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각 분야 명사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주제의 인문이야기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지혜의 깊이를 더하시길 바랍니다.

대담[명상과학 차담 시리즈] 3 : 김완두 소장, 양성원 교수, 성해영 교수

202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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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명상과학 아고라를 앞두고 효자동의 한 카페에서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 미산 소장이 첼리스트 양성원 교수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의 성해영 교수를 만났다. 양성원 교수는 명상하는 음악가로서 명상이 자신의 연주에 어떤 심오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하 ‘미’와 ‘양’과 ‘성’으로 약칭)

■ 명상의 시작

(성) 선생님의 종교적 배경은 어떻게 되시나요? 명상은 언제 처음 하게 되셨나요?

(양)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제 명상은 종교 배경과는 무관합니다. 가톨릭 방식의 관상기도를 한 것도 아닙니다. 명상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10대 후반, 한국에서 프랑스로 연구년을 오셨던 한 교수님을 통해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어른이 시키는 것이니 좋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시작했지요. 그런데 명상을 하게 되면서 ‘집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중은 파리에서 학부를 다니던 시절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말이었음에도, 솔직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집중이라는 말이 상당히 막연했기 때문이지요. 집중을 마음과 머리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느끼게 된 것은 명상 덕분이었습니다. 명상을 하게 되면서, 집중은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모으기 이전에 먼저 ‘열리는’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명상의 경험은 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변해온 것 같습니다. 컨디션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요. 하지만 명상을 하다 보면 신기하게 몸을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연주는 육체적 활동이다 보니, 고된 연주와 빠듯한 연주일정을 소화하며 피로가 쌓이게 되는데, 명상을 하게 되면 몸의 어느 부분에 피로가 쌓였는지 병원 진찰에서도 잘 나오지 않는 미세한 지점을 스스로의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아 신기합니다.

■ 다큐멘터리 <시간의 종말> 이야기

(미) 카톨릭 순교자들을 기리는 다큐멘터리 <시간의 종말>1)을 제작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연주도 굉장히 명상적이라는 반응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양) 프랑스에서 자라면서 프랑스 한인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미사를 드렸습니다. 당시에는 교민이 많지 않았지요. 제가 다니던 곳은 ‘파리 외방전교회2)’라는 조직이었습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19세기에 당시 한국에 발령을 받은 신부님들이 그 성당 소속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들의 역사와 이야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지요. 병인박해 등이 카톨릭 내에서는 알려져 있지만, 한국에 이러한 분들이 계셨고, 근대 한국의 주요한 장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거기서 자라면서 제가 다닌 바로 그 성당에서 고국에 선교사들이 보내졌다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이 이야기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그 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연주도 하는 것을 기획하게 되었지요.
종교계 외에서 이런 작업이 시도된 것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알리는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정부나 방송국에서는 종교적 색채 때문에 다루기를 꺼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불수교가 시작되기도 이전에, 한불관계의 첫 단추를 시작한 분들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로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또한 저 역시도 종교색을 떠나서, 이렇게 순교 과정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였는지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이 취지와 이야기에 공감해 주셔서 제작하게 되었지요.

■ 명상하는 음악가

(성) 명상하는 음악가로서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양) 음악을 오래 연주하다 보면 깊은 몰입 상태에서 마치 명상적 의식 상태와 유사한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거기에 도달하는 데 명상이 굉장히 큰 도움을 줍니다. 연주자는 악보에 쓰여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과정에서 손으로 악기를 다루어야 합니다. 거기서 연주자가 가장 힘들게 도달하는 마지막 단계는, 스스로 연주하는 동시에 한 발자국 앞서 청각이 청중에 가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청각이 자기 자신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일종의 메타 인지3)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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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그렇습니다. 그것이 연주자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합니다.

(성) 연주하는 자와 지켜보는 자가 동시에 되는 것이군요. 마치 스스로를 분열시키듯.

(양) 그렇죠. 자기의 연주를 하는 연주자는 너무도 흔합니다. 저도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런 과정으로 연주자로서의 커리어를 쌓으며 살기도 하지요. 하지만 정말로 감동을 주며 설득력 있는 연주는 극히 드문데, 그 이유는 본인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단계가 된 사람이 적기 때문이고, 그 경지가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 전 세계의 다른 연주자들도 비슷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나요?

(양) 그걸 터득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성) 그저 내 연주를 한다는 게 아니라, 내 연주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바깥에서 그걸 지켜보는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를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양)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성) 비슷한 이야기 하는 사람을 보신 적 있나요?

(양) 다른 연주자들도 그것이 어렵다는 것, 궁극적 경지라는 것은 알지만 그 체험은 극히 드뭅니다.

(성) 음악인의 종교체험 같은 것이군요.

(양)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거기에 명상이 어마어마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육을 훈련시켜서 근육이 알아서 악기를 다루고 길을 찾아가게 하는 식과는 다릅니다. 그것만큼 지루하고 생명력 없는 연주가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음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작곡가의 영원한 목표, 작곡가가 귀로 듣고 싶었던 무언가 입니다. 연주는 그것을 재생하는 과정이고요. 제대로 된 연주는 작곡가가 음표들 뒤에 어떤 색채와 감정을 담았을까 알아내려 고민하는 것과 동시에, 연주장 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청각으로 자기 자신을 홀 끝까지 내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미) 명상의 고수들이 그저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리는 단계가 아니라, 그 단계를 지나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대상화하는 일을 끝없이 하다 보면, 정말로 초연함(detachment)의 절정, 완전한 대상화(objectification)에 도달합니다. 굉장히 높은 명상 수준이지요. 보는 자를 보는 것, 듣는 자를 듣는 것. 심리학이 말하는 메타 인지도 넘어선, 초월적 경지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여기에서도 한 발자국 더 나아갑니다. 보는 자가 형성되는 것 마저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보는 자’의 형성 자체도 일종의 분리이기 때문에, 그마저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음’ 만이 남게 되지요. 그렇게 보는 자, 보는 대상, 보는 행위가 완벽하게 하나로 합쳐지면, 영원한 현재로서의 행위 그 자체만 생생하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고조된 깨달음이며 명상 상태입니다. 많은 명상 이론이 그 이야기를 하지만 체험은 쉽지 않습니다. 홀 끝에서 듣는다는 것은 정말 수준 높은 경지죠.

(양) 맞습니다. 그게 가장 어려운 지점, 키 포인트입니다.

(성) 교수님은 언제 처음 경험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말해주실 수 있나요?

(양) 처음은 독일에서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곡이고, 너무도 좋아하는 공간이었고, 너무나 호흡이 잘 맞는 연주자들과 함께했으며, 관객들의 영향도 너무나 컸습니다. 몰입상태로 가는 데 관객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지요. 그런 체험이 일어났을 때, 그보다 더 고요한 관객이 없습니다. 그 순간 관객이 저와 함께 듣는다는 것이 느껴지고, 제 의식 안에서 통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실 연주자로서 가장 강렬한 순간은 가장 고요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정말 인상적인 표현입니다. 분리감 없이 완전히 일체감을 느낀 것이군요. 음악과 청중과 연주자가 하나가 되는 경험이네요. 그것이 대략 몇 년도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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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88~89년 정도였습니다. 대학원을 막 시작했을 때 처음 경험했죠. 그렇게 연주하는 자신을 듣는 체험은 매번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연주를 아주 많이 하더라도 어렵습니다. 예전에 한 연주회를 마치고 기자간담회를 하던 중, 어떻게 똑같은 곡을 몇 년째 연주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연주를 계속 하는 이유는, 연주는 매번 다르기 때문입니다. 글 쓰는 것도 매일 다르지 않나요? 똑같은 생각이라도, 오늘 쓴 것과 내일 쓴 것은 다르겠지요. 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일정한 수준을 추구하기 위해 연습하더라도, 매번 연주는 다릅니다. 심지어 똑같은 곡이라도요. 그래서 수년 째 연주하는 곡이라도 매번 다릅니다. 매번 다를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연주하는 것도 가능한 겁니다. 예를 들어 브람스가 1860년에 쓴 어떤 곡이 있다고 하면, 연주자가 몇 살 때, 또 더 나이가 들어서까지 수백 번 연주하는 과정은 매번 다릅니다. 사실, 그 과정이 다르다는 건, 그 순간에 살아있다는 것이고, 그 살아있는 과정은 나 혼자서만 잘 해서가 아니라 관객들과 함께 서로의 청각이 만나는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만나는 지점은 시각으로도 형성 가능합니다. 그런데 연주를 하게 되면서 청각이 만났을 때도 마음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쨌든 매번 그러기는 불가능합니다.

(성) 강도 높은 체험은 손으로 꼽을 정도시겠군요. 최근은 언제죠?

(양) 작년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연주가 그랬고, 이번에 리스트와 쇼팽을 녹음한 뒤 통영에서 연주했을 때도 그랬죠. 그럴 때 환경이 매우 중요한 것 같아요. 얼마 전 미황사라는 사찰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예불을 함께 드리고 명상하고 연주를 했을 때도 느꼈습니다.

(성) 관객들의 경우에도 그런 연주 체험 동안 일종의 집단적 청각적 엑스터시를 느끼나요? 그러고 나면 관객들도 이번 연주는 정말 달랐다고 말하기도 하나요?

(양) 그럼요. 작년 3시간이 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했을 때 그랬습니다. 누군가에게 티켓을 무료로 받아서 얼떨결에 연주회에 온 사람들은 지루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주를 듣고 싶어 자발적으로 온 청중은 다릅니다. 거기서 큰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연주회 초대권이 많이 나갔다는 말을 들으면 청중이 많다는 기쁨 이전에, 이번 연주는 좀 힘들겠다는 걱정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쨌든 명상이 이런 지점에서 큰 도움을 주었는데, 명상을 해 보고 직접 느껴본 사람 외에는 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막막합니다. 학생들에게 해보라고 해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잘난 체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성) 그렇겠네요. 선생님도 그 상태에 의도적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그전에 모든 요소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하고, 만일 그렇다고 해도 될 까 말 까 한 것일 테니까요.

(양) 중요한 연주가 있기 전에는 꼭 명상을 하는데, ‘오늘은 왠지 가능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감각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날에는, ‘오늘은 조심하지 않으면 평범하게 집에 갈 수도 있겠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하지요.

■ 명상적인 음악, 명상적인 연주

(성) 그렇다면 특정한 곡이 더 명상적이고 다른 곡은 그렇지 않다기보다는, 어떠한 곡을 연주하실 때의 맥락과 연주 상황 등이 그 곡을 명상적으로 만드는 것인가요?

(양) 곡 자체가 명상적인 게 없지는 않습니다. 너무 화려하고 기교적으로 자신의 수준을 보여주어야 하는 곡들이 명상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명상 단계에서, 기교적으로 화려한 곡들의 재해석이 가능해진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 똑같은 곡이지만, 해석의 방식이나 태도가 확실히 달라진다는 말씀이군요.

(양) 그렇죠. 어떻게 보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해야 하는 곡일지라도, 명상을 했을 때 그 곡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타이스의 명상곡4)같은 종류의 곡들이 물론 명상에 어울리겠지만, 한편으로 요즘에는 명상곡이 너무도 상업화되어서 영혼 없는 명상곡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영원한 명상곡으로 남을 수 있는 음악은, 가장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것의 균형이 맞는 곡입니다. 인간의 감성을 담았는데, 작곡가의 지적인 영감도 작곡법적으로 훌륭할 때, 그것이 훌륭한 명상곡이 되는 것입니다.

(미) 동감합니다. 명상의 최고봉은 지적으로 아주 충만한 것이 넘치지 않으면서 감성과 조화를 이룰 때입니다. 또한 그 상태가 삶 속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명상입니다. 저는 그것을 중도(中道)라 표현합니다. 중도는 기계적 중간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합들의 조화로움이며, 요소와 조건들이 조화로워서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참되고 좋고 선한 것입니다. 그 지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려 하면 만들어지지 않고, 몰입한 뒤 마음을 비우고 이완해야 생겨납니다.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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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명상을 조금씩 오랜 기간 해 보니, 그러한 명상의 경지라는 것은 차츰차츰 천천히 쌓아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 연주라는 것이 운동과도 비슷하고 때로는 수행 같기도 합니다. 고도로 집중하고, 오랜 시간동안 고독한 상태를 견뎌야 하며, 때로는 금욕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벽으로 몰아붙이고 한계를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양) 그렇죠. 악보에 음표가 그려져 있을 때 그 음표들은 결국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불멸의 명곡이 아직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화음에서 주는 색채들을 찾는 과정이 매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악보대로 정확한 음정과 박자를 기계적으로 찾아 연주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했다면 저는 오래 전에 악기를 그만 두었겠죠. 이상하게도 지적으로, 감성적으로 밸런스가 맞춰진 명곡을 연주했을 때는 점점 ‘음표 뒤의 음’들을 찾게 되는데, 그러한 음표 이면의 음들을 찾는 과정에서 명상이 너무도 큰 도움이 되지요.

(성) 표면 뒤에, 외피 뒤에 있는 심층적인 것, 끝도 알 수 없는 것을 발견하고 느끼며 인식하는 것이군요.

(미) 그저 음악을 하는 분들은 그 경지를 인지조차 하기 어렵겠군요.

(성) 독일에서의 첫 체험 이전처럼, 그런 경지를 몰랐던 때가 있었으니 그것을 알고 난 뒤에는 내가 이전에 정말로 몰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이 그 경지를 모르고 있을 때, 그것을 알려줄 방법이 도무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군요.

(양)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자꾸 하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걸 깨달을 때까지는 어느 정도는 기계적으로 쌓아 올라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준비가 필요하지요.

(성) 지극한 행복 아래에는 오랜 고통과 연습이 동전의 양면처럼 있네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군요.

(양) 명상을 하고 그런 체험을 해 보니, 어찌 보면 외부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향하는 것과, 내부적으로 깊어지는 것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두 방향 중에서 내부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명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 내적 성찰이네요. 너무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성) 너무도 명료하게 말씀해주셔서 제가 이해했다고 착각될 정도입니다(웃음). 음악의 종교체험이라니! 무용수들이 춤을 추다가 그런 변형의식상태5)로 가서 춤추는 자와 관객과 행동이 사라지고 ‘춤 자체’만 남는 경지를 보고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깨어나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자기를 잊어버리는 그런 경지이지요. 그 기록을 읽어 보고 몸을 심하게 움직이는 데도 불구하고 명상이 추구하는 가장 높은 경지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을 통해 그런 경지가 음악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놀랍습니다. 듣는 사람도, 연주하는 사람도 없고 소리만 우주에 가득 찬 경지네요!

(양) 설명하기 참 어려운데요, 음표 하나하나가 모였을 때 하나의 형태가 보입니다. 그 음표들이 모여 만드는 형태를 저는 ‘귀로 본다’고 표현합니다. 귀로 보이는 형태는 어찌 보면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러한 흐름과 제 몸에서 다루는 악기의 흐름이 만날 때까지의 과정이 연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과정입니다. 명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같은 음악가들이라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가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워요.

(성) Snowbording to Nirvana(열반으로 가는 스노보드)6)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 따르면, 스노보드 자체가 만들어진 목적은 눈을 가장 멋지게 타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노보드를 타는 과정에서, 스노보드 자체의 본질이 깨어나게 만들면 눈을 너무도 멋지게 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도교 식으로 말하면 흐름을 탄다고 하겠네요. 저는 이것이 악기의 흐름과 음악의 흐름을 일치시킨다는 선생님의 말씀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미)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세계는 틀이 있습니다. 틀이 없으면 소통이 되지 않지요. 의식도, 땅도, 물건도 틀이 있습니다. 이 틀이 텅 비어 있는 시공간과 만나지 않으면, 틀의 기능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흐름과의 만남도 일종의 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거기서 주체는 누구일까요? 인간입니다. 음악에서는 연주자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틀과 공간이라는 것을 자유자재로 운용하게 되면, 절묘한 조화가 발생합니다. 연주자 스스로가 그 조화를 일체로 인식하면 주변의 듣는 사람도 함께 공명하면서 비이원적(non-dual) 상태가 됩니다. 음악에서도 이런 경험이 가능한 것이지요. 틀은 일종의 훈련입니다. 명상도 잘 되기까지는 자세와 호흡 등 틀이 필요합니다. 그 틀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틀을 잊으면서 흐름이 생기지요. 흐름을 타면 완전히 밖에서 관조하는 의식이 형성이 되지요. 그런 점에서 명상과 음악이 정말 통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 나가며

명상하는 음악가 양성원 교수와 명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미산 소장, 그리고 인간의 종교경험을 인문학적으로 연구하는 성해영 교수의 만남은 음악과 명상이라는 생소한 주제의 만남만큼이나 신선했다. 양성원 교수의 연주자로서의 생생한 예술적 경험이 명상학적, 종교학적 관점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은 예술가의 주관적 경험이 관객들에게 감각적으로 전달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다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언어로 기술됨으로써, 명상적 체험과 예술적 체험의 접점 및 유사성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남겨 주었다.


미주

1) <시간의 종말(For the End of Time>(2016):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머나먼 조선 땅에서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의 희생의 이야기를 올리비에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 연주와 함께 담았다. 양성원 교수가 기획 및 총괄과 연주를 담당했다. (홈페이지: http://fortheendoftime.com/)
2)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는 1658년 설립된 로마 카톨릭교회의 선교단체이다. 천주교 조선교구가 설립된 1831년 조선에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선교사로 파견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박해로 선교사들이 순교하거나 도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1836년과 37년, 피에르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가 입국했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을 마카오의 신학교로 보내 최초로 조선교회의 천주교 신부가 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한국 본부가 있다. (공식 홈페이지: http://www.mepasie.org/)
3) 메타 인지(meta cognition): 자신의 인지적 활동 자체를 인식하고 판단하며 조절하는 능력.
4) 프랑스의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가 작곡한 오페라 타이스(Thaïs) 중, 2막의 악장 사이에 있는 바이올린을 위한 명상곡(Méditation).
5) 변형의식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 평상시의 일상적인 의식 상태와는 다른 의식 상태를 뜻한다. 최면, 명상, 환각, 트랜스, 꿈 등의 상태를 포함한다.
6) Frederick Lenz, Snowbording to Nirvana, St. Martin's Pres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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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 소장)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남방불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하버드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과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대인을 위한 자비명상 프로그램인 하트스마일명상(HST)를 개발했다. 저서로는 『초기경전강의』, 『행복』, 『자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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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원 (연세대학교 관현악과 교수)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지적이고 독창적인 해석과 연주로 세계 주요 언론과 청중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제 1회 객석예술인상(2009)과 제 4회 대원음악상 연주상(2009)을 수상했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 뿐만 아니라 양성원 교수가 속한 트리오 오원(Trio Owon)과 함께 슈베르트, 브람스 등 뛰어난 연주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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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영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라이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간의 종교 경험과 신비주의를 주요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와의 대담집인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명상가 한바다와의 대담집인 <궁극의 욕망을 찾아서>, 등의 저서가 있고 역서로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