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아침, 계절의 정취에 잠시 빠져들 시간도 없이 출근 버스에 몸을 싣고 못 다 이룬 잠을 청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미디어가 추려 놓은 뉴스들을 무심히 넘겨본다.
어느새 버스가 도착하면 우르르 사람들과 함께 바삐 걸음을 옮겨 직장으로 향한다. 오전 근무를 정신 없이 보내고 나면, 동료들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기다린다. 각자의 스마트폰을 연신 들여다 보면서 말이다.
짧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 이미 저녁시간.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일을 마치고 다시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나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별을 보고 출근 해 별을 보며 퇴근하니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날씨가 어떤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또 매일매일은 고되고 벅차게 흘러가는데 일년이 지나면 도대체 뭘 했는지, 무슨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도 한다. 어딘가로 우리는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이제 사람들은 휴식을 부끄러워하며
오랜 사색에 대해서는 거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까지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여유를 위한 시간과 능력을 사람들은 더 이상 갖지 못한다.
이득을 좇는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꾸며내고, 계략을 짜내고,
남을 앞지르는 일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신을 모두 소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329: KGW V2, 237쪽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사회가 원하는 가치가 옳다고 믿으며 흘러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잘 가면, 대학 때는 취직만 잘하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평생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올림픽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다른 누구보다 빨리 성장하고 빨리 달려가면 행복해 진다고
믿었다. 대기업에 다니고, 남들보다 먼저 승진하고, 연봉을 더 받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사고, 그렇게 살면
성공하는 삶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부러워하는 삶에 도취되어서 밤낮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밖'에 있는 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런데 아무리 다른 이들을 제치고 빨리 나아가도 갈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점점 슬퍼졌고 몸도 서서히 지쳐갔다.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고, 뒤쳐지지 않고 앞에서 뛰어가고 있는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들여다 볼 사이도 없이 달려가던 어느 날, 나는 달려가는 무리들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더 이상 달려갈 수 없다는 무거운 패배감 속에 불안하고 두려웠으며, 매일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감과 '루저'라는 패배감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혼자 깊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수많은 질문이 마음에 떠올랐다.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 사람들이 말하는 저 방향이 맞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삶을 즐기려면 느려져야 한다.느림은 게으름과 다르다.
게으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상태인 반면,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다. <피에르 쌍소>."
굿바이 게으름, 문요한, 57쪽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던 중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길을 사로 잡는 책이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인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였다.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해 불안감과 조바심을 가지고 사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다른 방향을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는 '느림'이라는 것은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능력이 없어서 빠른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흐름에 쫓겨 다니지 않고 내면의 속도와 흐름 속에 '느림'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답답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했던 '느림'이 실은 자신만의 속도를 찾는 적극적인 선택이며, 마음의 시선을 외부의 흐름이 아닌 내면의 흐름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열쇠였기 때문이다.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시작 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변화와 흐름을 지켜보는 것이 나에게 떠오른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가함과 무위는 정신적 여유를 전제한다.
그것은 즉 성찰과 명상의 시간을 의미한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 과연 그것이 성찰의 힘, 명상의 힘, 생각의 힘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반성하고 판단하는 시간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시켜 정신의 성찰적 힘을 회복시키려면 바쁨과 열심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니체>"
니체, 백승영, 212쪽
그렇게 나만의 속도와 방향에서 다시 들여다 본 세상은 느리지만 충만했다. 나무는 옆 나무가 빨리 크게 자란다고 성급히 자라지 않고, 화려한 장미들 한 가운데 피어난 작고 노란 민들레 한 송이는 그저 제 속도와 모습으로 온 힘을 다해 피어난다. 자연에서 있는 그대로 자란 과일의 맛은 억지 없는 부드러움이 있고, 계절을 있는 그대로 품고 삭여 낸 나무는 오랜 동안 그 모습 그대로 편안함을 준다. 내면의 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느리게 가도, 달리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내면의 이야기를 잘 듣고 너의 속도와 방향을 찾으라고.
아직도 가끔 '달려야 하는 건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마음의 불안을 '느림' 속에 들여다 본다.
그러면 어느새 불안은 사라지고 다시 나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외부의 빠른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잠시 바쁨의 톱니바퀴에서 내려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멈춤 속에서 깊고 섬세하게 자신의 마음을 마주보며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충만한 삶의 모습일 것이다.
지금 이순간, 아주 잠시라도 일상에 '쉼표'를 찍고 '느림'의 시간을 가져보시라.
** 책추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피에르 쌍소 / <인생교과서 니체>, 플라톤아카데미 총서
자연이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아침, 계절의 정취에 잠시 빠져들 시간도 없이 출근 버스에 몸을 싣고 못 다 이룬 잠을 청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미디어가 추려 놓은 뉴스들을 무심히 넘겨본다.
어느새 버스가 도착하면 우르르 사람들과 함께 바삐 걸음을 옮겨 직장으로 향한다. 오전 근무를 정신 없이 보내고 나면, 동료들과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기다린다. 각자의 스마트폰을 연신 들여다 보면서 말이다.
짧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 이미 저녁시간.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일을 마치고 다시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나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별을 보고 출근 해 별을 보며 퇴근하니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날씨가 어떤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또 매일매일은 고되고 벅차게 흘러가는데 일년이 지나면 도대체 뭘 했는지, 무슨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도 한다. 어딘가로 우리는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이제 사람들은 휴식을 부끄러워하며
오랜 사색에 대해서는 거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까지 한다.(...)
무엇보다도 모든 여유를 위한 시간과 능력을 사람들은 더 이상 갖지 못한다.
이득을 좇는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꾸며내고, 계략을 짜내고,
남을 앞지르는 일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신을 모두 소모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329: KGW V2, 237쪽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사회가 원하는 가치가 옳다고 믿으며 흘러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만 잘 가면, 대학 때는 취직만 잘하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평생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올림픽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다른 누구보다 빨리 성장하고 빨리 달려가면 행복해 진다고
믿었다. 대기업에 다니고, 남들보다 먼저 승진하고, 연봉을 더 받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사고, 그렇게 살면
성공하는 삶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부러워하는 삶에 도취되어서 밤낮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밖'에 있는 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런데 아무리 다른 이들을 제치고 빨리 나아가도 갈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점점 슬퍼졌고 몸도 서서히 지쳐갔다. 열심히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고, 뒤쳐지지 않고 앞에서 뛰어가고 있는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들여다 볼 사이도 없이 달려가던 어느 날, 나는 달려가는 무리들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더 이상 달려갈 수 없다는 무거운 패배감 속에 불안하고 두려웠으며, 매일 뒤쳐지고 있다는 불안감과 '루저'라는 패배감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혼자 깊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수많은 질문이 마음에 떠올랐다.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 사람들이 말하는 저 방향이 맞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삶을 즐기려면 느려져야 한다.느림은 게으름과 다르다.
게으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상태인 반면,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다. <피에르 쌍소>."
굿바이 게으름, 문요한, 57쪽
답을 구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던 중 도서관에서 우연히 눈길을 사로 잡는 책이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인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였다.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해 불안감과 조바심을 가지고 사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다른 방향을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는 '느림'이라는 것은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능력이 없어서 빠른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흐름에 쫓겨 다니지 않고 내면의 속도와 흐름 속에 '느림'을 '선택'한다는 말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답답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했던 '느림'이 실은 자신만의 속도를 찾는 적극적인 선택이며, 마음의 시선을 외부의 흐름이 아닌 내면의 흐름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열쇠였기 때문이다.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시작 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변화와 흐름을 지켜보는 것이 나에게 떠오른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가함과 무위는 정신적 여유를 전제한다.
그것은 즉 성찰과 명상의 시간을 의미한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인지, 과연 그것이 성찰의 힘, 명상의 힘, 생각의 힘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반성하고 판단하는 시간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시켜 정신의 성찰적 힘을 회복시키려면 바쁨과 열심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니체>"
니체, 백승영, 212쪽
그렇게 나만의 속도와 방향에서 다시 들여다 본 세상은 느리지만 충만했다. 나무는 옆 나무가 빨리 크게 자란다고 성급히 자라지 않고, 화려한 장미들 한 가운데 피어난 작고 노란 민들레 한 송이는 그저 제 속도와 모습으로 온 힘을 다해 피어난다. 자연에서 있는 그대로 자란 과일의 맛은 억지 없는 부드러움이 있고, 계절을 있는 그대로 품고 삭여 낸 나무는 오랜 동안 그 모습 그대로 편안함을 준다. 내면의 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느리게 가도, 달리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내면의 이야기를 잘 듣고 너의 속도와 방향을 찾으라고.
아직도 가끔 '달려야 하는 건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마다 마음의 불안을 '느림' 속에 들여다 본다.
그러면 어느새 불안은 사라지고 다시 나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외부의 빠른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잠시 바쁨의 톱니바퀴에서 내려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멈춤 속에서 깊고 섬세하게 자신의 마음을 마주보며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충만한 삶의 모습일 것이다.
지금 이순간, 아주 잠시라도 일상에 '쉼표'를 찍고 '느림'의 시간을 가져보시라.
** 책추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피에르 쌍소 / <인생교과서 니체>, 플라톤아카데미 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