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30세가 되기 몇 년 전부터 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도 원인을 이리 저리 생각해봤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 왜 젊은 사람 귀에 이상이 생겼는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지 잠 안자고 깨어있기 위해 찬물을 머리에 쏟아 부었다든지, 면역이상 시스템, 베토벤 자신의 성격과 외부에서 온 스트레스와 질병 등 여러 가지 설만 존재한다. 현대의학에서도 몸과 마음이 극심히 힘들 경우 종종 귀에 병이 생기기도 하니 베토벤이 겪었던 병력에 귀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사실 베토벤은 청각상실 외에도 이런 저런 질병을 달고 살았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고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추측되는 하복부 통증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류머티즘과 안구통증으로도 고생했고 복수를 빼는 수술을 수차례 할 정도로 말년에는 간질환으로 고통을 겪었다.
우리 몸은 그 기능을 잃었을 때 평소에 잊고 있던 소중함이 극명히 드러난다. 음악가가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이다. 음악가의 청각상실은 작곡가보다 연주가로 활동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즉흥연주의 대가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은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점차 연주가 엉망이 되어갔다. 베토벤도 처음에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았고 타인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피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방해하기도 했다. 1802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상태가 돼서야 처음으로 친구이자 의사인 베겔러에게 털어놓았다.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는 “내 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의 반을 두루 여행했을 것이다”라는 어록도 있다. 질병 앞에 선 한 인간의 처절한 소망이다.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베토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보았다. 하지만 당시 의학수준은 치료를 할수록 더 악화되기만 했다. 아몬드 기름을 귀에 바른다든지, 냉탕에서 목욕을 하면 나을 수 있다는 등 아무 효과가 없는 치료방식으로 베토벤은 진이 빠졌다. 베토벤이 받아들였던 치료방법 중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 베토벤 친구이자 의사, 베겔러 | 베토벤, 맬러 회화(1804~5)
의사 요한 슈미트는 베토벤에게 시골에서 요양을 하도록 권유했다. 의사 조언대로 1802년 4월에서 10월까지 빈 외곽 하일리겐슈타트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베토벤은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했다. 작성 후 실제 가족들에게는 보내지 않았고 사후에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다. 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생들에게.
내가 적개심에 차있고 고집이 세며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단언하는 사람들아,
그대들의 비난은 정말로 부당하다!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 숨은 이유를 그대들은 모르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나의 마음과 정신은 선의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간직해왔고, 훌륭한 일들을 하고자 하는 의욕도 늘 함께 있었다.
그러나 내가 6년 전 불치의 병에 걸렸고, 이 병이 어리석은 의사들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라.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번번이 헛되기만 했고, 결국에는 치료가 수년 동안 계속되어야 하던지, 아니면 완전히 불가능한 영구 질환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열적이고 쾌활한 기질을 타고났으며 사교계의 유희를 즐기기도 했던 나는 일찍부터 고립되어 외롭게 살아야만 했다. 때로는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해 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좋지 않은 청력 때문에 슬픈 경험을 두 배로 하게 되면서 얼마나 무참하게 좌절당했던가. 더구나 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귀머거리니 더 크게 말해주시오, 고함을 쳐주시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 남들보다 더 완전해야 할 내 청각이 이리 무뎌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들은 나를 절망에 빠트렸고 그래서 나는 자살을 기도할 뻔한 적도 있었다.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 내게 주어졌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모두 끌어내 보여주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인내를 나의 길잡이로 삼아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아, 사람들이여, 언젠가 그대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때는 그대들이 내게 부당했었다는 것을 깨달으시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은 자신들처럼 불행했던 한 사람이 갖은 육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존경할만한 사람, 존경할만한 예술가의 대열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안을 받도록 하시오...
이제 다 되었다. 나는 기꺼이 죽음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리라. 나의 예술적 능력을 다 발휘할 기회도 갖기 전에 죽음을 맞게 된다면, 나의 운명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그 죽음은 내게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좀 더 늦게 닥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나는 만족해할 것이다.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이기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를 용감하게 맞이하리라. 잘 있거라. 그리고 나를 완전히 잊지는 말아다오. 나는 생전에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너희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니 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잘 있거라!
하일리겐슈타트, 1802년 10월 6일.
루드비히 반 베토벤”
(발터 리츨러 저, 나주리 신인선 번역의 <베토벤> 중,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인용)
▲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했던 집 | 하일리겐슈타트의 베토벤 거주지
위와 같이 두 동생 앞으로 보낸 유서에는 베토벤이 느꼈던 엄청난 절망감과 고독, 예술가로서의 강인한 소명의식, 결코 가혹한 운명에 지지 않고 예술로 소생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죽음을 앞둔 글이 아닌 죽음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기고자 내면에서 터져나온 고백 글이라 할 수 있다. 발병한지 10년이 지난 1810년경, 베토벤은 거의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됐고 1815년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었다. 그 무렵 베토벤 제자 체르니는 스승이 천둥이 울리듯 엄청나게 큰 소리로 치면서 음악이 멋지냐고 물어보기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측은지심을 갖던 숙연한 상황을 언급하기도 했다. 반면 베토벤 말년의 청각상실은 내면의 목소리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 어렵고 심오한 작품을 생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베토벤이 걸작을 쏟아내 영웅적 시기로 일컬어지는 1802년부터 약 10년 넘는 기간 베토벤의 청각은 나빠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 시기에 베토벤 음악은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갔다. 전체 작품의 성격을 살펴보았을 때, 청각상실이 작품의 내용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놀랍기만 하다. 또한 정신적으로 안정된 시기보다 오히려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고뇌의 시간에 비중있는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할 즈음 궁극적으로 희망을 그리는 교향곡 2번을 완성했고 유서를 쓰고 난 직후에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를 작곡했다. 심지어 밝은 성격을 가진 곡들도 상당수다. 사생활에서도 베토벤은 여러 번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을 하고 싶어했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졌다고 뛰어난 작품을 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베토벤 작품이 지닌 의의는 그의 건강상태나 사적인 행복이나 불행과는 아무 관계없이 순전히 강렬한 창작 의지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데 있다. 35세에 사망한 모차르트와 비교하면 57세 생애는 상대적으로 짧지 않았다. 그러나 청각상실을 비롯해 한평생 병마에 시달린 베토벤은 오히려 강인한 의지와 불타는 창작력으로 영원한 고전이라 일컫는 작품을 생산했다. 한 음악가의 위대함, 악성이라 일컫는 진정한 음악의 성인은 그렇기에 여기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
베토벤은 30세가 되기 몇 년 전부터 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도 원인을 이리 저리 생각해봤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 왜 젊은 사람 귀에 이상이 생겼는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지 잠 안자고 깨어있기 위해 찬물을 머리에 쏟아 부었다든지, 면역이상 시스템, 베토벤 자신의 성격과 외부에서 온 스트레스와 질병 등 여러 가지 설만 존재한다. 현대의학에서도 몸과 마음이 극심히 힘들 경우 종종 귀에 병이 생기기도 하니 베토벤이 겪었던 병력에 귀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사실 베토벤은 청각상실 외에도 이런 저런 질병을 달고 살았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고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추측되는 하복부 통증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류머티즘과 안구통증으로도 고생했고 복수를 빼는 수술을 수차례 할 정도로 말년에는 간질환으로 고통을 겪었다.
우리 몸은 그 기능을 잃었을 때 평소에 잊고 있던 소중함이 극명히 드러난다. 음악가가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이다. 음악가의 청각상실은 작곡가보다 연주가로 활동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즉흥연주의 대가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은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점차 연주가 엉망이 되어갔다. 베토벤도 처음에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았고 타인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피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방해하기도 했다. 1802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상태가 돼서야 처음으로 친구이자 의사인 베겔러에게 털어놓았다.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는 “내 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의 반을 두루 여행했을 것이다”라는 어록도 있다. 질병 앞에 선 한 인간의 처절한 소망이다.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베토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보았다. 하지만 당시 의학수준은 치료를 할수록 더 악화되기만 했다. 아몬드 기름을 귀에 바른다든지, 냉탕에서 목욕을 하면 나을 수 있다는 등 아무 효과가 없는 치료방식으로 베토벤은 진이 빠졌다. 베토벤이 받아들였던 치료방법 중 그나마 위안이 됐던 것은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 베토벤 친구이자 의사, 베겔러 | 베토벤, 맬러 회화(1804~5)
의사 요한 슈미트는 베토벤에게 시골에서 요양을 하도록 권유했다. 의사 조언대로 1802년 4월에서 10월까지 빈 외곽 하일리겐슈타트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베토벤은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했다. 작성 후 실제 가족들에게는 보내지 않았고 사후에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다. 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생들에게.
내가 적개심에 차있고 고집이 세며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단언하는 사람들아,
그대들의 비난은 정말로 부당하다!
내가 그런 인간으로 보이는 숨은 이유를 그대들은 모르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나의 마음과 정신은 선의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간직해왔고, 훌륭한 일들을 하고자 하는 의욕도 늘 함께 있었다.
그러나 내가 6년 전 불치의 병에 걸렸고, 이 병이 어리석은 의사들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보라.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번번이 헛되기만 했고, 결국에는 치료가 수년 동안 계속되어야 하던지, 아니면 완전히 불가능한 영구 질환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열적이고 쾌활한 기질을 타고났으며 사교계의 유희를 즐기기도 했던 나는 일찍부터 고립되어 외롭게 살아야만 했다. 때로는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해 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마다 좋지 않은 청력 때문에 슬픈 경험을 두 배로 하게 되면서 얼마나 무참하게 좌절당했던가. 더구나 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귀머거리니 더 크게 말해주시오, 고함을 쳐주시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 남들보다 더 완전해야 할 내 청각이 이리 무뎌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들은 나를 절망에 빠트렸고 그래서 나는 자살을 기도할 뻔한 적도 있었다.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오직 그것뿐이었다. 아, 내게 주어졌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모두 끌어내 보여주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나는 인내를 나의 길잡이로 삼아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아, 사람들이여, 언젠가 그대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때는 그대들이 내게 부당했었다는 것을 깨달으시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은 자신들처럼 불행했던 한 사람이 갖은 육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존경할만한 사람, 존경할만한 예술가의 대열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안을 받도록 하시오...
이제 다 되었다. 나는 기꺼이 죽음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리라. 나의 예술적 능력을 다 발휘할 기회도 갖기 전에 죽음을 맞게 된다면, 나의 운명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그 죽음은 내게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좀 더 늦게 닥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나는 만족해할 것이다.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이기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를 용감하게 맞이하리라. 잘 있거라. 그리고 나를 완전히 잊지는 말아다오. 나는 생전에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너희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러니 나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잘 있거라!
하일리겐슈타트, 1802년 10월 6일.
루드비히 반 베토벤”
(발터 리츨러 저, 나주리 신인선 번역의 <베토벤> 중,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인용)
▲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했던 집 | 하일리겐슈타트의 베토벤 거주지
위와 같이 두 동생 앞으로 보낸 유서에는 베토벤이 느꼈던 엄청난 절망감과 고독, 예술가로서의 강인한 소명의식, 결코 가혹한 운명에 지지 않고 예술로 소생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죽음을 앞둔 글이 아닌 죽음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기고자 내면에서 터져나온 고백 글이라 할 수 있다. 발병한지 10년이 지난 1810년경, 베토벤은 거의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됐고 1815년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었다. 그 무렵 베토벤 제자 체르니는 스승이 천둥이 울리듯 엄청나게 큰 소리로 치면서 음악이 멋지냐고 물어보기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측은지심을 갖던 숙연한 상황을 언급하기도 했다. 반면 베토벤 말년의 청각상실은 내면의 목소리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 어렵고 심오한 작품을 생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베토벤이 걸작을 쏟아내 영웅적 시기로 일컬어지는 1802년부터 약 10년 넘는 기간 베토벤의 청각은 나빠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 시기에 베토벤 음악은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갔다. 전체 작품의 성격을 살펴보았을 때, 청각상실이 작품의 내용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놀랍기만 하다. 또한 정신적으로 안정된 시기보다 오히려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고뇌의 시간에 비중있는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작성할 즈음 궁극적으로 희망을 그리는 교향곡 2번을 완성했고 유서를 쓰고 난 직후에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한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를 작곡했다. 심지어 밝은 성격을 가진 곡들도 상당수다. 사생활에서도 베토벤은 여러 번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을 하고 싶어했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졌다고 뛰어난 작품을 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베토벤 작품이 지닌 의의는 그의 건강상태나 사적인 행복이나 불행과는 아무 관계없이 순전히 강렬한 창작 의지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데 있다. 35세에 사망한 모차르트와 비교하면 57세 생애는 상대적으로 짧지 않았다. 그러나 청각상실을 비롯해 한평생 병마에 시달린 베토벤은 오히려 강인한 의지와 불타는 창작력으로 영원한 고전이라 일컫는 작품을 생산했다. 한 음악가의 위대함, 악성이라 일컫는 진정한 음악의 성인은 그렇기에 여기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