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경’, 그리고 ‘반감’
레슬리 뉴비긴(1909-1998). 비기독교인 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레슬리 뉴비긴’이란 이름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보통, 당대에 이름을 충분히 날리는 성직자가 있는 반면 생후에 더욱더 그 이름이 빛나는 성직자가 있다. 레슬리 뉴비긴을 그 둘 중 굳이 한 군데에 분류시키자면, 후자에 가깝다. 뉴비긴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려낸 선교의 흔적과 신학의 흔적은 여전히 살아남아 후대 신학자들과 교회에 강렬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시대의 한계에 갇히곤 한다. 선한 뜻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성직자들조차도 시대의 공기를 흡수해야 생존할 수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시대를 바라본다는 건 고도의 예언자적 감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구약의 예언자들은, 시대의 한계가 아닌 ‘시대 너머 역사하는 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신이 당부하는 ‘올곧은 삶’을 살라고 대중들을 향해 외치던 존재들이었다. 레슬리 뉴비긴 역시 그러했다. 교회가 종교기관으로 몰락하고, 또 하나의 욕망의 도구로 전락할 때, 그는 예전자적 전통에 서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 선교사가 갖게 되는 전형적 이미지
영국 뉴캐슬에서 태어난 레슬리 뉴비긴은 1936년, 그의 나이 27세에 인도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러나 인도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리를 다쳐 에든버러로 돌아와야 했다. 1939년 다시 인도로 떠나 1946년까지 인도 칸치푸람 담당 선교사로 활동한 레슬리 뉴비긴은 다양한 교파로 구성되었던 인도의 교회들을 연합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칸치푸람에서 1946년까지 활동한 그는 에든버러로 돌아와 1년간 안식년을 가진 뒤, 남인도 교회의 주교로 임명되어, 다시 12년 동안 인도 마두라이에서 주교로 활동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은 1965년, 인도로 떠나 마드라스의 주교로 임명받아 10년간 사역을 마치고 영국 버밍엄으로 돌아왔다. 짧게 요약한 그의 선교 사역은 이러했다.
사실 기독교 선교사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전형적이다. 첫째, 기독교 진리에 깊이 감동한다. 둘째, 그 진리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셋째, 하지만 그 진리를 자신만 알고 있을 순 없다고 느낀다. 넷째, 그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나라를 넘어 더 먼 곳으로 가기로 한다. 이러한 전형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한다. 분명 좋은 의도로 갔지만, 선교사 본인이 어릴 적부터 흡수하며 체득한 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가지고 자신이 건너간 나라의 국민들을 깔보게 되는, 그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모습. 그게 바로 선교사를 향한 또 하나의 이미지다.
# 레슬리 뉴비긴의 건강한 선교 관점
레슬리 뉴비긴 역시 전형적인 선교사의 모습을 가지고 인도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를 향한 또 하나의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선교를 감당했다. 뉴비긴이 인도 선교사로 떠났을 때, 세상은 서구 제국주의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로서 인도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뉴비긴의 자서전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우리가 맨 처음 받은 충격이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었다면, 두 번째 충격은 선교사들과 인도인 동료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왔다… 당시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예로, 내 일기장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선교사들과 인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신약성경으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진 듯이 보인다.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을 영적으로 도와주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격려의 말 한 마디 건네는 일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주인처럼 자동차를 몰면서 길에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진흙 세례를 주고 일종의 감사를 실시하여 모든 잘못을 들춰내고, 모든 사람의 역량을 시험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차렷 자세를 취하고, 나리(Sir) 하면서 존칭어를 사용한다. 참으로 끔직한 일이다.”
뉴비긴은, 보통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훈련한 인도인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위임하기 싫어한다는 점을 아주 근본적인 문제로 보았다. 거기엔 서양 선교사 특유의 인도인을 향한 (건강하지 못한) 우월감이 있고, ‘인도인은 이러한 책임을 맡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뉴비긴은 ‘책임을 타인에게 넘겨줄 수 있는 능력’과 ‘인도인들의 리더십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뉴비긴이 판단하기에, 선교사 진영은 인도인들을 친밀한 교제권에서 배제시키고 있었다.
# 교회 연합을 향한 레슬리 뉴비긴의 분투
뉴비긴이 인도 선교지에 발견한 또 하나의 주요한 장애물은 ‘교회의 분열된 모습’이었다. 뉴비긴이 사역했던 남인도 지역에는 여러 선교회들이 진출하여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거기서 뉴비긴이 보게 된 건 교회들이 연합하여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교회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사실 이건 이미 서구 기독교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뉴비긴은 자신이 선교하던 남인도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던 성공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의 연합 과정에 참여하여 1947년 남인도교회라는 하나의 교회를 세웅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 연합을 향한 뉴비긴의 열정은 단순히 선교지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후 교회 연합을 향한 세계적 움직임에도 이식되었다. 교회 연합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연합되어야 비로소 기독교 진리가 단순히 기독교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밖으로 퍼져나가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한 소리다. 특정 종교의 ‘분열’에서는 도저히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없다. 좀 더 냉정히 말해, ‘진리’를 내세우며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진리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 인도 선교사 시절의 레슬리 뉴비긴
#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 철학
선교를 향한 뉴비긴의 건강한 관점, 분열된 교회가 아닌 교회의 연합을 향한 뉴비긴의 분투, 여기엔 ‘교회’를 향한 뉴비긴의 건강한 철학이 담겨 있다. 아니, 그 반대로 교회를 향한 뉴비긴의 건강한 철학으로부터 뉴비긴의 ‘선교’와 ‘연합을 향한 분투’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선후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성직자의 행동은 인과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뉴비긴의 건강한 교회 철학이 담겨 있는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저는 항상 아주 명료한 요점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복음은 ‘진리’라는 것이고 따라서 ‘공적 진리’라는 것이죠. 복음은 사적인 의견이 아니라 공적 진리이며 따라서 반드시 중대한 공적 논의들의 일부분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문화에서 자기 충족적 진리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린 진리를 드러내야만 합니다. 어떤 성직자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화가 났었는데 그 성직자는, ‘교회의 세상’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진짜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짜 세상에 나가본다면…’ 이런 식으로요.”
뉴비긴은 사유화된 진리,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진리’는 진정한 기독교 진리라고 보지 않았다. 쉽게 말해, 교회의 기쁨이 오직 교회의 기쁨으로만 끝난다면, 교회의 잔치가 오직 교회만의 잔치로 끝난다면, 과연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구도 반응하지 않고, 오직 기독교인만이 반응하고 있다면,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교회 안에 가득한 이분법적 구분. 교회, 그리고 교회 밖 세상. 교회 안 세상과 교회 밖 세상을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바라보는 일부 성직자들의 시각에 뉴비긴은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뉴비긴의 관점은 인도 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더욱 생생하게 형성되었다. 영국의 수많은 교회들은 생명력을 잃고 있었고, 영국 사회에 그리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자신의 저서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를 통해 이야기한다.
“전도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다시 말해 세상으로 파송 받은 교회가 말해야 하는 그 이야기는, 공공의 삶에 군림하는 가정(假定)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이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결단으로의 초대인 동시에 총체적인 사회생활을 위해서도 사실로 인정되어야 하는 공공의 진리임을 확언하는 것이다.”
뉴비긴의 관점에 따르면, 교회는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참여해야 한다. 더불어, 교회가 굳게 서있어야 할 위치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들이 있는 곳이다. 이건 단순히 뉴비긴의 말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예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1998년 1월 30일, 세상을 떠난 뉴비긴에게는 다음과 같은 추모사가 남겨졌다.
“소망이 사라져 비틀거리는 시대에 그는, 깊어져 가는 어둠을 향해 부활의 등불을 흔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레슬리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그가 남긴 작별인사는 하나의 요청이며, 또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참고문헌
• 레슬리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복 있는 사람, 2011
• 레슬리 뉴비긴,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SFC, 2008
| 필자_소재웅 작가이자 목회자, 목회자이자 작가. 한 사람이 걸어간 삶에 따뜻한 밑줄 하나 긋는 게 그가 가진 사명이다. 저서로 <긋플레이어>(부제: 내가 사랑한 선수들), , <전자슈터 김현준> 등이 있다. |
# ‘동경’, 그리고 ‘반감’
레슬리 뉴비긴(1909-1998). 비기독교인 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레슬리 뉴비긴’이란 이름은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보통, 당대에 이름을 충분히 날리는 성직자가 있는 반면 생후에 더욱더 그 이름이 빛나는 성직자가 있다. 레슬리 뉴비긴을 그 둘 중 굳이 한 군데에 분류시키자면, 후자에 가깝다. 뉴비긴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려낸 선교의 흔적과 신학의 흔적은 여전히 살아남아 후대 신학자들과 교회에 강렬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시대의 한계에 갇히곤 한다. 선한 뜻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성직자들조차도 시대의 공기를 흡수해야 생존할 수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시대를 바라본다는 건 고도의 예언자적 감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구약의 예언자들은, 시대의 한계가 아닌 ‘시대 너머 역사하는 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 신이 당부하는 ‘올곧은 삶’을 살라고 대중들을 향해 외치던 존재들이었다. 레슬리 뉴비긴 역시 그러했다. 교회가 종교기관으로 몰락하고, 또 하나의 욕망의 도구로 전락할 때, 그는 예전자적 전통에 서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 선교사가 갖게 되는 전형적 이미지
영국 뉴캐슬에서 태어난 레슬리 뉴비긴은 1936년, 그의 나이 27세에 인도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러나 인도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리를 다쳐 에든버러로 돌아와야 했다. 1939년 다시 인도로 떠나 1946년까지 인도 칸치푸람 담당 선교사로 활동한 레슬리 뉴비긴은 다양한 교파로 구성되었던 인도의 교회들을 연합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칸치푸람에서 1946년까지 활동한 그는 에든버러로 돌아와 1년간 안식년을 가진 뒤, 남인도 교회의 주교로 임명되어, 다시 12년 동안 인도 마두라이에서 주교로 활동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레슬리 뉴비긴은 1965년, 인도로 떠나 마드라스의 주교로 임명받아 10년간 사역을 마치고 영국 버밍엄으로 돌아왔다. 짧게 요약한 그의 선교 사역은 이러했다.
사실 기독교 선교사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전형적이다. 첫째, 기독교 진리에 깊이 감동한다. 둘째, 그 진리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결심한다. 셋째, 하지만 그 진리를 자신만 알고 있을 순 없다고 느낀다. 넷째, 그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나라를 넘어 더 먼 곳으로 가기로 한다. 이러한 전형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한다. 분명 좋은 의도로 갔지만, 선교사 본인이 어릴 적부터 흡수하며 체득한 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가지고 자신이 건너간 나라의 국민들을 깔보게 되는, 그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모습. 그게 바로 선교사를 향한 또 하나의 이미지다.
# 레슬리 뉴비긴의 건강한 선교 관점
레슬리 뉴비긴 역시 전형적인 선교사의 모습을 가지고 인도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를 향한 또 하나의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선교를 감당했다. 뉴비긴이 인도 선교사로 떠났을 때, 세상은 서구 제국주의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로서 인도 현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뉴비긴의 자서전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우리가 맨 처음 받은 충격이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었다면, 두 번째 충격은 선교사들과 인도인 동료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왔다… 당시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예로, 내 일기장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선교사들과 인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신약성경으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진 듯이 보인다.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을 영적으로 도와주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격려의 말 한 마디 건네는 일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주인처럼 자동차를 몰면서 길에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 진흙 세례를 주고 일종의 감사를 실시하여 모든 잘못을 들춰내고, 모든 사람의 역량을 시험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차렷 자세를 취하고, 나리(Sir) 하면서 존칭어를 사용한다. 참으로 끔직한 일이다.”
뉴비긴은, 보통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훈련한 인도인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위임하기 싫어한다는 점을 아주 근본적인 문제로 보았다. 거기엔 서양 선교사 특유의 인도인을 향한 (건강하지 못한) 우월감이 있고, ‘인도인은 이러한 책임을 맡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뉴비긴은 ‘책임을 타인에게 넘겨줄 수 있는 능력’과 ‘인도인들의 리더십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뉴비긴이 판단하기에, 선교사 진영은 인도인들을 친밀한 교제권에서 배제시키고 있었다.
# 교회 연합을 향한 레슬리 뉴비긴의 분투
뉴비긴이 인도 선교지에 발견한 또 하나의 주요한 장애물은 ‘교회의 분열된 모습’이었다. 뉴비긴이 사역했던 남인도 지역에는 여러 선교회들이 진출하여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거기서 뉴비긴이 보게 된 건 교회들이 연합하여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교회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사실 이건 이미 서구 기독교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뉴비긴은 자신이 선교하던 남인도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던 성공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의 연합 과정에 참여하여 1947년 남인도교회라는 하나의 교회를 세웅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교회 연합을 향한 뉴비긴의 열정은 단순히 선교지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후 교회 연합을 향한 세계적 움직임에도 이식되었다. 교회 연합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연합되어야 비로소 기독교 진리가 단순히 기독교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밖으로 퍼져나가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한 소리다. 특정 종교의 ‘분열’에서는 도저히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없다. 좀 더 냉정히 말해, ‘진리’를 내세우며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진리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 인도 선교사 시절의 레슬리 뉴비긴
#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 철학
선교를 향한 뉴비긴의 건강한 관점, 분열된 교회가 아닌 교회의 연합을 향한 뉴비긴의 분투, 여기엔 ‘교회’를 향한 뉴비긴의 건강한 철학이 담겨 있다. 아니, 그 반대로 교회를 향한 뉴비긴의 건강한 철학으로부터 뉴비긴의 ‘선교’와 ‘연합을 향한 분투’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선후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성직자의 행동은 인과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뉴비긴의 건강한 교회 철학이 담겨 있는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저는 항상 아주 명료한 요점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복음은 ‘진리’라는 것이고 따라서 ‘공적 진리’라는 것이죠. 복음은 사적인 의견이 아니라 공적 진리이며 따라서 반드시 중대한 공적 논의들의 일부분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문화에서 자기 충족적 진리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린 진리를 드러내야만 합니다. 어떤 성직자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화가 났었는데 그 성직자는, ‘교회의 세상’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진짜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짜 세상에 나가본다면…’ 이런 식으로요.”
뉴비긴은 사유화된 진리,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진리’는 진정한 기독교 진리라고 보지 않았다. 쉽게 말해, 교회의 기쁨이 오직 교회의 기쁨으로만 끝난다면, 교회의 잔치가 오직 교회만의 잔치로 끝난다면, 과연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구도 반응하지 않고, 오직 기독교인만이 반응하고 있다면,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교회 안에 가득한 이분법적 구분. 교회, 그리고 교회 밖 세상. 교회 안 세상과 교회 밖 세상을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바라보는 일부 성직자들의 시각에 뉴비긴은 반기를 들었다. 이러한 뉴비긴의 관점은 인도 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와서 더욱 생생하게 형성되었다. 영국의 수많은 교회들은 생명력을 잃고 있었고, 영국 사회에 그리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비긴은 자신의 저서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를 통해 이야기한다.
“전도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다시 말해 세상으로 파송 받은 교회가 말해야 하는 그 이야기는, 공공의 삶에 군림하는 가정(假定)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이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결단으로의 초대인 동시에 총체적인 사회생활을 위해서도 사실로 인정되어야 하는 공공의 진리임을 확언하는 것이다.”
뉴비긴의 관점에 따르면, 교회는 끊임없이 밖으로 나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참여해야 한다. 더불어, 교회가 굳게 서있어야 할 위치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들이 있는 곳이다. 이건 단순히 뉴비긴의 말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예수의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1998년 1월 30일, 세상을 떠난 뉴비긴에게는 다음과 같은 추모사가 남겨졌다.
“소망이 사라져 비틀거리는 시대에 그는, 깊어져 가는 어둠을 향해 부활의 등불을 흔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레슬리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그가 남긴 작별인사는 하나의 요청이며, 또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명령으로 다가옵니다.”
참고문헌
• 레슬리 뉴비긴, <아직 끝나지 않은 길>, 복 있는 사람, 2011
• 레슬리 뉴비긴, <복음, 공공의 진리를 말하다>, SFC, 2008
필자_소재웅
작가이자 목회자, 목회자이자 작가. 한 사람이 걸어간 삶에 따뜻한 밑줄 하나 긋는 게 그가 가진 사명이다. 저서로 <긋플레이어>(부제: 내가 사랑한 선수들), , <전자슈터 김현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