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각 분야 명사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주제의 인문이야기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지혜의 깊이를 더하시길 바랍니다.

수필고독이라는 보약 (일기)

2015-05-01

남편의 해외파견으로 혼자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때가 있었다.
회사 규정상 가족의 방문이 금지되어 1년을 독거녀로 살아야 했다.
처음엔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며 주말에 친구들을 불러 늦게까지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가끔 떨어져 살아도 좋지 뭐" 라는 생각이 들던 어느 날, 퇴근 후 깜깜한 집에 들어와 TV부터 켜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요즘은 '혼밥'이 유행이라지만 나는 혼자 먹는 밥상이 쓸쓸해 식사를 거르기 일쑤였다.
평소 혼자만의 적막하고 고요한 시간을 좋아하지만 그런 시간이 축적되자, 사람의 온기가 없는 집을 혼자서 덥히기가 쉽지 않았다. 매일 직장과 집, 똑같은 삶의 쳇바퀴를 돌던 나는 외로웠고, 고독했다.

외로움을 온 몸으로 떨쳐내려 하던 중, 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인기를 끌고 있었다.
혼자서 TV를 껴안고 뒹굴거리다 그 프로그램에 점점 빠져들었고, 우승 후보 한 사람을 응원하게 되었다.
평소에 유행에 관심이 별로 없던 내가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과 출연자에 대해 엄청난 몰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생애 처음 팬 카페에 가입했고, 밤낮으로 활약한 결과 최고등급의 회원이 되었다.
그의 사진과 영상을 하나도 빠짐없이 공부했으며, 심지어 30대의 나이에 10대들과 함께 팬 사인회의 줄을 서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맞다. 나는 아줌마 팬이 되어있었다.
몇몇 사람들과 해당 가수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했고, 그에 대한 토론, 비판, 칭찬을 열성적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모임을 끝내고 다시 캄캄한 집으로 돌아오면 다시 외로웠고 고독했다.
열심히 떠든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여운이 끝나가자 열기도 잦아 들었다. 팬을 자처하며 함께 열광했던 나와 그녀들의 공통점은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워 무언가 마음을 두고 몰입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의 경우와는 다르게 팬 활동이 주는 장점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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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퇴근하고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 마약같이 끊을 수 없는 월급에 잠시 달콤해 하다가도, 다시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를 참으로 외롭게 한다.
잠시라도 공백을 가지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가라 앉아 일상을 살아가지 못할 까봐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이 보여주는 것들에 눈과 귀와 마음을 내어준다.
SNS가 확산된 이유 중 하나는 아마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인지도 모른다. 무리 안에서 고독의 시간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도 내 마음의 깊은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밖에서 찾은 그 무언가는 절대로 고독한 마음을 온전히 채워줄 수 없다.
해결방법은 한가지, '고독'에 직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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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절정에 이르면 언어를 잃는다.
언저리까지 꽉 차오르는 정적 속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음악
- 내 유일한 벗이요 반려이며 삶의 동반자, 그대, 음악이여!
지금 이 순간 다시 한 번 확인 하노니,
음악은 정녕 <내 삶의 교향곡>의 '라이트모티브' 였음을,
그리고 그 중심엔 항상 위대한 수난자 베토벤이 있었던 것이다!"
왜 베토벤인가, 이덕희, 5쪽


고독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 혹은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고독을 부정적인 단어로 치부하기 일쑤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고독'이라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고 피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독을 직면해보면 그 시간이 '자신과 마주하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몸서리치도록 외로울 수도 있지만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고독이라는 긴 터널을 혼자 지나오는 동안, 우리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자신의 본 모습과 마주할 뿐 아니라 깊은 사색의 시간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서 전해주는 감동이 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생생히 전달되는 일이나 수많은 명언을 남긴 철학가 칸트의 세계적인 업적, 그리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은 엄청난 몰입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긴 고독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고독한 유배의 시간 동안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거듭난 다산 정약용과 위대한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역시 고독을 창조로 바꾼 현자들이다.
그들은 고독의 시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사색과 성장의 시간으로 채웠다.

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고독'이라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처음엔 늘 그랬듯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무리 속에서 남들처럼 해왔던 습관을 내려놓는 것이 그 불안의 근원을 찾고 '나만의 삶'을 찾는 첫걸음이었다.
제일 먼저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혼자만의 산책을 시작했다. 혼자였으므로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걸을 필요 없이 빠르게 걸었다 느리게 걸었다 멈춰 섰다 깡총 걸음으로 걷다 나만의 리듬으로 자유로이 걸었다.
어디로 어떻게 걷건 모두 내 선택에 달린 일이었다.
온전히 내 선택에 달린 일이라니. 걷는다는 단순한 일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몸을 움직이니 직장에서 쌓여 온 긴장이 풀어지고 활력이 솟아났다.

또한 혼자 걷는 것 만으로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몸의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늘의 색과 공기의 냄새가 가을을 알리고 있었고, 땅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의 색과 모양의 다양함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느꼈다.
어느 날은 탄천을 걷다가 어미를 따라가는 오리 가족과 시멘트 벽의 금간 틈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 언젠가 하얀 나비가 되어 날아갈 애벌레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눈에 눈물이 차 올랐다.
갑작스런 눈물에 당황하다가, 고요히 듣게 된 내면은 눈물의 이유를 분명히 말해 주었다. 이 땅의 작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남들이 알아봐주지 않아도,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온 몸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작고도 큰 깨달음이었다. 그럼 나는 모든 힘을 다해서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 순간 나는 남들의 시선과 사회의 가치를 쫓아가느라 정작 나의 삶을 진정성 있게 살지 못하는 '민낯의 나'를 보았다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든다.
순례자들은 아주 긴 도보여행을 마친 후 거의 예외 없이 변모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은 오랜 시간 스스로를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모르던 자기의 일부를 만났기 때문이다."
<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고독의 힘, 원재훈, 66쪽


집에 돌아와 고독한 산책 동안 느끼고 생각하고 성찰했던 것들을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남기면서 좀 더 명확한 감정과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를 확인했다. 때로는 그 때의 감정을 시로 적어보기도 하고, 몇 시간씩 몰입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당장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는 소위 '쓸모 없는 일'을, 그러나 나만의 삶을 찾는 매우 '쓸모 있는 일'을 계속 해나갔다. 아팠던 마음은 서서히 치유되었고, 어깨를 무겁게 했던 불안감은 기분 좋은 느낌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고독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삶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삶으로 존재했다.


"고독은 가장 가까운 친구. 그런데 왜 우리는 고독을 싫어할까.
자, 이제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고독의 즐거움, 헨리 데이비드 소로, 12쪽

 

마치 땅 속에서 겨울 내내 새로운 탄생을 위해 준비하는 식물처럼, 고독은 진정한 자신과 직면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며, 다가오는 삶의 자양분이 되는 시간이다. 내 삶을 진실하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고독을 친구 삼아 삶의 순간마다 조용히 다가오는 인생의 질문들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굳이 긴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페이스북, 카카오톡, 트위터 등의 SNS를 잠시 휴면시킨다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알람을 무음으로 해 자발적 소통과 고독을 조율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제 평범한 일상 속에 하루 몇 분, 일주일에 몇 시간이라도 '고독'을 마주해 보는 건 어떨까? 고독의 적극적인 선택은 어떤 보약보다 효과 좋은 인생의 보약이 될 것이다.


* 책추천: 고독의 힘, 원재훈/ 느리게 걷는 즐거움, 다비드 르 브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