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각 분야 명사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주제의 인문이야기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지혜의 깊이를 더하시길 바랍니다.

연구[M.lab] 탈종교 시대와 진정한 ‘종교’의 의미와 역할: 불교를 중심으로 (조성택 교수)

2022-01-11

시대전환의 징후가 여러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탈종교’라는 현상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사회에서 탈종교 현상에 대한 언급은 주로 교회나 사찰에서의 신자/신도 감소 추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탈종교라는 현상은 단순히 한국 종교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현상으로 일종의 문명전환의 한 징후입니다. 따라서 저는 탈종교 현상을 문명사적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탈종교 시대의 불교의 새로운 역할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cst_inmun_20210112_01.jpg

▲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 (2012년 김영사)



달라이 라마는 2011년에 출간된 그의 책 Beyond Religion(『종교를 넘어』, 2012년 김영사)에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를 넘어 인류를 연결하는 도덕적 가치로서 기본적인 인간의 영적 본성(spirituality)을 강조합니다.

종교는 과거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양화된 세계화 시대에는 종교가 인간의 모든 고민과 문제들에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이제 종교를 초월한 삶의 방식과 행복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인간의 기본적 본성으로서의 영성과 종교적 영성을 구별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 둘의 차이는 ‘물’과 ‘차’의 차이와 같다고 합니다. 종교적 내용이 없는, 인간 본성의 내적 가치는 물과 같은 것으로 건강과 생존을 위해 매일 매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반면 종교적 내용을 가진 도덕과 내적 가치는 마치 차와 같다고 합니다. 차에는 찻잎과 향료, 때로는 설탕이 들어가 차를 더욱 영양가 있고 몸에 좋은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차의 주성분은 언제나 물입니다. 우리는 차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말을 요약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보다 근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영성입니다. 종교적 토대가 있건 없건 우리는 인간으로서 사랑, 친절, 애정의 근본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속한 종교인 불교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의 책 전체를 일관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샤키야무니 붓다의 본래 가르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가 부정하는 종교는 교리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배타적 공동체’로서의 종교입니다. 전통이라는 미명으로 고착화 된 제도와 의례, 신(神)을 대신한다는 사제주의의 폐해, 그리고 수행보다는 예배와 기도가 자신을 구원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의 수동적인 종교 생활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인간의 기본적 영성(spirituality)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근(善根) 혹은 불성(佛性)이 의미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구원받아야 할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불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 책은 서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종교 현상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조사기관 퓨 리서치(Pew Research)에서 2017년에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영적이지만 종교를 믿지 않는’ 소위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 전체 종교인구의 27%에 달한다고 합니다. 불과 5년 전의 19%에 비한다면 단기간에 엄청나게 늘어난 수치이며 지금도 계속 증가 추세라고 합니다. 이들 SBNR은 ‘교회’에 가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종교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 서적 읽기, 명상, 봉사 등의 활동을 통해 나름대로 ‘종교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불교에 우호적이고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마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행복추구를 위한 영적인 ‘삶의 방식’(lifestyle)으로 혹은 무신론적 철학 체계로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종교를 넘어』는 오늘날 서구사회에서의 탈종교 현상 그리고 SBNR의 등장을 의식하면서 “불교는 당신들이 믿어왔던 그런 ‘종교’와 다르다”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불교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종교’(religion)라는 개념에는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종교(religion)라는 명사(名詞)는 불교에 덧씌워진 이름입니다. 불교가 서구적 관념의 ‘종교’의 하나로 분류되면서 마치 우리 식단을 서양 식단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난처해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국을 스프라고 불러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찬이란 우리 식단에서는 말 그대로 ‘밥과 더불어 먹는 음식’이지만 서양 식단에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애매합니다. 에피타이저라 할 수도 없고 메인 디시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반찬을 ‘사이드 디시’라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반찬의 의미와 역할에 합당한 명칭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cst_inmun_20210112_02.jpg


불교가 ‘종교’라는 범주에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여러 인식론적 문제들을 이 글에서 다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의미하는 종교 즉 ‘religion’은 우리가 종교를 이해하고 있는 내용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religion은 연대(連帶)와 연결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강한 응집력을 전제로 하는 커뮤니티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도시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유럽 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중심은 곧 종교 공동체였고 이교도(異敎徒)는 교화의 대상이거나 배척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집안 내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곧 한 집안, 한 마을에 속 한다는 증명서이거나 일종의 멤버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서구적 관점에서 종교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이미 ‘주어진 정체성’이었습니다. 한 가족 그리고 한 마을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이 멤버쉽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것은 교회에 ‘가느냐,’ ‘가지 않느냐’로 결정되었습니다. 교회에 가야만 멤버쉽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계에서 일요일 교회에 가는 신도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두고 ‘탈종교’라고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의 경우, 특히 불교의 경우를 보면 일년내내 절에 가는 일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불교인이라 자처하는 분들도 많고 반대로 불교인이 아니면서도 절을 찾아 쉬기도 하고 며칠씩 머무르기도 합니다. 절에서도 불교인 여부를 묻는 일도 없습니다. 불교는 멤버쉽에 기반한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통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에 가지 않아도 스스로 불제자임을 자처했고 절에 계신 스님들도 불교 신도들만을 골라 반기는 일은 없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급격하게 성장해온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와 경쟁하는 가운데 불교종단에서는 교회의 신자 관리를 벤치마킹해서 ‘원찰’ ‘신도증’ 등과 같은 멤버쉽에 기반한 포교활동을 강조해왔지만 별 성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은 종교를 ‘성인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대와 연결을 의미하는 서양의 종교 관념은 필연적으로 ‘안’과 ‘밖’ ‘신자’와 ‘비신자’ 등 배타적 성격을 갖게 됩니다만, ‘성인의 가르침’으로서 종교를 이해하는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종교를 개인의 선택이라고 이해한 역사는 근대 이후이며 그조차도 서양인들에게는 어렵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하바드 대학 출신의 스님’으로 잘 알려진 현각스님은 원래 가톨릭 집안 출신입니다. 그 분은 삭발과 승복 그리고 불교 수행의 스님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개종한 적이 없다”라고 늘 말하고 다닙니다. 한국의 불교인들에게 현각스님의 이런 태도는 의외이긴 하지만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한편 한국인들이 가족 내에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서양인들은 매우 놀랍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저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죠.

2014년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실태 조사’를 보면 한국인의 종교 인식이 잘 드러납니다. “종교를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를 질문에 대해 한국 종교인구의 70%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10%),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60%)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두 이유는 ‘복(건강, 재물, 성공 등)을 받기 위해’(15%) ‘죽은 다음의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서’(14%)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종교 관념은 다른 나라 특히 기독교 중심의 서양의 종교 관념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 미국인의 27%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고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오늘날 미국인들은 ‘마음의 평안’과 ‘삶의 의미’를 위해 ‘교회’를 떠나 자신만의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한국 종교인구의 70%가 종교를 갖는 이유를 ‘마음의 평안’과 ‘삶의 의미’에서 찾는다고 하는 것은 탈종교 시대 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일신하고 어떻게 새로운 역할에 부응해야 할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가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대중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 학교, 직장, 사회 어디에서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마음은 허덕대거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정신 안정을 위한 약물은 오용·남용되고 있고 삶의 의미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에 가려 찾아보기 힘든 지경입니다.

붓다는 “내가 가르치는 것은 고통과 그 고통의 소멸이다”라고 했습니다. 고통의 소멸은 불교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불교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거기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탈종교 시대의 윤리에 대해 언급하면서 “도덕의 의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하라리의 이 언급을 ‘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천오백년전 붓다의 가르침을 오늘의 맥락에서 잘 설명해 주는 훌륭한 주석이라고 생각합니다.



cho_20220111.jpg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