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회장님은 잘 지내고 계세요?”
보통 사제가 본당에 부임해서 인사를 드리면 신자들은 새로온 신부님 예전 어느 본당에 있었는지 그 전임지를 궁금해 하신다. 그중에 신학생으로 사제가 될 때까지 소속을 두고 양성을 받은 성당을 출신본당이라고 하는데 필자의 출신본당은 서울 행당동이다. 이곳 워싱턴에 도착하고 신자분들께 인사를 드리는데 연세가 많으신 아녜스 할머니께서 당신이 40년 전 행당동 성당에 다니시다 이곳에 이민을 오셨다며 고향사람을 만난 것 같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셨다. 필자도 어찌나 반가운지..... 사실 올해 필자가 마흔살이기에 40년 전이면 태어나기도 전이라 갓난아기 어머니 품에 안겨 성당을 다녔으니 아마 할머니는 성당안에서 울리는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억의 옛날 성당 얘기를 주고 받는데 할머니께서 문득 하시는 질문이 “예전에 내가 행당동 다닐 때 사무실에 사무장으로 근무하신 장 회장님이 참 성당을 잘 보살펴 주셨는데 지금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세상에...... 잠시 시계를 돌려보자면 지금 여든은 가뿐히 넘으신 아녜스 할머니에게 40년 전이면, 그 당시 사무장님으로 계셨던 장회장님의 연세는 50대 중반은 넘으실 즈음. 2019년이면 아흔이 넘으신 연세이신데...... 장회장님은 그간 성당을 잘 돌보아 주셨고 오래전에 선종하셨다는 말씀을 드리니 할머니는 장회장님의 선종소식에 너무나 아쉬워 하셨다. 그와 중에 할머니의 질문과 설레이는 표정을 가만히 뵈니 문득 느낌이 드는 것이, 할머니는 당신이 마흔살에 뵈었던 55살의 장회장님을 지금도 55세의 연세로 기억을 하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 연세보다 훨씬 많으신 장회장님이 40년이 지난 지금 살아 계시기는 쉽지 않은 연세일텐데 할머니 기억속에는 미국으로 이민가는 출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부터 장회장님과 행당동 성당에 대한 추억의 시계가 그날로 멈추어 있던것은 아닐까?
▲ 해질녘 성당 전경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미국에 교포 성당으로 발령을 받고 이민생활을 겪어보신 신자분들께 들은 많은 이야기 중에 공통된 주제가 “이민을 떠난 사람들은 이민을 온 그 시점에 생각이 사고가 멈춰 있습니다.” 라는 말이었다. 실제 우리 성당에 연세있는 어른 신자분들께서도 이 말을 직접 필자에게 해주시는 것을 듣고 많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님 저희는 이민을 온 그 시점에 정서가 딱! 멈추어 있습니다.” 70년대에 오신 분들은 한국의 70년대 사고방식으로, 80년대는 80년대, 90년대는 90년대라는 방식으로 각자 그 시대로 지금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지 종종 신자분들의 건의사항에도 여러 시대별로 멈춰진 사고방식이 섞이다 보니 그 다양함을 아우르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를 적지 않게 올라온다. 사실 가만히 들어보면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다. 각자 한국에서 다른 시대를 살다 미국으로 건너 오시면서 고국의 정서와 문화에 단절된 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민생활을 시작하셨으니 한국적인 정서의 시계는 출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부터 충분히 멈출 수 있다는 것.
▲ 드론으로 찍은 성당 전경
일장일단(一長一短)
“멈추어 있다” “고여 있다” “변화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바쁘게 살아가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그리 좋은 의미로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정서가 멈추어 있다는 것은 일장일단(一長一短)의 측면으로 보인다. 모든 세대가 어떻게든 소통하고 일치해서 2019년이라는 하나의 시대와 통일된 정서의 용광로에 모두를 담기보다는 각자 살아온 시대를 존중하며 그 정서안에 담겨있는 장점을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아닐까? 의외로 필자가 보기에는 이곳에 신자분들이 각자 다른 시대를 살고 오셔서 서로 세대간에 갈등이 없지는 않지만 분명히 감동적인 것은 미국적인 다양함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대한 영향으로 서로의 다름을 다양함으로 인정해주는 더 넓은 아량을 종종 접하게 된다. 옷깃이 스치기는 커녕 스칠 것 같기만 해도 “Sorry”가 나오는 미국문화에서 어른세대가 젊은 세대들을 보며 “그러려니...” 하시고 젊은 세대는 어른들의 너그로운 모습을 보며 존경을 표하는 것은 한국적인 예의와 미국적인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는 시너지의 열매일 것이다.
▲ 눈덮힌 날 드론으로 찍은 성당 전경
미국속에 토착화된 한국 가톨릭 신앙
이런 다양함에 존중을 바탕으로 각자 살아온 정서가 고요히 보존되면서 보존된 정서가 신앙생활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온다. 미국 현지의 가톨릭교회는 매우 크다. 이곳 워싱턴과 동중부의 현지 성당도 대부분 성당안에 사립학교를 같이 운영하고 있기에 그 규모도 상당하다. 그렇게 큰 교회들 안에서 한인 성당은 정말 작은 커뮤니티에 불과하고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현지 교구와 성당에서 잘 터치하지 않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만의 신앙생활을 많은 부분 보장받고 있다. 한국인들이 미국땅에 한국성당을 설립해서 한국어로 한국식으로 미사에 참례하며 한국식 신앙생활을 온전히 지켜갈 수 있으니 참 대견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 덕분에 많은 신자분들이 가진 각자 다양한 정서안에 담긴 신앙이 우리들 나름대로 보존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천주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예식인 미사는 그 원형은 변하지 않지만 신자분들이 참례하는 자세와 형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그렇게 변하는 다양성을 로마교회는 인정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 성당에는 한국과는 다른 우리 워싱턴 성당만에 미사 참례와 신앙생활의 모습을 간직하신 분들을 만나 뵐 수 있다. 이민 오신지 수십년이 되어 그 수십년전 한국에서 미사 참례하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있고 이런 보면 신학생 시절 전례학 교과서에서 보던 오래전 신자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어색하기도 하다. 또 우리 성당 신앙공동체는 어떤 제도나 형식이 한번 갖춰지면 쉽게 변형되거나 퇴색되지 않고 어떻게든 시작된 그 모습을 유지해 나아가는 힘이 있다. 서울시를 관할로 하는 서울대교구만 해도 200개가 넘는 성당이 있고 각 동마다 소재한 성당은 옆동네 성당에 걸어서 갈수 있는 인접성이 있다. 그래서 각 성당마다 여러 지역의 신자들이 오가며 내적인 신심과 외적인 형식이 서로 교류되며 작은 동네 성당만의 케릭터가 있고 그 케릭터는 신자들의 이동과 교류를 통해 보이지 않는 변화들이 이루어 진다.
▲ 2018년 성탄 미사
그런데 우리 성당은 전체 관할 구역만 해도 서울시와 경기도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고 근처에 다른 한국 성당에 가려거든 막히지 않는 도로로 1시간은 넉넉히 달려야 하니 다른 한국 성당과의 색다른 교류는 현실적으로 거리상으로도 쉽지 않은 편이다. (우리 성당과 가장 교류가 많은 버지니아 성당이 주(州)부터가 다르고 거리로도 90km가까이 된다) 마치 미국 속에 놓여있는 한국 가톨릭 신자들만의 섬이라고 할까? 그러니 우리 성당 신자분들이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마음에 품고 들어온 신앙생활이 그대로 보존되는 곳이기에 그분들이 각 시대별로 품고 건너온 정서만큼 그 신앙과 신심도 다양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마무리 글. “한국인 + 그리스도인”
이렇게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각기 다른 정서와 그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만의 신앙생활을 살아가기에 이 넓고 넓은 미국 땅에서 우리만의 신앙과 삶의 터전은 더없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주일 오전 시간, 한 주를 기다렸다는 듯이 환한 미소와 반가운 인사로 성당문을 들어오시는 신자분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 “우리 신자분들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그리 소중하시기에 성당에 나오실까?” 미국이 공공의료 서비스에 대한 어려움을 제외하면 세계 1위 초 강대국답게 안정된 정치와 튼튼한 경제구조, 물가와 교육까지 부족할 것 없이 사시는 분들이 성당을 열심히 나오신다. 필자는 교리와 강론 중에 인간이 신을 향하는 종교심에 대한 설명을 하며 여행 중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의 승객들과 응급실에 환자중에는 무신론자가 없다고 종종 얘기한다. 사람이 힘들고 어려우면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절대적인 신의 도움을 바라기 마련이기에 어렵고 고된 삶 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하고 그 종교인들의 믿음은 매우 두터워진다. 그런 삶에 고단함 보다는 삶의 여유 안에서 열심한 신앙생활과 끈끈한 교우관계를 보면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찾고 삶속에서는 사람과 함께사는 공동체를 바라는 마음이 매주 성당을 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라 생각된다.
▲ 해질녁 노을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서울에서야 이 성당이 여의치 않으면 걸어서 옆 동네 성당으로 가도 되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이상 성당은 오직 이곳 한곳이니 그런 지역적인 한계가 우리 신자들의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맺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아무리 미워도 우리 한국사람이고 같은 아무리 불편해도 같은 신앙을 가지고 “천국행”이라는 한 배를 탄 그리스도인이다. 살아도 이곳에 살고 죽어도 먼저 떠난 교우를 위해 같이 기도해주며 그 마지막 장지까지 함께하는 끈끈한 친교와 정이 이번 한주도 우리 신자분들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일 것이다.
치열하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한국생활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 건물에 월세 받으며 늙어서도 먹고사는 걱정 없는 삶을 인생의 합리화된 목표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성당 신자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보며 사회적 지위, 부유한 삶, 안정된 노후 그 무엇보다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그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사람에게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가장 소중합니다.”
필자_김윤욱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사당동, 화곡본동, 미아동 성당에서 사목
현재 워싱턴 대교구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성당 소임 중
“장 회장님은 잘 지내고 계세요?”
보통 사제가 본당에 부임해서 인사를 드리면 신자들은 새로온 신부님 예전 어느 본당에 있었는지 그 전임지를 궁금해 하신다. 그중에 신학생으로 사제가 될 때까지 소속을 두고 양성을 받은 성당을 출신본당이라고 하는데 필자의 출신본당은 서울 행당동이다. 이곳 워싱턴에 도착하고 신자분들께 인사를 드리는데 연세가 많으신 아녜스 할머니께서 당신이 40년 전 행당동 성당에 다니시다 이곳에 이민을 오셨다며 고향사람을 만난 것 같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셨다. 필자도 어찌나 반가운지..... 사실 올해 필자가 마흔살이기에 40년 전이면 태어나기도 전이라 갓난아기 어머니 품에 안겨 성당을 다녔으니 아마 할머니는 성당안에서 울리는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억의 옛날 성당 얘기를 주고 받는데 할머니께서 문득 하시는 질문이 “예전에 내가 행당동 다닐 때 사무실에 사무장으로 근무하신 장 회장님이 참 성당을 잘 보살펴 주셨는데 지금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세상에...... 잠시 시계를 돌려보자면 지금 여든은 가뿐히 넘으신 아녜스 할머니에게 40년 전이면, 그 당시 사무장님으로 계셨던 장회장님의 연세는 50대 중반은 넘으실 즈음. 2019년이면 아흔이 넘으신 연세이신데...... 장회장님은 그간 성당을 잘 돌보아 주셨고 오래전에 선종하셨다는 말씀을 드리니 할머니는 장회장님의 선종소식에 너무나 아쉬워 하셨다. 그와 중에 할머니의 질문과 설레이는 표정을 가만히 뵈니 문득 느낌이 드는 것이, 할머니는 당신이 마흔살에 뵈었던 55살의 장회장님을 지금도 55세의 연세로 기억을 하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 연세보다 훨씬 많으신 장회장님이 40년이 지난 지금 살아 계시기는 쉽지 않은 연세일텐데 할머니 기억속에는 미국으로 이민가는 출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부터 장회장님과 행당동 성당에 대한 추억의 시계가 그날로 멈추어 있던것은 아닐까?
▲ 해질녘 성당 전경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미국에 교포 성당으로 발령을 받고 이민생활을 겪어보신 신자분들께 들은 많은 이야기 중에 공통된 주제가 “이민을 떠난 사람들은 이민을 온 그 시점에 생각이 사고가 멈춰 있습니다.” 라는 말이었다. 실제 우리 성당에 연세있는 어른 신자분들께서도 이 말을 직접 필자에게 해주시는 것을 듣고 많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부님 저희는 이민을 온 그 시점에 정서가 딱! 멈추어 있습니다.” 70년대에 오신 분들은 한국의 70년대 사고방식으로, 80년대는 80년대, 90년대는 90년대라는 방식으로 각자 그 시대로 지금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지 종종 신자분들의 건의사항에도 여러 시대별로 멈춰진 사고방식이 섞이다 보니 그 다양함을 아우르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를 적지 않게 올라온다. 사실 가만히 들어보면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다. 각자 한국에서 다른 시대를 살다 미국으로 건너 오시면서 고국의 정서와 문화에 단절된 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민생활을 시작하셨으니 한국적인 정서의 시계는 출국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부터 충분히 멈출 수 있다는 것.
▲ 드론으로 찍은 성당 전경
일장일단(一長一短)
“멈추어 있다” “고여 있다” “변화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바쁘게 살아가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그리 좋은 의미로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정서가 멈추어 있다는 것은 일장일단(一長一短)의 측면으로 보인다. 모든 세대가 어떻게든 소통하고 일치해서 2019년이라는 하나의 시대와 통일된 정서의 용광로에 모두를 담기보다는 각자 살아온 시대를 존중하며 그 정서안에 담겨있는 장점을 살아갈 수 있으면 그것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아닐까? 의외로 필자가 보기에는 이곳에 신자분들이 각자 다른 시대를 살고 오셔서 서로 세대간에 갈등이 없지는 않지만 분명히 감동적인 것은 미국적인 다양함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대한 영향으로 서로의 다름을 다양함으로 인정해주는 더 넓은 아량을 종종 접하게 된다. 옷깃이 스치기는 커녕 스칠 것 같기만 해도 “Sorry”가 나오는 미국문화에서 어른세대가 젊은 세대들을 보며 “그러려니...” 하시고 젊은 세대는 어른들의 너그로운 모습을 보며 존경을 표하는 것은 한국적인 예의와 미국적인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는 시너지의 열매일 것이다.
▲ 눈덮힌 날 드론으로 찍은 성당 전경
미국속에 토착화된 한국 가톨릭 신앙
이런 다양함에 존중을 바탕으로 각자 살아온 정서가 고요히 보존되면서 보존된 정서가 신앙생활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온다. 미국 현지의 가톨릭교회는 매우 크다. 이곳 워싱턴과 동중부의 현지 성당도 대부분 성당안에 사립학교를 같이 운영하고 있기에 그 규모도 상당하다. 그렇게 큰 교회들 안에서 한인 성당은 정말 작은 커뮤니티에 불과하고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현지 교구와 성당에서 잘 터치하지 않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만의 신앙생활을 많은 부분 보장받고 있다. 한국인들이 미국땅에 한국성당을 설립해서 한국어로 한국식으로 미사에 참례하며 한국식 신앙생활을 온전히 지켜갈 수 있으니 참 대견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 덕분에 많은 신자분들이 가진 각자 다양한 정서안에 담긴 신앙이 우리들 나름대로 보존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천주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예식인 미사는 그 원형은 변하지 않지만 신자분들이 참례하는 자세와 형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그렇게 변하는 다양성을 로마교회는 인정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 성당에는 한국과는 다른 우리 워싱턴 성당만에 미사 참례와 신앙생활의 모습을 간직하신 분들을 만나 뵐 수 있다. 이민 오신지 수십년이 되어 그 수십년전 한국에서 미사 참례하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있고 이런 보면 신학생 시절 전례학 교과서에서 보던 오래전 신자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어색하기도 하다. 또 우리 성당 신앙공동체는 어떤 제도나 형식이 한번 갖춰지면 쉽게 변형되거나 퇴색되지 않고 어떻게든 시작된 그 모습을 유지해 나아가는 힘이 있다. 서울시를 관할로 하는 서울대교구만 해도 200개가 넘는 성당이 있고 각 동마다 소재한 성당은 옆동네 성당에 걸어서 갈수 있는 인접성이 있다. 그래서 각 성당마다 여러 지역의 신자들이 오가며 내적인 신심과 외적인 형식이 서로 교류되며 작은 동네 성당만의 케릭터가 있고 그 케릭터는 신자들의 이동과 교류를 통해 보이지 않는 변화들이 이루어 진다.
▲ 2018년 성탄 미사
그런데 우리 성당은 전체 관할 구역만 해도 서울시와 경기도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고 근처에 다른 한국 성당에 가려거든 막히지 않는 도로로 1시간은 넉넉히 달려야 하니 다른 한국 성당과의 색다른 교류는 현실적으로 거리상으로도 쉽지 않은 편이다. (우리 성당과 가장 교류가 많은 버지니아 성당이 주(州)부터가 다르고 거리로도 90km가까이 된다) 마치 미국 속에 놓여있는 한국 가톨릭 신자들만의 섬이라고 할까? 그러니 우리 성당 신자분들이 이민 오기 전 한국에서 마음에 품고 들어온 신앙생활이 그대로 보존되는 곳이기에 그분들이 각 시대별로 품고 건너온 정서만큼 그 신앙과 신심도 다양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마무리 글. “한국인 + 그리스도인”
이렇게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각기 다른 정서와 그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만의 신앙생활을 살아가기에 이 넓고 넓은 미국 땅에서 우리만의 신앙과 삶의 터전은 더없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주일 오전 시간, 한 주를 기다렸다는 듯이 환한 미소와 반가운 인사로 성당문을 들어오시는 신자분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 “우리 신자분들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그리 소중하시기에 성당에 나오실까?” 미국이 공공의료 서비스에 대한 어려움을 제외하면 세계 1위 초 강대국답게 안정된 정치와 튼튼한 경제구조, 물가와 교육까지 부족할 것 없이 사시는 분들이 성당을 열심히 나오신다. 필자는 교리와 강론 중에 인간이 신을 향하는 종교심에 대한 설명을 하며 여행 중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의 승객들과 응급실에 환자중에는 무신론자가 없다고 종종 얘기한다. 사람이 힘들고 어려우면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절대적인 신의 도움을 바라기 마련이기에 어렵고 고된 삶 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하고 그 종교인들의 믿음은 매우 두터워진다. 그런 삶에 고단함 보다는 삶의 여유 안에서 열심한 신앙생활과 끈끈한 교우관계를 보면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찾고 삶속에서는 사람과 함께사는 공동체를 바라는 마음이 매주 성당을 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라 생각된다.
▲ 해질녁 노을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서울에서야 이 성당이 여의치 않으면 걸어서 옆 동네 성당으로 가도 되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이상 성당은 오직 이곳 한곳이니 그런 지역적인 한계가 우리 신자들의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맺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아무리 미워도 우리 한국사람이고 같은 아무리 불편해도 같은 신앙을 가지고 “천국행”이라는 한 배를 탄 그리스도인이다. 살아도 이곳에 살고 죽어도 먼저 떠난 교우를 위해 같이 기도해주며 그 마지막 장지까지 함께하는 끈끈한 친교와 정이 이번 한주도 우리 신자분들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일 것이다.
치열하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한국생활에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 건물에 월세 받으며 늙어서도 먹고사는 걱정 없는 삶을 인생의 합리화된 목표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성당 신자분들의 신앙과 삶을 지켜보며 사회적 지위, 부유한 삶, 안정된 노후 그 무엇보다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그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사람에게
사람이 가장 소중하고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가장 소중합니다.”
필자_김윤욱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사당동, 화곡본동, 미아동 성당에서 사목
현재 워싱턴 대교구 성 김대건 안드레아 한인성당 소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