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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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희망] 무망감 이론 (Hopelessness Theory) (김향숙 교수)

2022-03-15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보고서(보건복지부, 2021a) 에 따르면 한국의 정신장애 평생유병률은 27.8%에 이르며, 즉 인구 중 ¼ 이상이 평생 동안 우울장애나 불안장애 등의 정신적인 어려움을 적어도 한 번 이상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정신건강의 문제는 COVID-19 의 장기화에 따라 더욱 심각해지는 추세에 있으며, 이를 반영하듯 2020년 3월에 9.7% 이던 자살사고의 비중은 2021년 12월에 13.6%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보건복지부, 2021b). 또한 자살에 대한 생각의 수준을 넘어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여 사망에 이른 사람의 수는 2020년 기준으로 13,195명으로, 하루에 평균적으로 36.1명에 이르는 개인이 자살로 인해 사망하였다(보건복지부, 2021a).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국가 중 1위에 해당하는 수치로서, 자살에 따른 사회적 손실은 2015년 기준 약 6조 448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된 바 있다(건강보험공단, 2017). 이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 자살의 문제는 개인적 수준을 넘어서 생산성 손실 및 전반적인 국가 경쟁력의 악화 등을 초래하는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따라서 자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 또한 개인적인 수준에서부터 범국가적인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이루어질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중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자살사고 및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접근 중 하나로 Wenzel과 Beck(2008)의 자살에 대한 인지행동치료 모델(Cognitive Behavioral Therapy for Suicide)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자살에 이르는 과정에는 개인의 타고난 기질적 취약성, 주의편향이나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자각과 같은 인지적 특성 등 다양한 심리적 요인들이 관여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Wenzel과 Beck은 만성적 무망감(chronic hopelessness), 즉 희망이 없다는 신념이 자살 취약성에 미치는 역할에 주목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울한 개인이 자살시도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지만 Beck 등의 연구에 따르면(예: Beck, Kovacs, & Weissman, 1975), 우울의 정도와 상관없이 무망감이 심할수록 자살의도나 시도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개인은 어떤 경우에 희망이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일까? 무망감 이론(hopelessness theory)은 학습된 무력감 이론(learned helplessness theory; Seligman & Maier, 1967)에서 비롯된다. 즉 통제할 수 없는 부정적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개인은 해당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며 우울에 취약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Abramson과 동료들 (1978)은 부정적 생활 사건 자체의 영향에 더하여 개인이 그 사건의 원인을 해석하는 방식, 즉 귀인(causal attribution)의 역할에 초점을 두었다. 예컨대, 친밀한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그러한 갈등의 원인이 나의 대인관계 능력의 부족에 있고(내부적 귀인), 이는 특정인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 전반, 나아가 업무나 학업과 같은 삶의 전체적인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전반적 귀인), 이렇듯 부족한 대인관계 능력은 앞으로 변하거나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믿을수록(안정적 귀인), 무망감, 즉 희망이 없다는 인식이 심화되고 우울증과 자살에 취약해진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무망감의 해결은 정신건강과 자살의 문제에 개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즉 개인이 일상의 부정적인 사건들에 보다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문제해결능력을 고양시키며, 무기력, 사랑받지 못함, 무가치감과 같은 신념들을 다루고 자기 수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더하여, 현재의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변화하고 나아질 것이라는 신념을 가질 수 있도록 희망을 고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절망에 가려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주일 전, 한 달 전, 1년 전의 나와 나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현재와 같지만은 않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1주일 후, 한 달 후, 1년 후의 나에게도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 희망은 이렇듯 변화에 대한 신념, 내가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그 상황에서 느끼는 고통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인식에 뿌리를 둔다. 그런 점에서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에서 절망의 끝에 선 Red 가 삶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읇조린 마지막 대사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 I hope to see my friend and shake his hand. I hope the Pacific is as blue as it has been in my dreams. I hope.” 결국 삶의 척박함 속에서 길어올리는 희망이야말로 오늘 하루를 버티고, 다시 또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건강보험공단 (2017). 건강보장정책 수립을 위한 주요 질병의 사회경제적 비용 분석.
• 보건복지부 (2021a).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보고서.
• 보건복지부(2021b). 2021년 코로나19 국민 정신건강 실태조사.
• 통계청(2020). 2020년 사망원인통계.
• Abramson, L. Y., Seligman, M. E., & Teasdale, J. D. (1978). Learned helplessness in humans: Critique and reformulation. Journal of Abnormal Psychology, 87(1), 49–74. https://doi.org/10.1037/0021-843X.87.1.49
• Beck, A. T., Kovacs, M., & Weissman, A. (1975). Hopelessness and suicidal behavior: An overview.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234(11), 1146-1149.
• Seligman, M. E., & Maier, S. F. (1967). Failure to escape traumatic shock.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74(1), 1–9. https://doi.org/10.1037/h0024514
• Wenzel, A., & Beck, A. T. (2008). A cognitive model of suicidal behavior: Theory and treatment. Applied and Preventive Psychology, 12(4), 18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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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숙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및 희망연구소 소속연구자
우울과 불안과 같은 정서적 어려움의 원인과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임상심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