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경’, 그리고 ‘반감’
사람들은 보통, 의사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과 ‘반감’을 품고 살아간다. 장기간, 많은 내용을 공부한 뒤에야 ‘의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을 다룬다’는 사실 때문에 ‘동경심’을 갖지만, ‘의사’라는 타이틀로 인해 그들이 얻게 되는 ‘부와 명예’, 그리고 ‘환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무언가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번 달 <기독교와 인물>에서 다루려는 인물은 ‘의사’ 장기려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독교인 의사’ 장기려다. 이 말은 즉,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의사로 살아갔다는 거다. 사실 어떠한 종교든 그것이 사이비가 아니라 검증된 고등종교라면, 그리고 그 종교에서 말하는 가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게 되면 누구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장기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며 그가 가진 종교가 말하는 진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 애쓰다보니, ‘장기려’란 이름 석자는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 ‘이 시대의 명의’, 장기려
2007년, EBS가 주관하여 대한민국 전문의 800명이 ‘이 시대의 명의’를 뽑았다. 주인공은 장기려였다. ‘명의’의 기준이야 서로 다르겠지만, 사람의 생사(生死)가 오가는 치열한 의료 현장에서 그가 탁월한 의술을 발휘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의사의 중요한 역할은 ‘육체적 고통을 치료하는 데’ 있다. 오직 정신적인 역할만을 강조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를 두고 ‘명의’라고 부르긴 힘들 것이다. 수많은 전문의들이 ‘이 시대의 명의’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정도의 인물이라면, 의사 장기려는 무언가 달랐던 게 분명해 보인다.
▲ ‘복음병원장’ 시절 입원환자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장기려
장기려 박사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의술(醫術)을 향한 열의는 대단했다. 6.25가 발발하여 부산에 내려온 뒤, 장기려는 부산 복음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서울대 의대에선 1959년부터 장기려에게 교수로 와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근무하던 복음병원을 포기할 수 없어 고사하던 장기려는 1961년 서울대 의대 교수직을 수락했다. 이유는, 당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로 돌아온 후배 민병철에게 미국 의학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서울대에서만 근무한 건 아니었다. 그가 그만큼 ‘의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갔다는 걸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 절제와 대량 절제술’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63세였던 1974년에는 ‘한국 간연구회 창립 및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 내가 환자 자신이라면…
그러나 그가 단순히 ‘의술’에 탁월한 의사였다면, ‘마지막 성자’,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의 수식어가 그에게 붙진 않았을 거다. 그는 탁월한 의술 그 이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환자들을 대했다. 그 가치관을 대변하는 한 문장은 바로 ‘내가 환자 자신이라면……’이었다.
지강유철이 저술한 <장기려, 그 사람>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선생은 자신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로 어려서부터 가졌던 “자신과 남을 동일화시켜보는 습성”을 꼽는다. 대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서 성서 속의 요셉이나 다윗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처럼 되고 싶어 기도했던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좋은 의사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세례를 받고 난 후 줄곧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부산의대 교수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장기려는 부산대학병원 서북쪽 판잣집에 방치되어 있는 8명의 행려병자들을 발견하게 됐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의사들과 일정한 회비를 거둬 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 장기려는 행려병자들을 찾아가 치료는 물론 손톱도 깎아주고 몸도 닦아 주었다. 장기려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지 고민하다가 복음병원 의사들을 현장에 보냈다. 결국, 현장에 갔던 의사 및 간호사들 역시 행려병자들을 복음병원으로 데려오는 데 동의하고 그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장기려를 둘러싼 이야기는 차고 넘쳐난다. 병원비를 못 내 퇴원을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가불받아 대신 내주기도 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몰래 환자의 도피를 돕기도 하였다. 영양실조로 병원을 찾은 이에겐 ‘밥값’을 처방했다. 어쩌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꿈꾸는 ‘저 먼 곳에 있는 의사의 모습’에 아주 가까운 사람이 바로 장기려였다.
# 신앙인 장기려
장기려는 ‘의사’이기에 앞서 ‘신앙인’이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거대한 흐름이나 주류에 편승해서 자신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데는 관심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그의 나이 마흔여섯 때 만든 ‘부산모임’이었다. 장기려는 부산의대 교수 시절, 성서연구를 위한 부산모임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에 시작하여 일흔여덟까지 계속한 모임이었다. 모임의 시작은, 부산의대 외과교실원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려는 장기려의 소박한 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기려의 소박한 동기는, 알찬 열매로 이어졌다. 부산모임이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부산모임은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색을 강화하여, 자신만의 신앙적 울타리를 견고히 세우려는 모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모임은 동일한 신앙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동질성을 강화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당시 부산모임에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부산모임은 무교회 신앙을 공부했고, 기독교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키워갔다.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부산 모임 자체가 무교회주의자들의 모임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불교의 스님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교파를 초월할 뿐 아니라 타 종교에까지 열려 있었던 셈이다. 당시 부산모임은 한국 기독교의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영역의 주류가 그렇듯, 한국 기독교의 주류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지만, 더 넓은 차원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아무래도 소홀했다. 장기려가 시작한 ‘부산 모임’은 종교성의 강화가 아닌, ‘신앙을 통한 실질적인’ 열매를 강조했다는 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장기려 자체가 ‘종교성’에 갖히지 않고, ‘기독교 종교 안에 담겨 있던 예수 정신’에 사로잡혀 살아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손홍규는 그가 저술한 <청년의사 장기려>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던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십여 만 개의 종교가 탄생했다가 소멸해갔다. 오늘날 가장 신성한 장소는 은행이며 가장 신성한 숭배의 대상은 물질이다. 이것들의 위력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종교라고 해서 영속할 것이라는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다. 몰락은 대체로 자멸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아갈 것이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기려 그는 종교의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기적이다. 종교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서 닿을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중략) 나는 독자에게 장기려를 닮아야 한다거나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렇게 실패해야 성공한다는 역설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나는 족하다”
# 진실, 사랑, 그리고 성실
그는 자신이 예수를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앙적인 언어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였다.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같은 단어들이 날것 그대로 비기독교인에게 전달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장기려의 고민을 잘 담고 있는, <장기려, 그 사람>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선생은 세 가지 단어를 찾아냈다. ‘진실’과 ‘사랑’, 그리고 ‘성실’. 선생은 진실한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성실한 공동체라면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에서 태어난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새벽 1시45분에 세상을 떠났다. 예수가 이 땅에 왔던 그 날, 예수처럼 살던 장기려는 이 땅을 떠났다. 죽음까지도, 장기려다운 역설로 가득했다.
▲ 외래진료 중인 장기려
# 아주 고될지도 모르는 장기려의 모범답안
우리는 가끔 ‘진짜’ 종교인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은 곧 ‘가슴 뜀’으로 이어진다. ‘나도 저렇게 한 번 살아봐야겠다’라는 다짐에서 오는 가슴 뜀이다. 내가 사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한 번 ‘진짜 삶’을 살아보고 싶다면, 장기려가 남기고 간 삶의 흔적들은 아주 모범적인 답을 제공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아주 고될지도 모르겠지만…
참고문헌
•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 손홍규, <청년의사 장기려>, 다산책방, 2018
| 필자_소재웅 작가이자 목회자, 목회자이자 작가. 한 사람이 걸어간 삶에 따뜻한 밑줄 하나 긋는 게 그가 가진 사명이다. 저서로 <긋플레이어>(부제: 내가 사랑한 선수들), , <전자슈터 김현준> 등이 있다. |
# ‘동경’, 그리고 ‘반감’
사람들은 보통, 의사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과 ‘반감’을 품고 살아간다. 장기간, 많은 내용을 공부한 뒤에야 ‘의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사람들의 생명을 다룬다’는 사실 때문에 ‘동경심’을 갖지만, ‘의사’라는 타이틀로 인해 그들이 얻게 되는 ‘부와 명예’, 그리고 ‘환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무언가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번 달 <기독교와 인물>에서 다루려는 인물은 ‘의사’ 장기려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기독교인 의사’ 장기려다. 이 말은 즉,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의사로 살아갔다는 거다. 사실 어떠한 종교든 그것이 사이비가 아니라 검증된 고등종교라면, 그리고 그 종교에서 말하는 가치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게 되면 누구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장기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며 그가 가진 종교가 말하는 진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 애쓰다보니, ‘장기려’란 이름 석자는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 ‘이 시대의 명의’, 장기려
2007년, EBS가 주관하여 대한민국 전문의 800명이 ‘이 시대의 명의’를 뽑았다. 주인공은 장기려였다. ‘명의’의 기준이야 서로 다르겠지만, 사람의 생사(生死)가 오가는 치열한 의료 현장에서 그가 탁월한 의술을 발휘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의사의 중요한 역할은 ‘육체적 고통을 치료하는 데’ 있다. 오직 정신적인 역할만을 강조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를 두고 ‘명의’라고 부르긴 힘들 것이다. 수많은 전문의들이 ‘이 시대의 명의’라는 타이틀을 붙여줄 정도의 인물이라면, 의사 장기려는 무언가 달랐던 게 분명해 보인다.
▲ ‘복음병원장’ 시절 입원환자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는 장기려
장기려 박사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정작 당사자는 그 사실을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의술(醫術)을 향한 열의는 대단했다. 6.25가 발발하여 부산에 내려온 뒤, 장기려는 부산 복음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서울대 의대에선 1959년부터 장기려에게 교수로 와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근무하던 복음병원을 포기할 수 없어 고사하던 장기려는 1961년 서울대 의대 교수직을 수락했다. 이유는, 당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로 돌아온 후배 민병철에게 미국 의학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서울대에서만 근무한 건 아니었다. 그가 그만큼 ‘의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갔다는 걸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간의 부분 절제와 대량 절제술’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63세였던 1974년에는 ‘한국 간연구회 창립 및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 내가 환자 자신이라면…
그러나 그가 단순히 ‘의술’에 탁월한 의사였다면, ‘마지막 성자’,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의 수식어가 그에게 붙진 않았을 거다. 그는 탁월한 의술 그 이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환자들을 대했다. 그 가치관을 대변하는 한 문장은 바로 ‘내가 환자 자신이라면……’이었다.
지강유철이 저술한 <장기려, 그 사람>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선생은 자신이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로 어려서부터 가졌던 “자신과 남을 동일화시켜보는 습성”을 꼽는다. 대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서 성서 속의 요셉이나 다윗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처럼 되고 싶어 기도했던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좋은 의사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세례를 받고 난 후 줄곧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부산의대 교수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장기려는 부산대학병원 서북쪽 판잣집에 방치되어 있는 8명의 행려병자들을 발견하게 됐다.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의사들과 일정한 회비를 거둬 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 장기려는 행려병자들을 찾아가 치료는 물론 손톱도 깎아주고 몸도 닦아 주었다. 장기려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지 고민하다가 복음병원 의사들을 현장에 보냈다. 결국, 현장에 갔던 의사 및 간호사들 역시 행려병자들을 복음병원으로 데려오는 데 동의하고 그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장기려를 둘러싼 이야기는 차고 넘쳐난다. 병원비를 못 내 퇴원을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가불받아 대신 내주기도 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몰래 환자의 도피를 돕기도 하였다. 영양실조로 병원을 찾은 이에겐 ‘밥값’을 처방했다. 어쩌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꿈꾸는 ‘저 먼 곳에 있는 의사의 모습’에 아주 가까운 사람이 바로 장기려였다.
# 신앙인 장기려
장기려는 ‘의사’이기에 앞서 ‘신앙인’이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의 거대한 흐름이나 주류에 편승해서 자신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데는 관심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그의 나이 마흔여섯 때 만든 ‘부산모임’이었다. 장기려는 부산의대 교수 시절, 성서연구를 위한 부산모임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에 시작하여 일흔여덟까지 계속한 모임이었다. 모임의 시작은, 부산의대 외과교실원들에게 예수를 믿게 하려는 장기려의 소박한 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기려의 소박한 동기는, 알찬 열매로 이어졌다. 부산모임이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부산모임은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색을 강화하여, 자신만의 신앙적 울타리를 견고히 세우려는 모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모임은 동일한 신앙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동질성을 강화하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당시 부산모임에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부산모임은 무교회 신앙을 공부했고, 기독교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키워갔다.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부산 모임 자체가 무교회주의자들의 모임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불교의 스님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교파를 초월할 뿐 아니라 타 종교에까지 열려 있었던 셈이다. 당시 부산모임은 한국 기독교의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영역의 주류가 그렇듯, 한국 기독교의 주류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지만, 더 넓은 차원의 ‘진리’를 탐구하는 데 아무래도 소홀했다. 장기려가 시작한 ‘부산 모임’은 종교성의 강화가 아닌, ‘신앙을 통한 실질적인’ 열매를 강조했다는 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장기려 자체가 ‘종교성’에 갖히지 않고, ‘기독교 종교 안에 담겨 있던 예수 정신’에 사로잡혀 살아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손홍규는 그가 저술한 <청년의사 장기려>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던진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십여 만 개의 종교가 탄생했다가 소멸해갔다. 오늘날 가장 신성한 장소는 은행이며 가장 신성한 숭배의 대상은 물질이다. 이것들의 위력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종교라고 해서 영속할 것이라는 장담은 누구도 할 수 없다. 몰락은 대체로 자멸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아갈 것이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기려 그는 종교의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기적이다. 종교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서 닿을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중략) 나는 독자에게 장기려를 닮아야 한다거나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렇게 실패해야 성공한다는 역설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나는 족하다”
# 진실, 사랑, 그리고 성실
그는 자신이 예수를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신앙적인 언어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였다. 기독교인에게 익숙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같은 단어들이 날것 그대로 비기독교인에게 전달되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장기려의 고민을 잘 담고 있는, <장기려, 그 사람>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선생은 세 가지 단어를 찾아냈다. ‘진실’과 ‘사랑’, 그리고 ‘성실’. 선생은 진실한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성실한 공동체라면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진실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에서 태어난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새벽 1시45분에 세상을 떠났다. 예수가 이 땅에 왔던 그 날, 예수처럼 살던 장기려는 이 땅을 떠났다. 죽음까지도, 장기려다운 역설로 가득했다.
▲ 외래진료 중인 장기려
# 아주 고될지도 모르는 장기려의 모범답안
우리는 가끔 ‘진짜’ 종교인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은 곧 ‘가슴 뜀’으로 이어진다. ‘나도 저렇게 한 번 살아봐야겠다’라는 다짐에서 오는 가슴 뜀이다. 내가 사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한 번 ‘진짜 삶’을 살아보고 싶다면, 장기려가 남기고 간 삶의 흔적들은 아주 모범적인 답을 제공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아주 고될지도 모르겠지만…
참고문헌
•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
• 손홍규, <청년의사 장기려>, 다산책방, 2018
필자_소재웅
작가이자 목회자, 목회자이자 작가. 한 사람이 걸어간 삶에 따뜻한 밑줄 하나 긋는 게 그가 가진 사명이다. 저서로 <긋플레이어>(부제: 내가 사랑한 선수들), , <전자슈터 김현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