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각 분야 명사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주제의 인문이야기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지혜의 깊이를 더하시길 바랍니다.

명상[음악 명상] 익숙한 도시로부터의 비행, Johann Johannsson (이치훈)

2021-10-22

우리가 처음 눈을 뜨고 세상을 맞은 후로, 해는 한 번도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오른 적이 없었을 텐데. 여태껏 수없이 얼굴을 감싸고 스쳐 갔던 바람들도 단 한 번 같은 온도였던 적이 없었을 텐데.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새로이 태어나는 세상의 현상들에 너무 쉽게ᅠ"반복"이라는 이름과 "익숙함"이라는 표현을 붙여왔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반복과 퇴적의 의미로 우리의 보편적인 개념 속에 새겨져 버린 "하루"라는 단어도 어쩌면 "영원"이라는 단어와 다름이 없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의식 속에서 익숙해져 버린 세상의 여러 풍경과 단어, 관계, 생각, 느낌을 새삼스레 한 발자국 물러나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일, 그게 바로 명상, 마음 챙김, 알아차림에서 다루는 주된 수행 중 하나다. 나를 객관화하여 관찰하는 일,ᅠ'나'라는 필터로부터 들어오는 세상의 수많은 정보를 분별없이 제 3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일. 이를 통해 우리는 오랜 시간 자기방식대로 이름 지어왔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있게 되며 또한, 그 세상으로부터 얽혀왔던 마음을 풀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좋은 음악 감상을 통해 그 바로 봄을, 자유를 만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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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johannjohannsson.com)

아이슬란드 클래식 현대음악 작곡가 요한 요한슨(Johann Johannsson)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Orphee]는 앨범 첫 곡 제목처럼, 청자에게 '익숙한 세상으로부터 비행'을 권한다. 작곡가 요한 요한슨은ᅠ[Orphee]를 통해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길의 과정을 담고자 했으며,ᅠ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서사시 와 프랑스 작가 장 콕토의 희곡 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ᅠ존재의 무상함과 사랑 그리고 예술성을 이야기 하고자 했다.ᅠ2009년부터 [Orphee]를ᅠ작곡하기 시작해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전 앨범들과는 달리, [Orphee]를 작곡하는 데 있어서 나는ᅠ곡의 컨셉이나 구성의 서사적인 연결을 인위적으로 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 자체가 스스로 형성되고, 각자의 속도를 가질 수 있도록 나는 기다려야 했다. 나는 작곡하기 위해 달려들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성장을 꾸준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음 곡을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감상해보면 좋겠다.

(출처: https://youtu.be/AlftMNmDH00)


본질을 향해 오르는 비행 "Flight form the City"

음이 시작되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이 반복되는 피아노의 주제 선율. 마치 세월의 흐름에도 공간의 변화에도 퇴색되지 않는 단 하나 내 안의 본성처럼, 피아노 주제 선율은 차분히 고요히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선율을 반복한다. 피아노를 제외한 나머지 악기들(현악 4중주, 스트링 오케스트라, 솔로 첼로, 솔로 바이올린 그리고 각양각색의 전자 음향들)은 삶의 순간순간을 표현하듯, 아주 섬세한 현악기 소리부터 다소 거칠고 투박한 전자음까지 여러 가지 소리 재료들을 사용해 구간 구간 다양한 화성과 대선율, 음향들을 풀어놓는다. 피아노를 제외한 모든 소리와 피아노 한 대, 둘은 가변성과 불변성의 대립을 이루며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길을 비행한다. 음악의 배경 지식과 심지어 제목까지 알지 못한 채 음악을 감상한다 해도, 우리는 "Flight from the City"가 이끄는 소란스러운 일상으로부터 내면 깊은 곳의 고요함으로의 비행에 마음을 싣게 된다.

이 곡의 영감의 원천이자 앨범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이야기는,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오르페우스가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지하세계로 내려가 하데스를 감동하게 해 아내를 돌려받게 되는데,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김으로써 결국 아내를 잃고마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는다. 곡의 제목과 순서를 고려해보았을 때ᅠ"Flight from the City"는 오르페우스 아내의 죽음을 그리는 곡이라 생각된다. 전형적인 미니멀 음악의 형식에 따라 주제 선율의 반복 위에 여러 가지 악기들이 차례대로 추가되며 곡의 진행을 이끌어나가는데, 화성은 매우 깊은 슬픔을 내재하고 후반부를 향해 점점 상승하는 구조를 이룬다. 또한 클레어 랭건(Clare Langan) 감독이 제작한 "Flight from the City" 뮤직비디오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물 안에서 두 모녀가 몸으로 펼치는 사랑과 변화와 헤어짐 그리고 만남의 몸짓들이 음악과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긴다.

ᅠ “Flight from the City"와 더불어ᅠ[Orphee] 앨범의 수록곡 중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곡을 소개한다.


(출처: https://youtu.be/Fl3WtUrfEyo)


한밤이여, 안녕. 한낮이여, 안녕.

[Orphee] 앨범의 13번 트랙(Good Morning, Midnight)과 14번 트랙(Good Night, Day)을 한 트랙으로 묶은 음원으로, 앨범의 클라이막스이자 마지막 곡 "오르페우스 찬가"의 바로 전 트랙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ᅠ"한밤이여, 안녕!"에서 두 곡의 제목을 지었다고 한다. 긴장감 어린ᅠ스트링 오케스트라의 서정적인 화음군 나열로 "Good Morning, Midnight"이 시작되고, 그 위로 날카롭게 우글거리는 전자음이 출현하며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공간을 조금씩 차지해나간다. 클래식 악기 소리와 전자음 소리의 대립은 우글거리는 전자음으로 귀결되고 잠시간 정적이 흐른 뒤 이내 건조한 톤의 솔로 피아노가 단순한 화음군을 나열하며 새로운 장면을 그린다. 마치 느린 왈츠처럼 어디론가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듯 피아노의 상승하는 주제적 화음군은 요한 요한슨이ᅠ[Orphee] 앨범 전체 곡들에서 주되게 사용한 주제적 화성 언어이다.

솔로 피아노의 느리고 어두운 왈츠가 끝나고 다시 긴장감 어린 스트링 오케스트라로 시작되는 "Good Night, Day"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이야기 전개상 지상의 빛을 보기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지키지 못한 오르페우스가 결국 아내를 데려오지 못하고 슬픔에 잠겨 비참한 결말을 맞는 순간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슬픔의 상황을 그리는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화음군 위에 한숨처럼 짧고 강하게 터져 나오는 솔로 첼로의 선율은 오르페우스의 마지막 순간을 표현하는 듯하다.

[Orphee] 앨범에 수록된 15개 트랙 중ᅠ소개한 세 개의 곡이 가장 인상 깊으면서도, 음악을 통한 명상의 경험에 적합한 곡들이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빌려 앨범의 전곡을 순서대로 들어보길 권한다. 15개의 곡이 하나하나 듣는 귀를 넘어서 청자의 마음에 들어와 케케묵은 감정들을 건드리고, 어루만지고, 정화해줄 것이다. 2012년 앨범 발매 후,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이 [Orphee] 앨범에 대해ᅠ남긴 인상적인 리뷰가 기억난다.

이런 몽환적인 음악이라면, 어느 누가 마약을 필요로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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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johannjohannsson.com)


삶의 진실이 목말랐던 작곡가, 그 마음이 담긴 음악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6), <컨택트>(2017) 그리고 그에게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안겨준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5) 등 굴지의 작품들의 음악 감독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요한 요한슨은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미니멀 음악과 신고전주의 음악 그리고 현대적인 전자 음악 요소와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을 혼합하여 실험적인 사운드를 구현하는 작업 양식을 구축하였다. 요한 요한슨은 2000년부터 유럽 내 독립영화의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그의 데뷔작이자 기존의 영화 문법을 깨며 주목받았던ᅠ<아이슬랜딕 드림>(2000)으로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해 관객들을 만난 바 있으며 또한,ᅠ한국 영화감독 김소영 감독의 <포 엘렌(For Ellen)>(2013)과ᅠ<러브송>(2016)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어린시절 그는 피아노와 트롬본을 배우며 음악과 가까워졌지만, 고등학교를 들어서며 학문적인 음악 공부의 한계를 느끼며 음악에 대한 꿈을 접게 된다. 그리고 대학에서 문학과 언어를 전공하였고, 20대의 10여 년 시절을 인디 록 밴드에서 보내며 기타 연주와 기타 음악 작곡에 열중했다. 이후로ᅠ마크 알몬드, 배리 아담슨, 핀란드의 일렉트로닉 밴드 판 소닉, 하플러 트리오(The Hafler Trio), 영국 출신 아방가르드 뮤직 작곡가 앤드류 멕켄지, 록 밴드 CAN의 드럼 연주자 자키 리이베자이트, 스티븐 오말리 등 수많은 팝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클래식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작업하며 매우 실험적이고 본인만의 음악적 양식을 구축했다.

안타깝게도 2018년 2월 9일 향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요한 요한슨이 남긴, 아직 전 세계 그의 팬들이 만나지 못한 그의 음악이 담긴 미개봉 영화가 3편이다.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맨디>와 레이첼 와이즈, 콜린 퍼스 주연의 <더 머시> 그리고 루니 마라와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한 <메리 막달렌>에서 그의 마지막 음악을 만날 수 있다.

요한 요한슨의 음악은 여느 미니멀 음악답게 단순하고 매력적인 음악의 패턴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요한 요한슨만의 서정성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언젠가 그의 인터뷰를 유튜브를 통해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매우 여렸지만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 매우 강했고 아주 차분했지만 본질에 대한 탐구와 그 열정이 끊임없이 들끓었다. 그 마음이 오롯이 그의 음악에 담기고, 그만의 음악 양식이 되었다. 요한 요한슨이 남긴 소중한 음악들을 통해, 익숙해진 나 자신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진실한 나를 찾아 떠나는 비행에 오르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참고문헌

Johann johannsson Official Website
http://www.johannjohannsson.com

Johann Johannsson : Orphee Album Review, Pitchfork reviews, Benjamin Scheim, September 13 2016.
https://pitchfork.com/reviews/albums/22305-orphee/

[취재파일] 영화 '컨택트' 속 음악의 비밀, SBS뉴스, 류란, 2017/02/13.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040334&plink=ORI&cooper=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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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이치훈
작사가, 음악 프로듀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으며, 대중가요 및 드라마 영화 OST 작업으로 뮤지션 이문세, 화요비, 멜로망스 등의 다수 작품을 작곡, 작사, 프로듀싱 해오고 있다. 또한, 현재 명상음악 프로젝트 “퀘렌시아(Querencia)”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