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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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클래식] XVI. 베토벤 교향곡(3) - <합창> (오지희)

2021-11-24

- <합창>

베토벤은 1811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에 들어가 1812년 교향곡 7번(op.92)을 선보였다. 1812년은 베토벤이 피폐했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창작활동을 재개한 시기다. 주지하다시피 1809년 프랑스 군대의 침공으로 빈이 점령당했고 루돌프 대공을 비롯한 빈의 귀족들이 피난을 갔다. 후원이 끊긴 베토벤도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고 차츰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한 베토벤은 연금도 다시 수령 받았다. 베토벤 마음속에는 다시금 창작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3번 <영웅>, 5번 <운명>에 이어 전쟁을 딛고 일어선 미래지향적인 희망과 투쟁 의지가 발현된 것이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교향곡 7번은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7번 교향곡을 관통하는 본질은 바로 리듬이다. 유난히 숭고한 분위기를 지닌 선율이 멋진 2악장을 넘어 1악장 리듬이 지닌 강렬한 힘과 3악장의 스타카토를 이용한 호방한 진행은 지극히 역동적이다. 특히 4악장에서 춤추듯이 움직이는 약동하는 리듬은 실로 경이롭다. 그렇기에 리스트는 7번 교향곡을 리듬의 신격화로, 바그너는 무도의 신격화라는 말로 찬사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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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향곡 7번, 1악장,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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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향곡 7번, 4악장, 주제


교향곡 8번(op.93)은 7번 교향곡을 작곡한 직후 착수에 들어가 1812년 완성됐다. 교향곡 7번과 같은 해에 작업한 교향곡 8번이지만 분위기가 너무 달라 자주 비교됐다. 7번은 힘이 넘친 반면 F장조에 기초한 8번은 밝고 화사했다. 베토벤은 7번이 낫기 때문이지 8번이 부족한 게 아니라고 대꾸하곤 했다. 상대적으로 심심하게 보이는 8번은 그러나 음악양식에서는 악장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인다. 예컨대 1악장에서 제2주제는 시작되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들어와있고 2악장은 메트로놈 박자 리듬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기본 박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독특함이 있다. 3악장은 교향곡 1번 이후 사용하지 않았던 미뉴에트 풍으로 우아하게 흐른다. 더욱이 쾌활한 4악장은 F장조 위에서 익살스럽게 움직이다 뜬금없이 C#(Db)화음으로 가기도 하고, 갑자기 멈춰 긴 쉼표를 즐기거나 급격히 조성을 바꿔 분위기를 전환하는 등 베토벤다운 음악적 유머를 가득 싣고 있다. 근력이 불끈 불끈 솟는 것처럼 힘이 분출하는 4악장은 역시나 열정과 강한 역동성이 상징인 전형적인 베토벤 교향곡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마침내 베토벤은 1824년 교향곡 9번(op.125) <합창>(Choral)을 발표해 교향곡의 신기원을 열었다. <합창> 교향곡은 첫 스케치에서 완성될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09년 스케치에서 1악장 첫 도입부가 발견됐고 1812년경 d단조 교향곡이라는 필적이 나오기도 했다. 1815년 스케치에서는 2악장 스케르초 악상도 찾을 수 있다. 베토벤은 동시에 7번, 8번, 9번 교향곡을 작업하고 있었는데 7번과 8번은 1812년에, 9번 <합창>은 1824년에 나온 것이다. <합창> 교향곡이 이렇게 더디 진행된 것은 베토벤 개인의 불행한 가족사도 한 몫 했다. 1815년 11월, 동생 칼이 죽고 베토벤은 조카 칼을 돌보는 문제로 제수씨 요한나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본격적으로 양육권 소송 재판을 하면서 마음이 피폐해졌다. 더욱이 1817년 이후에는 건강상태도 안 좋아졌다. 걸작을 쏟아내던 영웅적 시기가 지나고 창작활동의 침체기가 온 것이다. 그러나 안팎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베토벤은 9번 교향곡 1악장을 진척시켰다. 1818년 영국 브로드우드사에서 베토벤 한 사람만을 위해 맞춤 제작한 피아노가 도착하자 다시금 피아노 음악에 대한 창작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1819년부터는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을 위해 <장엄 미사>(op.123) 작곡에 들어갔는데 예정보다 늦어져 1822년에 대미사곡을 완수했다.

이제 필생의 역작인 마지막 교향곡 작곡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점에 달했다. 베토벤은 과거의 모든 양식에 존경심을 품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교향곡을 구상했다. 기본구조는 전통적인 교향곡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완전히 혁신적이었다. 1824년 2월, 베토벤은 교향곡 4악장에 최초로 독창과 합창을 넣어 기악과 성악이 결합한 장엄한 교향곡 9번 <합창>을 완성했다. <합창> 교향곡은 <장엄 미사>와 함께 1824년 5월 7일, 빈의 캐른트너토르 극장(Theater am Kärntnertor)에서 초연됐다. 이 무대에서 <장엄 미사>를 통해 내적 평안을 기원했다면, <합창>은 형제애를 바탕으로 전 인류를 향한 평화를 드높이 외쳤다. 사실 베토벤은 빈이 아닌 베를린에서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을 초연하고 싶었다. 오스트리아 빈은 이미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 음악으로 취향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곡가의 생각을 알아챈 베토벤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빈 무대로 선회했다. 초연 때 베토벤은 지휘를 하긴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극장 카펠마이스터인 움라우프(M. Umlauf 1781~1842)가 악장과 교감하며 지휘했고 베토벤은 지휘자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겼다. 교향곡에 합창이 등장하는 일찍이 본 적 없는 대작곡가의 위대한 음악 앞에서 청중은 우레 같은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냈다. 여성 알토 가수 카롤리네 웅거가 소리를 못 듣는 베토벤 소매를 잡아 객석을 바라보게 했다는 그 유명한 장면을 상상해보라! 음악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장대한 규모로 1시간에 달하는 9번 교향곡의 궁극적인 목표는 마지막 악장의 합창으로 귀결된다. <합창>에는 다각도로 혁신적인 시도가 나온다. 예컨대 1악장에서 주제 동기는 4도, 5도로 큰 폭으로 하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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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향곡 9번, 합창, 1악장, 도입부


통상 웅장한 울림을 기대하는 청중에게 신비로움을 부과하면서 동시에 점차 고조되는 기대감을 극대화시킨다. 또한 마지막 악장을 부각시키기 위해 3악장이 아닌 2악장에 빠른 스케르초 악장이 삽입됐다. <합창> 교향곡의 스케르초는 이 양식의 정점을 찍는다. 3악장은 느린 아다지오로 진행하며 두 주제가 자유롭게 변주하는데 마치 천상에서 울리는 듯한 선율로 다가온다. 영롱하게 들리는 3악장의 서정적인 선율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극적인 4악장 도입부와 대조를 이룬다. 4악장을 위해 2악장과 3악장의 음악양식을 바꾼 것은 노련한 대작곡가의 혜안이 돋보이는 시도다. 드디어 기악과 성악이 결합한 4악장에서 베토벤의 작곡기술과 심오한 철학은 완전히 독보적인 음악으로 나타났다. 성악부분은 쉴러(Schiller)가 1786년 발표한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베토벤은 청년시절부터 괴테와 쉴러의 시에 심취해있었고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 음악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놀랍게도 30년이 지나 오랜 시간 품은 뜻을 이룬 것이다. 새삼 베토벤이 얼마나 집념과 끈기, 강인한 의지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송가 1절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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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드리히 쉴러, 루도비크 시마노비츠 그림(1794)


“환희여, 아름다운 주님의 빛,
낙원에서 온 아가씨여,
정열에 넘치는 우리들은 그대의 성전에 들어가리.
그대의 매력은 가혹한 세상에 의해 떨어진 것을 다시 부합시키도다.
그대의 날개 위에 머물 때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

혼돈에 차 굉음을 울리듯 들렸던 4악장은 점차 평안과 기쁨에 넘친다. 독창과 합창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들려주는 하느님 사랑과 보편적 형제애는 감동적이다. 그 때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합창> 교향곡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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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향곡 9번, 합창, 환희의 송가 선율


베토벤은 교향곡에 전 인류의 사상을 담으려고 시도했다. 교향곡을 작곡할 때마다 표현력은 극대화됐다. 베토벤 음악을 대표하는 특징적인 음악양식은 모두 교향곡에 담겼기에 교향곡은 작곡가로서의 베토벤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장르로도 평가받는다. 베토벤은 형식을 바꾸기도 음악적 내용에 새로움을 담기도 하면서 스스로 교향곡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하이든, 모차르트를 거쳐 베토벤에 이른 교향곡은 이제 그 자체로 완전한 예술에 도달했고 창작행위의 정점을 찍었다. 그렇기에 베토벤 교향곡은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고전으로 남았지만 후대 작곡가들에게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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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_오지희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음악사를 전공한 후 백석문화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음악평론가와 클래식음악 전문해설가로 활동중이다. 클래식음악을 넘어 다양한 공연예술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18년 출판한 평론집 <음악에 글을 새기다> 는 이러한 필자의 활동을 담은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