‘봄/보다’와 관련된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 look은 그저 보는 것으로, 자기중심성이 전제된 봄입니다. look의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외부 대상으로 시점이 전이되기 위해서는 전치사가 필요합니다. “look at(자세히 살피다)”, “look upon(관여하지 않고 지켜보다, 구경하다)” 처럼요. 그러면서 점차 내 시선이 머물 구체적 대상을 고르고 자기중심성에서 대상의 움직임으로 시점이 옮겨갑니다. 그것이 see입니다. see의 어원은 라틴어로 ‘따라간다’는 의미의 sequi입니다. 따라간다는 것은 자기중심성이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완전히 없고 대상만 있는 것을 watch라 합니다. watch의 게르만 어원인 wæccende는 깨어있음(wakefulness)을 뜻합니다. 그래서 중세 수도사들은 밤의 보초를 nightwatch라 불렀지요. watch는 서양 문학과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극장은 watch를 연습하는 장소인데, 그 시초가 그리스 비극이기 때문이지요. 기원전 472년에 2만 명의 관중이 그리스 비극을 관람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배우를 보며 심지어 원수의 입장에서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게 된 것이 최초의 비극이자, 엔터테인먼트였고 대중교육이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본래 의미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연민과 자아를 확장하는 것이며, 그것은 명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감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는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지요.
(미) 우리가 사용하는 명상 관련 용어들의 어원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어떻게 원래의 의미가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작업도 중요합니다. meditaiton, contemplation 등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매우 특수한 의미를 지녔었지만, 이제 두 단어는 이미 기독교 전통의 울타리를 벗어났습니다. 불교적 의미도 섞였으나, 결과적으로 매우 보편적 색채를 띠게 되었지요. mindfulness도 불교의 스므르띠/사띠34)에서 나온 단어였지만 지금은 확대·재생산되고 현대화되면서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불교학자들이 그것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용어 사용의 혼동을 경험한 일이 최근에 있었습니다. 한 명상 워크숍에 다녀왔는데요, 그 곳의 명상 지도자와도 이러한 용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명상 워크숍을 진행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분 스스로도 용어와 개념들이 혼란스럽고 중구난방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고백하셨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학자들조차 이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지요. 그래서 명상과학연구소에서 이러한 개념적 기반작업을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침묵의 소리
(배) 조금 전에 언급했던 피타고라스는 최고의 종교적 경지를 아쿠스티코스35)라고 했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을 통해 최고의 종교적 경지에 들어가고, 우주의 원리를 깨닫는 것을 말했지요. 아쿠스티코스는 화음과 음악을 통해 표현된 우주의 원리를 듣는 명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 흥미롭네요. 비슷한 예로, 불교의 수행법 중 《능엄경》에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이근(耳根, auditory faculty)은 청각기관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이근을 통해 소리를 들을 때는 기본적으로 의식이 대상으로 향합니다. 이근원통은 외부 소리로 향했던 의식을 되돌려, 그 소리를 듣는 자를 바라보는 것, 의식이 밖으로 갔다가 다시 안으로 수렴하며 하나로 소통되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소리를 이용한 매우 구체적인 명상법이지요.
(배) 유대교 전통에서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항상 몸에 지니는 ‘성구함(phylactery)’이 있다. 성구함에는 성경 구절이 들어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구절은 신명기 6장 4-9절36)입니다. 그 첫 구절은 “이스라엘아 들어라(셰마 이스라엘37)”입니다. 셰마, 듣는다는 것이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유대교의 신의 존재는 볼 수는 없지만 들을 수는 있기에, 듣는 것은 곧 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셰마, 들음은 또한 신에 대한 완전한 승복(surrender)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듣는 전통은 침묵의 소리를 듣는 것, “sound of silence” 개념으로 표현됩니다.
(미) 놀랍군요. 바로 그것이 이근원통 수행법의 핵심이거든요. 소리가 사라졌을 때, 소리의 사라짐은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그 침묵의 공간을 인지하면 의식이 확장되지요.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의 두뇌는 공간을 인지하는 19번 영역이 매우 넓습니다. 따라서 공간인지에서 가장 의식이 편안해지고 확장됩니다. 종소리의 여음(잔향; reverberation)을 따라가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특정 소리가 사라지는 침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침묵에 일정 시간동안 몰입하는 것이 수행이지요. 침묵의 공간은 내가 현재 몰입하고 있는 것과 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을 침묵의 공간으로 준 뒤에, 그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간화선이며, 계속 의식을 비춰주면 묵조선, 바로 깨달으면 조사선의 수행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근원통은 매우 좋은 수행법인데 실천적 전통은 사라져 버리고 텍스트만 남은 상황이지요.
(배) 침묵의 소리가 유대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은 기원전 8세기의 텍스트인 열왕기상 19장38)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신을 따라 다니다가 동굴로 들어가서 신에게 한탄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평생 일했는데 내게 닥친 것은 죽음뿐이라고요. 신은 엘리야에게 모습을 드러낼 테니 동굴 입구에 서서 마음의 소리를 들으라 명령합니다. 동굴 입구에 서서 신을 기다리던 엘리야에게 찾아온 것은 미세한 침묵의 소리로 나타난 신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sound of silence입니다. ‘침묵의 소리’라는 모순어법, 소리로 드러나고 말하는 신이 ‘침묵’으로 나타난다는 모순이 참 흥미롭지요. 침묵의 소리의 본질은 이근원통법과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몰입을 하면 들리는 소리’이지요. 저는 요즘 이 텍스트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신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침묵의 소리를 통해 인간의 마음으로 옮겨간 사건이 아닐까요?
(미) 정말 흥미롭군요. 《유마경》39)에는 유마 거사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문수보살이 병문안을 가서 나눈 대담 중에서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서양인들은 ‘우레와 같은 침묵(thundering silence)’라 멋지게 번역했지요. 여기서 침묵은 정말 엄청난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배) 경전 해석에서도 그와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경전 해석의 뿌리는 구조주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나 사회학이나 인류학 건축 나중에는 피카소에게 이르기까지 영향을 주었으나, 그 시작은 로만 야콥슨40)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언어를 기능적으로 분석하는 프라하 학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어 분석을 인간의 자음(consonant)으로 구별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입술소리인 ‘b’와 ‘p’는 유성음과 무성음으로 구별되지요. 구조주의 음성학(phonetics)은 이러한 식으로 모든 요소를 +, -로 나누었습니다. 이들이 북유럽이나 러시아의 전설을 이 틀로 전부 해석한 것이지요. 악당과 선인, 천국과 지옥 등의 이원적 구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구조주의 신화 분석입니다.
소쉬르41)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지만, 야콥슨은 언어를 문자언어(verbal language)와, 비문자언어(non-verbal language)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A is B”라는 문장에서 A와 is와 B는 문자언어이고, 단어들 사이의 빈 공간은 비문자언어입니다. 그는 의미가 이러한 ‘빈 공간’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침표(.), 느낌표(!), 물음표(?) 등도 19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이전에는 모두 운율로만 존재하던 것(비문자언어)인데, 노래가 사라지면서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부호(문자언어)가 등장한 것이지요.
야콥슨은 또한 진하게 쓴 것이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했습니다. 제목은 크고 굵은 글씨로, 가운데, 중간에 위치합니다. 그러한 위치와 크기 같은 요소들이 바로 비문자언어이며, 배경처럼 의미를 확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야콥슨이 강조한 것이 침묵. 문법이 아닌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빈 공간입니다. 그러한 침묵이야말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구조주의적 언어해석입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는 『미메시스』42)에서, 서양 전통 문학 표현양식을 둘로 나눕니다. 『오디세이아』처럼 모든 걸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 언어입니다. 과학적 언어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언어지요.43) 반면에, 오리엔트 전통(꾸란, 성경 등)에서는, 중요한 것일수록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적이고, 은유적이며. 빈 공간이 큰 언어이지요. 그는 이를 침묵 속의 웅변(eloquence from silence)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서양의 과학적 언어가 지루하게 모든 걸 설명해야 하는 것이라면, 동양적 언어는 침묵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요.
(미) 침묵의 중요성은 동양의 문학 뿐 아니라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림에서도 동양화는 강력한 여백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한 특징은 남종화44)의 경우에 두드러집니다. 심플한 공간 속에서 주는 강력한 느낌과 메시지가 있지요. 추사의 세한도45)가 좋은 예입니다.
■ 세계의 명상과학연구소
(미) 명상과학연구소에서 향후 3년 간 좋은 연구결과가 발표된다면, 전국의 과학기술계열 대학에 명상연구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상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복합적으로 결합하기에 매우 좋은 주제이기 때문이죠. 명상과학은 인문학이면서도 뇌과학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미 스탠포드46)·하버드47)·예일대학교48)에 명상과 관련된 임상/연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브라운대학에는 명상학 이니셔티브와 학부 전공학습 과정이 있을 정도입니다.49) 또한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50)에서도 매우 중요한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카이스트의 김대식 교수가 공부했던 곳이며, 그의 은사인 뇌신경과학계의 거장 볼프 싱어51)가 있는 곳이기도 하죠. 최근에는 볼프 싱어가 프랑스의 과학자였다가 티벳 승려가 된 마티유 리카르52)와 함께 의식과 신경과학을 주제로 8년 간 나눈 대담의 결과인 『나를 넘다』53)가 번역·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볼프 싱어의 딸 타냐 싱어54)도 뇌과학자이자 명상가로서 명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특히 자비·사랑·연민·공감이 사회화되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 세계의 자비명상 전문가를 모아 대대적 세미나를 연 뒤에, 후속연구와 종합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향후 막스플랑크의 연구결과가 수십 편의 논문으로 쏟아지면 명상과학계의 지형도가 바뀔 정도로 대단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9개월간 300여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17명의 명상지도자이자 연구자인 사람들이 세계 각국의 연구소에서 협업해서 연구하고 있는 대단한 프로젝트입니다. 예산은 거의 한도가 없고 fMRI 기계 3대를 사용하여 한 사람당 5회 이상씩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불가능한 연구환경입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질 높고 좋은 연구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 나가며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대담의 열기도 뜨거웠다. 대담은 명상과 창조성, 명상과 단절이라는 비교적 일상적인 주제로 시작해서 의식의 스펙트럼과 명상의 궁극적 경지인 비이원성/무경계에 대한 종교철학적 논의로 향했다. 다음으로 현대사회에서 명상이 각광받는 근본적인 이유를 살펴본 뒤, 명상과학의 정의와 명상에 관련된 용어들의 난점을 어원을 짚으며 들여다보았다. 소리를 이용한 명상과 “침묵의 소리”라는 역설적 표현 안에서는 동서양의 명상 전통의 만남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명상 연구와 연구소의 흐름을 보며 한국의 명상과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참고문헌
26) 자애구(慈愛句): 1. 부디 내가 행복하기를, 고통이 없기를, 2. 부디 내가 원한이 없기를, 3. 부디 내가 악의가 없기를, 4. 부디 내가 근심이 없기를
27) 칼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 현대 생물 분류학의 초석을 놓은 스웨덴의 식물학자.
28) 델피(Δελφοί, Delphi):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세상의 중심(axis mundi)으로 여겨진 곳. 파르나소스 산에 위치한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는 지구의 배꼽을 상징하는 커다란 돌인 옴팔로스(Omphalos)가 보관되어 있었음.
29) contemplatio는 접두사 con(with; ~와 함께)과 templum(altar; 제단)이 합쳐진 단어.
30) 위빠사나(विपश्यन, Vipassanā): vi(자르다, 분석하다) + passanā(보다; 觀)
31) 두카(दुक्ख, duḥkha): 팔리어 두카가 가진 세 가지 의미는 통상적인 번역어인 ‘고(苦)’만으로는 너무 단순화되는 한계가 있다. 두카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며 세 겹의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두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의 일차적 의미인 실제적 괴로움을 뜻한다. 둘째, 두카는 현재의 행복이 유지·지속되지 않아 행복이 괴로움의 씨앗이 되는 것을 뜻한다. 셋째, 두카는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존재나 현상은 그 속성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 형성된 것은 다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출처: 미산 소장)
32)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 신이 인간과 같은 형태와 성격을 가진 것으로 파악함.
33) 밀린다 팡하(Milinda Pañha): 제목은 밀린다의 질문이라는 의미이며, 그리스적 사유와 인도/불교적 사유의 대결이라는 사상적 의미를 지니는 책이다.
34) mindfulness의 기원은 팔리어 사띠(sati)와 거기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어 스므르띠(smṛti)이다. 스므르띠는 본래 베다 전통에서 성스러운 경전을 “기억하다”, “마음에 품다”는 의미이며, 사띠 역시 “(다르마를)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팔리어 학자 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가 1881년에 사띠를 처음 mindfulness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35) akoustikos: 음향학(acoustics)의 어원인 그리스어. “듣는 것과 관련되는”을 뜻함.
36) (개역개정) 신명기 6장 4-9절: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하 생략)
37) 셰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예배 때에 읊는 기도를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을 표명하는 세 절(節)로 되어 있고, 유대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38) (개역개정) 왕상 19장.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화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39) 《유마경(維摩經)》: 원명은 비말라키르티 수트라(Vimalakīrti Sūtra). 반야부 계통에 속하는 초기 대승경전 중 하나. 유마 거사를 통해 불법의 진수를 터득하고 올바른 행위의 모범이 된 재가 신자의 이상향을 그려냄.
40)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 러시아의 언어학자, 문학이론가.
41)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스위스의 언어학자.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
42) 『미메시스』,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김우창; 유종호 옮김, 서울: 민음사, 2012. (원서: Erich Auerbach,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Willard R. Trask (Eng. trans.), Princeteon, N.Y.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43) (배철현): 예를 들면, 오디세우스 19장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오디세우스가 20년 만에 집에 갔더니, 유클레오라는 유모가 그의 다리에 난 상처를 통해 그를 알아봅니다. 이 장면에서 그 상처를 설명하기 위해 갑자기 약 300행이나 되는 어린 시절의 곰 사냥 이야기가 삽입됩니다. 이러한 내러티브적 장치를 in medias res(into the middle of things)라 한다. 독자의 이해를 위해 중요한 이야기를 중간에 갑자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44) 남종화(南宗畵):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라고도 불리는 동양화의 한 분파로, 북종화(北宗畵)에 대비되는 화파(畵派)이다.
45) 김정희필 세한도(金正喜筆 歲寒圖)(1844): 국보 180호.
46) 스탠포드 의과대학(Stanford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의 자비와 이타심 연구소(Center for Compassion & Altruism Research & Education; CCARE). (http://ccare.stanford.edu/)
47) 하버드 의과대학(Harvard Medical School)과 협력 관계인 Bringham and Women's Hospital의 David R. Vago의 명상 뇌과학 및 통합의료 연구소(Contemplative Neuroscience and Integrative Medicine(CNIM) Laboratory). (http://davidvago.bwh.harvard.edu/)
48) 예일 의과대학(Yale School of Medicine)의 임상 뇌과학 클리닉(Yale Therapeutic Neuroscience Clinic)에서는 명상을 임상적으로 활용하고 있음. (https://medicine.yale.edu/people/organizations/org.aspx?orgID=114639)
49) 이니셔티브(initiative)는 특정 연구 목표 달성을 위한 핵심적/전략적 실천 프로그램을 뜻한다. 브라운 대학의 명상학 이니셔티브(Contemplative Studies Initiative)는 인간의 명상적 경험을 다학제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공식 프로그램과 학부 전공학습 과정(Contemplatice Studies Concentration)을 운영중이며, 명상학 연구 센터(Center for Contemplative Studies)를 목표로 하고 있다. (https://www.brown.edu/academics/contemplative-studies/)
50)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막스 플랑크 협회(Max-Planck Gesellschaft)에서 관리하는 연구소로, 단일기관 세계 최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유서깊은 기관이다. 이곳의 Social Neuroscience Department에서는 자비심에 관련된 연구인 “Raising Compassion"을 진행중이다.
51) 볼프 싱어(Wolf Joachim Singer, 1943-): 독일의 뇌신경과학자. 딸인 타이아 싱어(Tania Singer)도 뇌인지과학자이다.
52) 마티유 리카르(Matthieu Ricard, 1946-):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세포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과학자의 길을 내려놓고 티벳 불교 승려가 되었음. 현재 Mind and Life Institute의 이사진임.
53) 『나를 넘다: 뇌과학과 명상, 지성과 영성의 만남』, 마티유 리카르 & 볼프 싱어 지음, 임영신 옮김, 파주: 쌤앤파커스, 2017. (원서: Matthieu Ricard; Wolf Singer, Cerveau et méditation : Dialogue entre le bouddhisme et les neurosciences, Allary éditions, 2017.)
54) 타냐 싱어(Tania Singer, 1969-): 막스 플랑크 인지/뇌과학 연구소의 사회뇌과학 소장으로, 인간의 사회적 행동 저변에 존재하는 뉴런/호르몬의 메커니즘과 자비(empathy)를 연구하고 있다.
미산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 소장)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남방불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하버드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과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대인을 위한 자비명상 프로그램인 하트스마일명상(HST)를 개발했다. 저서로는 『초기경전강의』, 『행복』, 『자비』 등이 있다.
배철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하버드대학교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심연≫,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여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