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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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음악 명상] 류이치 사카모토, 마지막이라 예감했던 시간 속에서 써 내려간 그의 내면의 음악 (이치훈)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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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tiff.no/en/program/2018/ryuichi-sakamoto-coda)

"[Async]는 나의 마지막 음악이 될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든 규칙과 형식, 익힌 것들을 전부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단지 내가 듣고 싶은 소리와 음악만 담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이 나의 마지막 시간일 수도 있다."

2014년 솔로 앨범 제작을 준비중이던 일본의 현대음악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인후암 진단을 받고 즉각 일체 활동을 중단하고 치료에 집중했다. 그리고 당시 만들어오던 음악 스케치들을 모두 폐기하고, 새하얗고 커다란 캔버스 위에서 0에서부터 다시 작곡을 시작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되어버릴지 모르는 시간 속에 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오직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나는 무엇을 듣고 싶은 것일까?'


-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를 피아노로 옮길 것
- 바흐의 합창곡을 옅은 안개의 움직임 속에서 엄격한 논리가 모습을 드러내듯 편곡해 연주할 것
- 일상 속에서 사물의 소리를 수집할 것
- 환경음을 수집할 것. (빗소리, 폐허 소리, 혼잡한 소리, 시장 소리.)
- 하나의 템포에 맞춘 음악이 아니라, 각각의 소리와 파트가 고유의 템포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볼 것.


현대음악 작곡가이자 세계적인 영화 음악감독 그리고 환경운동가, 한때는 영화배우와 여러 광고의 모델로도 활발히 활동해온 류이치 사카모토가 2014년 암 진단과 함께 데뷔이래 처음으로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작곡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진실하게 보내기 위해 세운 다섯 가지 계획이다. 현시대 여느 작곡가보다 화려한 업적과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던 그는 지난 세월 속에서 느끼고 익히고 차지하며 그렇게 쌓여온 삶의 퇴적물들을 몸의 아픔 앞에서 모두 씻어 보내버리고 다시 빈 자리에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ᅠ'지금 나는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을까?'

그는 본인의 직감과 영감을 소중히 하고 늘 새로운 순간순간 깨어있기 위해 끊임없이 수련하고, 일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ᅠ거리의 소음, 동물들의 소리 그리고 나뭇잎, 바람, 비와 같이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자연의 소리에 집중한 그는 앨범 제작 기간 동안 실제로 뉴욕, 파리, 도쿄에서 지내며 스마트폰으로 일상의 여러 소리를 녹음해ᅠ[Async] 의 음악 속에 담았다. 특히, [Async]의 음악에서는ᅠ앨범명(ASYNC : 비동시적, 비규칙적 소통)처럼 음악 속의 각 요소들이 마치 자연의 요소들처럼 각자의 고유한 빠르기와 시간을 가지고 울릴 수 있도록 연구했다. 그는 작곡가가 오선지 위에 그려놓는 음들이 작곡가 본인의 지극히 주관적인 계획과 의도인 동시에 자연의 이치와 질서가 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즈음에서, 작곡가로서 아니, 한 사람으로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던진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게 된다. '지금 나는 무엇을 듣고 싶을까?' 두 귀를 통해 세상의 많은 소리와 여러 음악을, 넘치는 말들을 들어왔는데 지금 나는, 지금 나는 무엇을 듣고 싶을까? 매일 밤 침대 위에 누워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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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tiff.no/en/program/2018/ryuichi-sakamoto-coda)


그의 가장 개인적이고 본질적인 음악 [Async]

[Async]는 류이치 사카모토의ᅠ19번째 솔로 스튜디오 앨범이자 2009년 [Out of Noise] 이후 8년 만에 발표한 그의 신보다. 2015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전면 활동을 중단 선언하고 오로지 치료에 전념하기로 발표한 이후 처음 만나는 그의 솔로 음악이다. 워낙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해오던 그였기에, 급작스러운 활동 중단 소식이 그의 여러 팬들과 대중들에게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긴 인고의 시간을 소중히 하며 버티어 만든 음악이기에, 스스로 마지막 앨범이라 거듭 강조하며 가장 자신의 내면의 진솔한 감정을, 예술을 담은 음악이기에 그 의미가 무척이나 크다.

투병 기간 동안 일상의 소리와 환경음에 집중했던 그는 [Async] 에서ᅠ다양한 소리와 음향을 수집해 그만의 독특한 구성방식으로 설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익숙한 악기의 새로운 해석, 전자음악을 통해 만든 음향의 비정상적인 질감 그리고 가수 David Sylvian과 소설가 Paul Bowles의 낭독 음성을 녹음하여 샘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다양한 소리는 함께 어우러져 나오지만 협화적인 화음을 이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 소리 들을 '자신의 존재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ᅠ자신만의 중요한 방식이 있기 마련이다'고 설명하며, 덧붙여 청자들에게ᅠ소리에 대하여 귀를 열어두고 좋고 나쁨의ᅠ편견없이 각각의 소리를 이해해주시길 제안한다.ᅠ

[Async]는 발매 후 순식간에 일본 앨범 차트와 빌보드 American Top Classical Album 차트의 상위권을 기록했으며 매거진 Fact에서도 2017년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여러 평단을 통해 매우 긍정적인 리뷰를 얻었는데ᅠ"[Async]는ᅠ그의 이전 작품들과 달리 매우 독특한 음향과 구성 그리고 소수자, 혼돈, 양자 물리학, 삶과 인공물, 소음에 대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깊고 오랜 생각이 들어가 있으며, 그가 불가피하게 느껴야 했던 죽음과 영원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ᅠ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고 칭송했으며, "류이치 사카모토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팔레트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작곡가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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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www.imdb.com/title/tt6578572/mediaviewer/rm4120138752,
http://www.docandfilm.com/en/cinema/ryuichi-sakamoto-coda-2/)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가 듣는 세상 <코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성기였던 2012년부터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한 2014년을 거쳐 새로운 앨범 [Async]를 선보인 2017년까지 지난 5년의 세월이 다큐멘터리 영화ᅠ<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 빼곡히 담겼다.ᅠ스티븐 노무라 쉬블 감독은 일본 내 지진, 쓰나미, 방사능ᅠ노출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던 당시 반핵활동가로 목소리를 키웠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을 들여다보길 원했고, 또한 그의 이런 활동들이 그의 음악 속에서 어떻게 녹아드는지를 관찰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영화는 2012년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 후ᅠ2년 후에 류이치 사카모토가 인후암 판정을 받으면서 더욱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인생ᅠ2막과 예술가로서 죽음 앞에서 경험하는 여러 감정과 그만의 방식으로 풀고 엮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영화 속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몇 번씩이나 "다 포기하고 놓아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하는데, 투병 중 수없이 찾아오는 힘든 순간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이고 일깨우며 믿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성된 작품으로 영화 '레버넌트'의 OST를 통해 복귀하고 8년 만의 솔로 앨범 [Async]까지 성공적으로 발표하게 되는데,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그가 느끼고 가졌던 마음과 선택들이 영화 속에 그대로 담겼다.ᅠ감독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듣고 그것을 어떻게 그의 음악으로 표현해내는지ᅠ지켜봄으로써 관객들이 스스로 새로운 인식의 창을 열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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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imeout.com/tokyo/music/interview-ryuichi-sakamoto)


'Life, Life' 그의 음악 인생 40년을 전시하다 

1952년 1월 17일생으로 도쿄와 뉴욕에 본거지를 둔 일본의 현대음악 작곡가, 세계적인 명성의 영화 음악감독, 가수, 음반 제작가, 환경운동가, 영화배우, 모델, 무용가, 작가... 지적이고 수려한 외모와 함께 뚜렷한 사고관과 투철한 세계관을 가진 류이치 사카모토는 현 나이 67세로 세상에서 수많은 배역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쳐왔다. 일반인들에게는ᅠ"Merry Christmas Mr. Lawrence" 라는 곡과 함께 ᅠ영화음악감독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그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그래미 어워즈, 골든 글로브 어워즈 등 굴지의 음악상을 일본인 최초로 수상하였으며, 영화 "마지막 황제(1987)"부터 "마지막 사랑(1990)", "리틀 부다(1993)" 그리고ᅠ최근의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와 얼마 전 개봉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8)", 한국영화 "남한산성(2017)"의 OST를 작업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 인생 40주년을 맞아 그의 음악 세계를 설치 미술, 비디오아트, 다큐멘터리, 사운드아트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개하는 특별전이 서울 남산 회현동 피크닉(Picnic)에서 진행 중이다. 세계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특별전 'Life, Life' 는ᅠ대중음악에서 시작해 영화음악, 현대 전자음악, 미디어 아트 등으로 확장된 그의 예술과 삶의 여정을 관람자들이 하나하나 경험할 수 있도록 일곱 가지의 테마로 구성되었다. 더불어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과 알바 노토 등과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을 음악 전시 형태로 선보이며 다양한 예술적 경계를 넘나드는 류이치 사카모토만의 예술세계를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다.ᅠ류이치 사카모토의 특별전 'Life, Life' 오는 10월 14일까지 전시 예정이다.


Ryuichi Sakamoto - "Andata" (from "Async")(출처 : https://youtu.be/pygwK0sBUdM)


그의 인생 2막 가장 첫 음악 “Andata”

류이치 사카모토의 내면의 음악이 담긴 [Async] 앨범의 첫 트랙인ᅠ"Andata"는ᅠ2014년 솔로 앨범을 위해 스케치해오던 곡들을 암 진단과 함께 전부 폐기할 때, 유일하게 버리지 않은 단 하나의 곡이다. 왜였을까? 다시 0, 제로의 상태로 돌아갈 때 유일하게 남겨둔 이유를 음악 속에서 유추해본다.

"Andata"는ᅠ'출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Async] 앨범의 출발 지점에 위치해 그의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뚜렷하게 보여준다."Andata"는 모든 걸 비우고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간 그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자기다운 선율을 피아노 한 대의 간결한 연주로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화성의 코드 위에서 짧고 소박한 주제적 선율이 윗 성부와 아랫 성부에서 신중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듯 연결된다. 1분이 조금 안 되는 시간동안 피아노가 선율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면 그 위로 불협화 적이고 불편한 소음들이 매우 낯설게, 불온하게 얹힌다. 그리고 선율은 피아노에서 엄숙한 오르간으로 옮겨져, 한층 어둡고 무거운 그리고 축축하고 뿌예진 질감을 확연히 드러낸다.

4분 남짓한 곡의 전체적인 구성을 머리 위로 그려보면, 마치 끝을 잊어버린 채, 영원할 줄로만 착각하며, 자신이 만들어온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준 인생이라는 허구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온 한 어른에게 급작스레 인생이 자신의 실체를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인 것 같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곳곳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녹음한 일상의 소리가 듣기 힘들 정도로 불협화적인 소음이 되듯, 피아노의 안정되고 익숙한 선율이 불안할 정도로 엄숙한 오르간으로 옮겨가듯, 삶은 어느새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몸의 아픔을 통해 인간의 유한함과 한없이 나약함을 그리고 신비로움을 일깨워준 듯하다. 아마도 예상하건대, 류이치 사카모토는 자신의 병을 알기 전 써두었던 가장 본질적이고 단순한 선율의 스케치 위에 그가 지난 4년간 직접 경험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을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상의 다양한 소리로 덧입힌 것 같다. 자칫 섬뜩하고 듣기 불편할지라도 그게 삶이니까. 그게 인생의 민낯이니까.

 개인적으로는 처음ᅠ"Andata"를 들었을 땐, 전자음들의 소음이 너무 강해서 차마 완곡을 감상하지 못했다.ᅠ[Async] 앨범 속에 그의 라이너 노트를 읽고 나서야 음악이 들려왔다. 왜 그가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파괴해야 했는지, 왜 마지막이라 예감했던 시간 속에서 써 내려간 그의 내면의 음악이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어져야했는지 이해가 되려 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반복재생 하며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삶의 의미를 한 움큼이나마 이해하고자 노력해본다.


하지만,ᅠ"Andata"의 그 아름다운 주제 선율이 소음 속에서 변해야만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 속에서 늙고 병들고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 한 사람으로서, 작곡가로서 너무 가슴 아픈 일이기에, 불편한 소음들과 불협화 적인 전자음들을 걷어내고 직접 피아노 한 대로 "Andata"를 연주해보았다. 소음들을 기억하면서. 즉, 인생의 유한함과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삶의 진상을 기억하면서. 부족한 연주 실력이지만 저만의 방식으로 "Andata"를 받아들이고 해석해ᅠ연주했다. 원곡의 소음들이, 전자음들이 때로 불편하게 느껴질 땐, 본질의 아름다운 선율을 기억하시라고 유튜브 영상으로 남겨두었다.

참고문헌

- 「반복의 관점에서 본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적특징 연구」, 윤수지, 상명대학교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과 뉴미디어음악학전공 석사학위 논문, 2016.

“Aysnc.”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Wikimedia Foundation, Inc. 15 April 2018 Web.

Ryuichi Sakamoto – Async, Pitchfork reviews, Andy Beta, 1 May 2017.

https://pitchfork.com/reviews/albums/23118-asy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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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이치훈
작사가, 음악 프로듀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으며, 대중가요 및 드라마 영화 OST 작업으로 뮤지션 이문세, 화요비, 멜로망스 등의 다수 작품을 작곡, 작사, 프로듀싱 해오고 있다. 또한, 현재 명상음악 프로젝트 “퀘렌시아(Querencia)”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