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북 목사 문익환
2019년 3월 9일 오후 5시50분쯤, 문동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현대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그를 보내며, 몇몇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형 문익환 목사를 떠올렸다. 문익환 목사가 199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동생 문동환 목사는 약 15년을 더 살며 시대와 호흡한 셈이다. 어쩌면, 문동환 목사는 형보다 ‘더 오랜 기간’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간 만큼, ‘더 고된 삶’을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1994년, 그 후로 펼쳐진 대한민국의 15년은 ‘외화내빈(外華內貧)’과 다름없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키는 크지만 육체를 이루는 뼈와 관절이 부실한 사람처럼, 대한민국은 튼튼하지 못한 기초로 인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기독교와 인물>,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문익환 목사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늦봄’이란 호를 지었지만, 오늘 난 그에게 ‘소년 문익환’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바람과는 별개로 대다수 국민은 문익환을 향해 이미 강렬한 수식어를 준비하고 있을 거다. 그건 바로 ‘방북 목사’란 수식어다. 문익환의 강렬했던 인생 후반부 중에서도 ‘방북’이란 키워드는 문익환을 상징하는 중요한 수식어다. 네이버 검색창에 문익환이란 이름을 두드리면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이란 연관검색어가 뜰 정도니… 문익환의 아들 문성근은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에 담긴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던졌다.
“1985년에 <한씨 연대기>를 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감방 가는 문목사의 아들이 연극을 하니까. 오랫동안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하면, 기사 안에 부모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어요. 그분과 저는 워낙 다른 차원의 사람이어서, 그분은 그분의 삶이 있고 저는 제 삶이 있다고 하곤 했죠. 그러다가 1989년 방북 이후 그 생각을 철회했습니다. 이제 틀렸다. 교과서에까지 나올 일이기 때문에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죠.”
<‘방북’이란 수식어 덕분에 문익환은 자신의 영향력을 획득하기도 하였지만, ‘방북’이란 수식어 덕분에 문익환은 절반의 지지에 만족해야 했다. 여전히 그는 누군가에겐 특정 색깔로 칠해진 채 소비되고 있다. 일단, 문익환의 삶 전반을 훑어보자.
# 너무 조용해 보였던 문익환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 송몽규, 나운규, 김병영, 최봉설 등등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한 애국지사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태어나고 자라났다. 어릴 적 문익환의 친구는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였다. 1936년 4월, 신사참배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여 동맹 퇴학을 당하기도 한 문익환은 9년의 시간이 흐른 1945년, 일제의 고문 가운데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문익환의 첫째 딸 문영실이 태어났다. 강렬한 생(生)과 사(死)가 서로를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윤동주의 죽음 뒤 문익환의 삶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1947년, 한신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32살이 된 194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성서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아내 박용길에게 별다른 의논도 없이 떠난 유학길이기도 했다.
▲ 학창시절 문익환(왼쪽)과 윤동주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에 자원한 문익환은 도쿄 GHZ(유엔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며 정전회담 통역을 했다. 1954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문익환은 그 후, 한신대 연세대 등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며 한빛교회에서는 목사로 시무했다. 그리고 1970년, 성서 번역에 전념하기 위해 한빛교회 목사를 사직했다. 격렬하게 요동쳤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을 때, 그의 행보는 어쩌면 너무 소극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게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재야 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1950년부터 1970년까지 드러난 문익환 목사의 활동 반경은 다소 의문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사실 문익환은 이 시기, 자신에게 주어진 성서를 내면으로 온전히 소화하며 시대와 적절히 조응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너무 조용히 있는’ 문익환처럼 비춰질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가 자신의 인생 후반에 뿜어낸 강렬한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문익환 평전>을 기록한 김형수 작가는 자신의 평전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혹자는 너무도 빨리 거물이 되어 보란 듯 스승 노릇을 하려도 들지만 완전주의자 문익환은 너무도 오래오래 소년이길 고집했고 학생이길 희망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끈기 있게 견디며 자신의 작업을 진행할 때 이따금 찾아오던 경제적 빈곤감과 장기간의 신경쇠약 그리고 참기 어려운 불면 속에서 그의 신학세계는 한 걸음 한 걸음 익어갔다.”
# 평화를 꿈꾼 문익환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가 짓밟히던 1970년대 중반,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월 1일 함석헌, 김대중, 함세웅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성명서를 작성하여 명동성당에서 발표했다. 다음날 바로 구속된 문익환 목사는 인생 첫 옥살이를 경험해야 했다. 1977년 전주 교도소에선 21일간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옥중’ 단식을 했으며 그 후, 출옥과 옥살이를 거듭해야 했다. 1984년 10월, 계훈제, 백기완, 장기표 등과 함께 ‘민주통일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한 문익환의 관심은 대한민국에 마땅히 뿌리박혀야 할 ‘민중들의 사람다운 삶’에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전방위적이었다. 탁월한 시대정신을 지닌 재야의 거인들과 머리를 맞대기로 했고, 탁월한 시대정신을 지닌 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현장(現場)으로 가서 민중들과 살을 맞대기도 하였다. 1983년, 그의 나이 66세에 펼친 설교들 중 ‘민중의 부활, 민족의 부활’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다. 그 제목은 문익환 인생 후반, 그의 마음에 강렬히 새겨진 정신과도 같았다.
문익환의 눈은 남쪽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평화’는 결국 남한과 북한 사이에 온전히 이뤄져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 그는 1989년 3월 25일 방북하여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4월13일, 베이징과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그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수순은 바로 ‘구속’이었다. 1992년 1월 25일, 미국의 친우협회는 문익환 목사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같은 해 4월 11일, 서울에서 ‘문익환 선생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후원회’가 발족됐다. 노벨평화상은 결국 문익환 목사를 빗겨 갔지만, ‘노벨평화상’이라는 타이틀은 문익환 목사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문익환보다는, ‘방북 목사’ 문익환이 거칠지만 더욱 그다운 수식어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로 인해 문익환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하나로 일치되지 않지만, 애당초 남북간의 평화는 한쪽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자보다는 평화 그 자체를 향해 몸을 던지는 자로부터 오는 것이니 말이다.
1994년 1월 18일, 문익환은 세상을 떠났다.
# 인간 문익환
사실 문익환은 ‘기독교’라는 범주만으로는 가둘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거인(巨人)이었다. 그러나, ‘거인 문익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 기독교였다. 이것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간 모든 인물들은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문익환의 신념은 바로 기독교에서 왔다.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신념은 ‘성서’, 특히 그가 깊이 파고들었던 구약에서 왔다. ‘구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예언자들의 모습을 깊이 연구하며 ‘목사 문익환’은 ‘인간 문익환’으로 빚어져갔다.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를 위한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반면, 문익환은 ‘인간 예수’가 그러했듯, 종교성이 가져올 수 있는 겉치레를 과감히 벗어던졌다.
▲ 현장에서 민중들과 호흡했던 문익환
진중권이 문성근을 향해 “보통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을 하겠다면 집안에서 말릴 텐데, 아버님인 문익환 목사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다고 들었어요.”라는 이야기를 던졌다. 문성근은 이렇게 답했다.
“항상 저를 지지해주셨죠. 지지한다고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너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아가라, 큰 조직 안에서 소모품으로 살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너의 삶을 영위해봐라’ 이런 뜻을 항상 전해주셨어요.”
이어서 문성근은 “아버지 문익환 목사나 작은 아버지 문동환 목사나, 저나 저희 형 시절에 태어났으면 예술을 했을지도 몰라요. 음악과 글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갖고 계신 분들인데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서 북간도로 이주한 집안에 태어났으니… 안중근 장군이 마을 뒷동산에서 총연습을 할 때 저희 할머니가, 그러니까 문목사의 어머니가 밥을 날라드렸다고 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소년 문익환에게 붙어다니는 ‘방북’이란 수식어는 그의 세계를 너무 좁게 해석하고 있는 수식어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녀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했고, 예술적 감성을 갖고 살아갔으며 남과 북이 하나 된 세계를 끊임없이 꿈꿨다. 민중들의 삶에 깊이 파고들며 그들과 춤추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 ‘방북 목사’ 문익환이란 타이틀은 너무 비좁은 해석에서 피어난 답답한 수식어인 것이다.
소년 문익환, 그가 꿈꾼 세계를 지금 대한민국은 꿈꾸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참고문헌
• 김형수, <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2004
• 진중권,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창비, 2015
•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4
| 필자_소재웅 작가이자 목회자, 목회자이자 작가. 한 사람이 걸어간 삶에 따뜻한 밑줄 하나 긋는 게 그가 가진 사명이다. 저서로 <긋플레이어>(부제: 내가 사랑한 선수들), , <전자슈터 김현준> 등이 있다. |
# 방북 목사 문익환
2019년 3월 9일 오후 5시50분쯤, 문동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현대사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그를 보내며, 몇몇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형 문익환 목사를 떠올렸다. 문익환 목사가 199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동생 문동환 목사는 약 15년을 더 살며 시대와 호흡한 셈이다. 어쩌면, 문동환 목사는 형보다 ‘더 오랜 기간’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간 만큼, ‘더 고된 삶’을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1994년, 그 후로 펼쳐진 대한민국의 15년은 ‘외화내빈(外華內貧)’과 다름없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키는 크지만 육체를 이루는 뼈와 관절이 부실한 사람처럼, 대한민국은 튼튼하지 못한 기초로 인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기독교와 인물>,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문익환 목사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늦봄’이란 호를 지었지만, 오늘 난 그에게 ‘소년 문익환’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바람과는 별개로 대다수 국민은 문익환을 향해 이미 강렬한 수식어를 준비하고 있을 거다. 그건 바로 ‘방북 목사’란 수식어다. 문익환의 강렬했던 인생 후반부 중에서도 ‘방북’이란 키워드는 문익환을 상징하는 중요한 수식어다. 네이버 검색창에 문익환이란 이름을 두드리면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이란 연관검색어가 뜰 정도니… 문익환의 아들 문성근은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에 담긴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던졌다.
“1985년에 <한씨 연대기>를 하면서 그런 방식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감방 가는 문목사의 아들이 연극을 하니까. 오랫동안 언론사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하면, 기사 안에 부모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어요. 그분과 저는 워낙 다른 차원의 사람이어서, 그분은 그분의 삶이 있고 저는 제 삶이 있다고 하곤 했죠. 그러다가 1989년 방북 이후 그 생각을 철회했습니다. 이제 틀렸다. 교과서에까지 나올 일이기 때문에 감춘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죠.”
<‘방북’이란 수식어 덕분에 문익환은 자신의 영향력을 획득하기도 하였지만, ‘방북’이란 수식어 덕분에 문익환은 절반의 지지에 만족해야 했다. 여전히 그는 누군가에겐 특정 색깔로 칠해진 채 소비되고 있다. 일단, 문익환의 삶 전반을 훑어보자.
# 너무 조용해 보였던 문익환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윤동주, 송몽규, 나운규, 김병영, 최봉설 등등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한 애국지사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태어나고 자라났다. 어릴 적 문익환의 친구는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였다. 1936년 4월, 신사참배 문제로 시위에 참여하여 동맹 퇴학을 당하기도 한 문익환은 9년의 시간이 흐른 1945년, 일제의 고문 가운데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문익환의 첫째 딸 문영실이 태어났다. 강렬한 생(生)과 사(死)가 서로를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윤동주의 죽음 뒤 문익환의 삶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1947년, 한신대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32살이 된 194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성서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아내 박용길에게 별다른 의논도 없이 떠난 유학길이기도 했다.
▲ 학창시절 문익환(왼쪽)과 윤동주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에 자원한 문익환은 도쿄 GHZ(유엔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며 정전회담 통역을 했다. 1954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문익환은 그 후, 한신대 연세대 등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며 한빛교회에서는 목사로 시무했다. 그리고 1970년, 성서 번역에 전념하기 위해 한빛교회 목사를 사직했다. 격렬하게 요동쳤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을 때, 그의 행보는 어쩌면 너무 소극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보일 여지가 있다. 게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재야 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문익환 목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1950년부터 1970년까지 드러난 문익환 목사의 활동 반경은 다소 의문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사실 문익환은 이 시기, 자신에게 주어진 성서를 내면으로 온전히 소화하며 시대와 적절히 조응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너무 조용히 있는’ 문익환처럼 비춰질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가 자신의 인생 후반에 뿜어낸 강렬한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문익환 평전>을 기록한 김형수 작가는 자신의 평전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혹자는 너무도 빨리 거물이 되어 보란 듯 스승 노릇을 하려도 들지만 완전주의자 문익환은 너무도 오래오래 소년이길 고집했고 학생이길 희망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끈기 있게 견디며 자신의 작업을 진행할 때 이따금 찾아오던 경제적 빈곤감과 장기간의 신경쇠약 그리고 참기 어려운 불면 속에서 그의 신학세계는 한 걸음 한 걸음 익어갔다.”
# 평화를 꿈꾼 문익환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가 짓밟히던 1970년대 중반,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월 1일 함석헌, 김대중, 함세웅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성명서를 작성하여 명동성당에서 발표했다. 다음날 바로 구속된 문익환 목사는 인생 첫 옥살이를 경험해야 했다. 1977년 전주 교도소에선 21일간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옥중’ 단식을 했으며 그 후, 출옥과 옥살이를 거듭해야 했다. 1984년 10월, 계훈제, 백기완, 장기표 등과 함께 ‘민주통일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한 문익환의 관심은 대한민국에 마땅히 뿌리박혀야 할 ‘민중들의 사람다운 삶’에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전방위적이었다. 탁월한 시대정신을 지닌 재야의 거인들과 머리를 맞대기로 했고, 탁월한 시대정신을 지닌 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현장(現場)으로 가서 민중들과 살을 맞대기도 하였다. 1983년, 그의 나이 66세에 펼친 설교들 중 ‘민중의 부활, 민족의 부활’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다. 그 제목은 문익환 인생 후반, 그의 마음에 강렬히 새겨진 정신과도 같았다.
문익환의 눈은 남쪽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평화’는 결국 남한과 북한 사이에 온전히 이뤄져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 그는 1989년 3월 25일 방북하여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갖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4월13일, 베이징과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그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수순은 바로 ‘구속’이었다. 1992년 1월 25일, 미국의 친우협회는 문익환 목사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같은 해 4월 11일, 서울에서 ‘문익환 선생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후원회’가 발족됐다. 노벨평화상은 결국 문익환 목사를 빗겨 갔지만, ‘노벨평화상’이라는 타이틀은 문익환 목사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타이틀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문익환보다는, ‘방북 목사’ 문익환이 거칠지만 더욱 그다운 수식어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로 인해 문익환을 향한 시선은 여전히 하나로 일치되지 않지만, 애당초 남북간의 평화는 한쪽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자보다는 평화 그 자체를 향해 몸을 던지는 자로부터 오는 것이니 말이다.
1994년 1월 18일, 문익환은 세상을 떠났다.
# 인간 문익환
사실 문익환은 ‘기독교’라는 범주만으로는 가둘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거인(巨人)이었다. 그러나, ‘거인 문익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 기독교였다. 이것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아간 모든 인물들은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문익환의 신념은 바로 기독교에서 왔다.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신념은 ‘성서’, 특히 그가 깊이 파고들었던 구약에서 왔다. ‘구약’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등장했던 예언자들의 모습을 깊이 연구하며 ‘목사 문익환’은 ‘인간 문익환’으로 빚어져갔다. 일부 종교인들이 종교를 위한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반면, 문익환은 ‘인간 예수’가 그러했듯, 종교성이 가져올 수 있는 겉치레를 과감히 벗어던졌다.
▲ 현장에서 민중들과 호흡했던 문익환
진중권이 문성근을 향해 “보통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연극을 하겠다면 집안에서 말릴 텐데, 아버님인 문익환 목사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다고 들었어요.”라는 이야기를 던졌다. 문성근은 이렇게 답했다.
“항상 저를 지지해주셨죠. 지지한다고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너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살아가라, 큰 조직 안에서 소모품으로 살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너의 삶을 영위해봐라’ 이런 뜻을 항상 전해주셨어요.”
이어서 문성근은 “아버지 문익환 목사나 작은 아버지 문동환 목사나, 저나 저희 형 시절에 태어났으면 예술을 했을지도 몰라요. 음악과 글에 대한 예술적 감성을 갖고 계신 분들인데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서 북간도로 이주한 집안에 태어났으니… 안중근 장군이 마을 뒷동산에서 총연습을 할 때 저희 할머니가, 그러니까 문목사의 어머니가 밥을 날라드렸다고 해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쩌면 소년 문익환에게 붙어다니는 ‘방북’이란 수식어는 그의 세계를 너무 좁게 해석하고 있는 수식어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녀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했고, 예술적 감성을 갖고 살아갔으며 남과 북이 하나 된 세계를 끊임없이 꿈꿨다. 민중들의 삶에 깊이 파고들며 그들과 춤추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런 그에게 ‘방북 목사’ 문익환이란 타이틀은 너무 비좁은 해석에서 피어난 답답한 수식어인 것이다.
소년 문익환, 그가 꿈꾼 세계를 지금 대한민국은 꿈꾸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참고문헌
• 김형수, <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2004
• 진중권, <진중권이 만난 예술가의 비밀>, 창비, 2015
•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4
필자_소재웅
작가이자 목회자, 목회자이자 작가. 한 사람이 걸어간 삶에 따뜻한 밑줄 하나 긋는 게 그가 가진 사명이다. 저서로 <긋플레이어>(부제: 내가 사랑한 선수들), , <전자슈터 김현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