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각 분야 명사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주제의 인문이야기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지혜의 깊이를 더하시길 바랍니다.

수필다르게 사는 하루 (일기)

2015-05-01

어느 일요일 아침,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만성 피로에 눈을 못 뜨고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는데 남편이 아침 신문에 끼여있던 전단지를 들고 들어온다.
내 옆에 엎드려 누워 신이 난 목소리로 동네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200원에 할인 판매한다고, 이따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나는 눈을 비비며 누운 채로 '라면도 할인한다는데 사야 할까, 말아야 할까, 싼 건가 아닌가' 생각하다 말했다.


"200원짜리 아이스크림 전단지 들고 와서 같이 얘기하는 거 참 행복하다."

오랜만에 게으른 걸음으로 베란다에 나가보니 그 동안 물 한번 제대로 준 적이 없던 난초 화분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신기하고 대견해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며 평화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다가 새로울 것 없는 평범하고 고요한 휴일 아침이 문득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런 작은 일로 행복할 수도 있는 거였나? 낯선 기분과 함께 왠지 지금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발견하고 누리는 것이다."
<용타 스님>


허겁지겁 출근하고 별보며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 어떻게든 책이라도 좀 읽어보고 싶지만 읽어도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침대에 누워 멍하니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다가 내일의 출근이 걱정되어 억지로 잠을 청하는 반복적인 일상. 이제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 져서 더 이상 새로운 느낌을 기대하기 힘든 건 물론이고, 언제 이런 반복되는 삶이 끝날 수 있을까 고민하고 푸념해도 딱히 해답은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행복'이라는 단어가 매우 멀고 낯설 뿐 아니라 미래의 언젠가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유보한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은 우리를 더욱 둔감하게 만들어 거창한 행복이 아니고서는 행복하다 느끼지 못하며, 사소하고 평범한 가운데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놓치게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하고 사소해서 보이지 않던 소중함은 그것을 잃었을 때 비로소 크게 깨닫게 된다.
발가락 하나만 다쳐도 걸을 수가 없어 생활이 크게 불편해지고, 언젠가의 행복을 위해 앞만 보며 달려 가다 건강을 잃고서야 비로소 몸의 신호를 무시했던 시간들을 후회한다.
또 늘 함께 있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존재도 그들이 아프거나 세상을 떠났을 때 소중한 존재가 주는 무게를 실감한다.



"인생은 사실학이 아니라 해석학입니다.(...)
사실은 같은 사실인데 해석을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그래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행, 불행의 길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용타스님>

- 행복노트, 용타스님, 84쪽 -


올 초 '동사섭'이라는 명상 프로그램에 우연한 기회에 참여했다가 지족(知足)명상을 처음 접했다.
지족명상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이룬 것 대한 감사를 하는 명상이었다.
너무도 익숙해서 소중함을 잊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인데, 우선 누구라도 집에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평범한 주전자의 감사점을 40개 이상 생각해 적어보고 발표하라고 했다.
처음엔 '물을 담을 수 있어 감사하다' 정도의 단순한 점만 떠오르다가 나중엔 '얼굴을 비춰볼 수 있어 감사하다', '작은 컵에도 물을 따를 수 있어 감사하다', '뜨겁게 물을 끓여 먹을 수 있어 감사하다' 등의 수많은 고마움들이 떠올랐다.


이 작은 주전자 하나에도 이렇게 감사할 점이 많은데, 사람에게는, 또 내 삶과 나 자신에게는 감사할 점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밥을 잘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잘 수 있고, 아름다운 가을 길을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고, 나를 살아 숨쉬게 하는 심장이 뛰고 있다.
지금 이순간도 순환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내 몸에 감사했다.
주변엔 나를 걱정해주는 가족이 있고, 마음을 위로해 주는 친구가 있다.
걸어가면 하루에도 가지 못할 길을 실어다 주는 버스가 있고, 숨을 쉬면 행복해지는 맑은 공기가 있고, 목이 마를 때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다. 밖에서 주는 감사함뿐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감사한 점들도 있었다.
친척 한 명 없는 타지에서 혼자 하는 유학생활 동안 스시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행복하게 그 시간을 보낸 것에 감사했고, 건강을 잃어 절망하고 바닥으로 침몰하던 시기를 거쳐 지금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대견했다.
이렇게 이미 있지만 익숙했던 것들을 지금 당장 누릴 수 없고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안에 소중한 행복들이 끝없이 보였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법정>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정 잠언집, 류시화 엮음, 69쪽.


누군가는 반 컵 밖에 없다며 불행을 택하고 다른 사람은 반 컵이나 있다고 행복을 택한다.
누구나 아는 반 컵의 물 이야기지만, 불행과 행복은 내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선택하느냐에 달린 일이라는 것을 이렇게 간단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불행과 행복을 선택하는 주체는 자기자신이라는 단순한 진리가 가슴을 크게 울렸다.
캄캄한 불행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열쇠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열쇠 중 중요한 하나는 '감사'의 마음인데, 반복되는 고단한 삶을 벗어나는 방법 중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익숙한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감사한 부분을 찾아보는 것이다.
처음엔 습관이 되지 않아 잘 안될지도 모르지만 매일 아침 출근을 하는 버스 안에서, 또는 화장실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하루에 5가지씩 감사일기를 적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발견 해가는 재미와 함께 같은 하루지만 다르게 사는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며, 어느 날 그런 다른 하루들이 쌓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추천도서: 행복노트, 용타스님, 행복마을
한줄의 기적 감사일기, 양경윤, 쌤앤파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