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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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클래식] 브람스와 리스트, 헝가리 음악에서 만나다. (오지희)

2021-10-22

- 브람스 헝가리 무곡,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동유럽에 자리잡고 있어 멀게만 느껴졌던 헝가리가 요즘처럼 자주 회자된 적이 없는 것 같다.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사고로 양쪽 국가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6월 말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케스트라가 내한해 음악을 통해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음악은 분명 상처를 아물게 하고 희망과 기쁨을 불어넣는 놀라운 효과가 있다. 클래식 음악사에서 공식적으로 헝가리 이름이 들어간 작품을 쓴 음악가로는 낭만주의 시기 두 거장 브람스와 리스트가 있다. 19세기 동시대인이면서도 가장 대조적인 성향을 지녀 서로가 대척점에 서있었던 이 두 작곡가는 의외로 헝가리 음악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브람스는 헝가리 무곡, 리스트는 헝가리 랩소디를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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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요하네스 브람스 (1833~97) | (우)프란츠 리스트(1811~86)

독일 함부르크 출생의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97)는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브람스(1806~72)가 함부르크 필하모닉 협회에서 더블베이스를 연주하고 앙상블에서 호른을 담당하며 본인이 직접 아들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가르쳤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연주능력을 갖고 있었고 작곡에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던 아들은 가계를 돕기 위해 13세 때부터 레스토랑이나 선술집에서 유흥음악을 연주해야만 했다. 고생을 하긴 했어도 일찍이 대중적인 장소에서 다양한 대중음악을 접했던 경험은 브람스가 클래식 전통의 굳건한 수호자임과 동시에 민속 선율과 대중과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작품에 심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으로 작용했다. 브람스 음악이 고전 전통에 견고히 뿌리를 박고 있었던 데는 스승 막슨(E. Marxsen 1806~87)의 영향이 컸다. 막슨은 J.S.바흐, 하이든과 모차르트 음악의 숭배자였고 당대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잘 알고 있었다. 전통이 중요함을 작곡으로 가르쳤던 막슨의 생각은 브람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브람스는 과거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다. 실제 브람스가 작곡가로 성장하던 20세 무렵 연주회 레퍼토리는 이미 지나간 작곡가의 작품이 반 이상을 차지했고 40세가 됐을 때는 더 확대된 상태였다. 브람스는 청중의 취향이 영원히 계승되는 뛰어난 작품 위주로 형성됐음을 파악했기에 그 전통 위에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곡을 작곡하려고 노력했다. 르네상스 이래 고전시기에 이르는 클래식음악 본질에 정통했기에 과거 교회양식부터 즐겨 사용했던 헝가리 집시 음악까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요소는 브람스의 음악언어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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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요하네스 브람스 (1853) | (우)레메니와 브람스(1852)

브람스가 헝가리 무곡(Hungarian Dance)을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은 헝가리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의 만남 덕분이다. 1848년 헝가리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한 레메니(Ede Reményi 1828~98)는 독일에 와서 브람스와 친구가 됐다. 1852년 함부르크에서 레메니의 연주를 본 브람스는 크게 감동받아 1853년 같이 연주투어를 했다. 레메니로부터 자연스럽게 헝가리 음악과 집시 선율을 익힌 브람스는 아이디어를 떠올려 마침내 21개의 헝가리 무곡을 세상에 선보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헝가리 선율은 곧 집시음악으로 인식됐으며 간결함과 경쾌함, 우울감과 유머를 품은 브람스 헝가리 무곡은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레메니는 당황했다. 자신이 알려준 집시 선율로 작곡했으니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고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작곡이 아닌 편곡의 이름으로 발표했기에 브람스가 소송에서 이길 수 있었고 헝가리 무곡은 브람스 대표작으로 남게 됐다. 선율은 갖고 왔을지 몰라도 기존 아이디어에 누구나 들어도 공감할 전통 화성과 리듬을 멋지게 붙일 수 있는 건 순전히 작곡가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다.

한편 리스트(Franz Liszt 1811~86)는 지금은 오스트리아에 속하는 서부 헝가리 출신 음악가다. 아버지는 에스테르하치 궁정 장교이자 여러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던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리스트는 매우 영민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소리와 동작을 유심히 관찰하는 아이의 모습을 본 아버지가 아들에게 직접 피아노를 가르쳤다. 7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8세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9세 때 이미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성장할 재목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어린 리스트가 피아노 치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본 관객 중 부유한 후원자가 음악환경이 월등한 오스트리아 빈에서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을 정도다. 1822년, 12세의 리스트는 빈에서 최초로 공공연주회를 개최해 귀족들의 환대를 받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베토벤, 슈베르트와도 조우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리스트는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살리에리에게 작곡과 이론 수업을 받았다. 13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고 연주여행을 다니며 큰 난관 없이 질주했던 리스트도 1827년 아버지 사망 후에는 파리로 이주해 돈을 벌어야 했다. 연주여행을 중단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레슨을 해야만 하는 날도 있었다. 이때가 흔히 말하듯 인생의 암흑기로 보이지만 오히려 리스트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 일반 교육을 메꾸기 위해 청년기에 광범위한 독서를 수행했다. 자연스레 위고, 라마르틴, 하이네, 베를리오즈 등 당대 문학과 예술을 주도하던 쟁쟁한 인물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리스트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특히 베를리오즈의 관현악 기법은 리스트 관현악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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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프란츠 리스트(1856) | (우)피아노 앞의 리스트(1886)

피아니스트로서 리스트는 1839~47년 사이 루마니아에서 포르투갈에 이르는 전 유럽을 다니며 1000회 이상 연주회를 개최했다. 악마적 기교를 지녔다고 전설로 내려오는 파가니니와 비견되는 피아노의 진정한 거장, 다시 말해서 비르투오소 리스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리스트는 모든 음악을 외워서 연주하고 관객에게도 침묵을 요구해 오늘날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원조로 꼽힌다. 또한 대규모 홀에서 독주회를 연 최초의 피아니스트다. 이러한 리스트 피아노 작품집 가운데 헝가리 랩소디(Hungarian Rhapsodie)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서서히 접을 무렵인 1846년에서 53년 사이에 등장했다. 모두 15곡을 출판하고 말년인 1882년과 1885년에 4곡을 추가해 19곡이 완성됐다. 헝가리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집시 선율과 헝가리 민속 음악에 익숙했던 리스트는 자유로운 리듬에 기초해 헝가리 랩소디를 만들었다. 서사적인 판타지 형식을 갖고 있는 랩소디 형식 안에 헝가리 음악 양식을 넣어 고도로 정교한 거장의 솜씨로 버무렸다. 그렇기에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가 작곡한 헝가리 랩소디는 대서사시를 그리듯 장엄하며, 느린 부분과 빠르고 격렬한 양식이 세트로 결합된 거대한 춤곡 판타지를 듣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동시대를 살았지만 브람스와 리스트의 음악양식과 사상은 완전히 달랐다. 낭만시기에 전통을 계승한 고전주의자 브람스와 놀라운 혁신으로 새로운 음악양식을 창안한 리스트는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그랬던 두 작곡가가 헝가리 음악으로 서로 만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지녔다는 데에 신선한 즐거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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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