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기는 삶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왜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사건인 데도 우리는 죽음을 삶의 공간에서 말끔히 치운 채 전혀 그렇지 않은 듯 불멸자의 태도로 살 아가기 때문이며, 그로써 삶이 빈약해질 소지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예리한 의식이 없이는, 죽는 순간까지 삶을 의미 있고 충만하게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렇 게 썼다. “삶의 게임에서 최고의 위험 곧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지 않을 때, 삶은 궁핍하고 흥미를 잃는다. 말하자면, 파트너 양자가 심각한 결말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하는 대륙의 연애와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처음부터 이해하는 미국의 불장난처럼 삶이 얕고 공허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우리의 삶이 슬픈 것은, 체스처럼 잘못된 단 한 수로 게임을 잃을 수도 있는데, 체스와 달리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혹은 ‘언제든’ 소멸할 운명에 사로잡힌 존재는 변함없이 늘 있는 존재와 다르다. 우리의 마음을 끌지도 붙잡지도 못하는 후자와 달리,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순간 귀하고 아름답다. 로버트 카스텐바움(Robert Kastenbaum)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삶을 충만하게 향유하고자 한다면 죽음을 첨예하게 인식해야 한다.” 죽음 앞에 가벼운 존재는 없으며, 죽음 앞에 선 존재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 프로이트는 죽음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며 본격적으로 정리한 자신의 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삶을 원한다면 죽음을 대비하라.”
그러니 자신의 죽음을 남의 일로 여기듯 사는 것은 분명 (큰) 실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맛을 입술에 지니고 죽음이라는 말을 혀에 올려”둔 채 사는 몽테뉴식의 방식도 (큰) 문제일 수 있다. 자칫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멜랑콜리아가 그렇듯, 삶이 쪼그라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두려움에 의해 삶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고, 삶의 기쁨에 의해 삶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는 죽어가며 살고 후자는 살아가며 죽는다.” 칼렌(Horace Kallen)의 말인데,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충만하게, 그리고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식으로 충실하게 사는 것, 나는 그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급적 온전한 삶의 자유다. 죽음의 두려움, 심지어 세계의 지평마저 우리를 제한할 수 없는 자유.
그러니 다시, 죽음의 두려움이 문제다. ‘인류의 현자’라 불리는 수많은 큰 선생들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을 구했다. 어떤 이(소크라테스)는, 마치 대개의 종교적 삶이 그렇듯, 죽음 이후의 세상을 참다운 세상으로 믿음으로써, 어떤 이(스토아주의자)는 오직 합리적 사고로, 또 어떤 이(몽테뉴)는 죽음의 일상화를 통해 그리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모든 탁월한 선생들에게 닫혀 있던 과학이 가져다준 뜻밖의 사례들로 그리할 소지가 생겼다.
특히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임사(臨死)체험은 놀랍다. 심장이 마비되면 뇌에 혈류가 멈춰 2초 안에 의식을 잃는다. 10초에서 20초 후에는 대뇌피질의 활동이 사라져 EEG가 수평선이 된다. 뇌간의 활동도 모두 폐지된다. 그런데 임사체험 연구에 따르면, 2분에서 8분 정도 심장이 멈추거나, 5분 동안 의식이 없거나 3주간 혼수상태(coma)에 있던 환자 중 20퍼센트 가량은 그동안 지각한 내용을 기억해내는데, 그들 중 90퍼센트는 객관적으로 확증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다.
흥미로운 것은,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의 변화다. 임사의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의 내부에 하나의 새로운 생명뿐 아니라 연결됨과 하나 됨을 경험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 영성이 고양되어 자비와 무조건적 사랑의 감각이 강화되고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죽음의 문턱은 평화와 희망의 감정이 지배한다. 임사체험 연구가 주는 또 다른 밝은 소식은, 오랫동안 우리가 꺼렸던 비명횡사든 천수를 누린 자연사든, 그러한 현상이 죽음의 형태와 상관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사태가 진실로 그렇다면, 죽음의 두려움은 죽는 과정뿐이다.
그런데 임사체험이 없는 우리는, 죽으면 ‘나’가 없어진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두렵다. 신, 사후세계, 영혼 등의 문제를 놓고 수백 년간 긍정과 부정의 의견이 대립해 왔는데, 양측 모두 합리적 논거를 지니며, 어느 쪽도 반대편이 분명하게 잘못이라고 확증할 수 없다. 궁극적 판단과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대체적으로, 이성의 한계를 중시하거나 영성을 지닌 사람은 긍정의 입장을, 명석판명한 것에 주목하거나 과학적 정신을 지닌 사람은 부정의 입장을 견지한다. 제임스(William James)에 따르면, 전자가 진리를 붙잡기 위해 오류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후자는 오류를 회피하기 위해 진리의 개연성에 결코 뛰어들지 않는다. “거짓을 믿기보다 영원히 믿음 없는 편”을 택한다. 이쪽도 저쪽도 택하지 않는 불가지론자 아인슈타인 또한, 후자처럼 오류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운 대신 진리의 사태와 무관하다.
제임스는 전자를 주장한다. “어떤 사실은, 첫 단계의 믿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절대 도래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사실에 대한 믿음이 그 사실을 창조하는 데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한 이후 자신이 생각한 사람으로 판명날지 여부를 온전히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청혼을 무한정 미룬다면, 그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사람과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 대상이 자신을 사랑하리라는 절대적 확신이 없어도 다가가야 한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리라는 확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가가지 않으면,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죽음으로 영혼이 사라진다는 입장과 그와 무관하게 영혼이 존속한다는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전자와 같은 사태를 직면하기 때문이다. 전자를 택할 경우 ‘나’의 소멸의 사건 앞에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과제가, 후자를 택할 경우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고 견고하게 유지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어느 쪽이든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의 두려움을 감당할 처지에 놓인다. 후자를 제안하는 제임스는 피츠(Fitz James Stephen)의 글로써 자신의 견해를 마무리한다.
“어떤 사람이 신과 미래에 대해 등을 돌리기로 결정한다면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누구도 그가 잘못이라는 것을 합리적 의심을 넘어 보여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와 달리 생각하고 그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가 잘못이라는 것을 누구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최상이라 생각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며, 만약 그가 틀리다면 그에게 그만큼 나쁠 것이다. 우리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산길에 서 있는데, 그 사이로 기만적일지 모를 길을 가끔 일별한다. 우리가 가만히 서 있으면 얼어 죽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택하면 부딪쳐 몸이 산산조각날 것이다. 올바른 길이 있는지 여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하거라, 그리고 훌륭한 용기를 내어라.’ 최상을 위해 행동하고, 최상을 희망하고, 그리고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라.... 만일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면, 죽음을 그것보다 더 좋게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죽는 과정의 두려움은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죽는’ 과정을 죽기까지 ‘사는’ 순간들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여생을 한껏 사는 것이다. 렙 (Ignace Lepp)에 따르면, “삶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는 최상이자 유일하게 효과적인 해독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사르트르의 해결책 또한 그렇다. 죽음은 무(無) 곧 삶에 속하지 않는 까닭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에 몰두할 것. 삶은 곧 행위이니, 자신이 행하는 행위에 전념하는 것이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는 이렇게 썼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한 삶이다.” <세르반테스는 오직 하나>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이렇게 썼다. “죽음 그까짓 거, 이봐 형씨들 /힘든 건 /삶이라네.”
몰두하는 자는 무(無)시간적 존재다. 시간을 초월한다. “몰두는, 각각의 프로젝트로써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 각자를 불멸하게 만든다.” 사르트르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문학과 자신의 생존을 동일시했다. 다시 부코스키의 말이다. “중요한 건 오직 다음 줄이었다. 다음 줄이 풀려나오지 않는다면, 기술적으론 비록 살아 있다 할지라도, 난 죽은 사람이었다.” 늘 자살을 생각한다는 말년의 그는, “좋은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시가 날 계속하도록 지탱해줄 버팀목이 된다.”고 썼다.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은 자신의 시 <파르카 여신에게(Walter Kaufmann 번역)>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단 하나의 여름은 나에게 위대한 힘을 허락하고, /단 하나의 가을은, 내 연주의 감미로움에 흠뻑 젖어, /온전히 익은 노래를 위한 것이니, /나의 심장은 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살아서, 신적 권리를 얻지 못한 /영혼은 아래 세계에서 안식할 수 없으나. /한 번 내가 마음 쏟은 것, 성스러운 것, /나의 시가 완성되었다. /그러니 그림자 세계의 고요가 환대되어야 하리! /내 리라가 거기 아래로 나와 동반할 수 없겠으나 /나는 만족하리. 나는 한 번 /신들처럼 살았으니, /더 필요한 것이 없구나.” 살아생전, 그리고 죽어서도 오랫동안 익명의 시인이었던 그가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노래한 것은, 자신이 완성한 시가 세상의 명성이나 부귀 따위의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흡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코스키의 삶도 그러했다고 말년에 쓴 그의 글로써 짐작할 수 있다. “난 그 어느 누구와 시합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불멸의 명성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따윈 전혀 관심 없다. 중요한 건 살아 있는 동안의 행동이다. (...) 영광은 활기차게 덤벼드는 자의 것이다. 죽음 따윈 엿이나 먹어라.”
이종건 건축가, 작가
건축가이자 작가다. 『텅 빈 충만』, 『문제들』, 『건축 없는 국가』 등 여러 권의 건축 비평서를 냈다. 에세이 『인생거울』과 『건축사건』을, 장편소설 『건축의 덫』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차이들: 현대 건축의 지형들』, 『건축 텍토닉과 기술 니힐리즘』 등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과 삶의 환경을 숙고하고자 건축 비평이 아닌 다른 장르의 글쓰기도 꾸준히 시도한다. 최근에 쓴 책으로는 『지금은 집을 지을 시간』, 『숨 멎은 공간: 그래서 건축 비평가로 산다』, 『좋은 삶의 기술』이 있다. 마인드 랩(M.lab) 편집 고문을 맡고 있다.
죽음을 이기는 삶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왜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사건인 데도 우리는 죽음을 삶의 공간에서 말끔히 치운 채 전혀 그렇지 않은 듯 불멸자의 태도로 살 아가기 때문이며, 그로써 삶이 빈약해질 소지가 농후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예리한 의식이 없이는, 죽는 순간까지 삶을 의미 있고 충만하게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렇 게 썼다. “삶의 게임에서 최고의 위험 곧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지 않을 때, 삶은 궁핍하고 흥미를 잃는다. 말하자면, 파트너 양자가 심각한 결말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하는 대륙의 연애와 대조적으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처음부터 이해하는 미국의 불장난처럼 삶이 얕고 공허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우리의 삶이 슬픈 것은, 체스처럼 잘못된 단 한 수로 게임을 잃을 수도 있는데, 체스와 달리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혹은 ‘언제든’ 소멸할 운명에 사로잡힌 존재는 변함없이 늘 있는 존재와 다르다. 우리의 마음을 끌지도 붙잡지도 못하는 후자와 달리,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순간 귀하고 아름답다. 로버트 카스텐바움(Robert Kastenbaum)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삶을 충만하게 향유하고자 한다면 죽음을 첨예하게 인식해야 한다.” 죽음 앞에 가벼운 존재는 없으며, 죽음 앞에 선 존재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 프로이트는 죽음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며 본격적으로 정리한 자신의 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삶을 원한다면 죽음을 대비하라.”
그러니 자신의 죽음을 남의 일로 여기듯 사는 것은 분명 (큰) 실수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맛을 입술에 지니고 죽음이라는 말을 혀에 올려”둔 채 사는 몽테뉴식의 방식도 (큰) 문제일 수 있다. 자칫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해, 멜랑콜리아가 그렇듯, 삶이 쪼그라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두려움에 의해 삶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고, 삶의 기쁨에 의해 삶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는 죽어가며 살고 후자는 살아가며 죽는다.” 칼렌(Horace Kallen)의 말인데,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충만하게, 그리고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식으로 충실하게 사는 것, 나는 그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급적 온전한 삶의 자유다. 죽음의 두려움, 심지어 세계의 지평마저 우리를 제한할 수 없는 자유.
그러니 다시, 죽음의 두려움이 문제다. ‘인류의 현자’라 불리는 수많은 큰 선생들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을 구했다. 어떤 이(소크라테스)는, 마치 대개의 종교적 삶이 그렇듯, 죽음 이후의 세상을 참다운 세상으로 믿음으로써, 어떤 이(스토아주의자)는 오직 합리적 사고로, 또 어떤 이(몽테뉴)는 죽음의 일상화를 통해 그리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모든 탁월한 선생들에게 닫혀 있던 과학이 가져다준 뜻밖의 사례들로 그리할 소지가 생겼다.
특히 임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임사(臨死)체험은 놀랍다. 심장이 마비되면 뇌에 혈류가 멈춰 2초 안에 의식을 잃는다. 10초에서 20초 후에는 대뇌피질의 활동이 사라져 EEG가 수평선이 된다. 뇌간의 활동도 모두 폐지된다. 그런데 임사체험 연구에 따르면, 2분에서 8분 정도 심장이 멈추거나, 5분 동안 의식이 없거나 3주간 혼수상태(coma)에 있던 환자 중 20퍼센트 가량은 그동안 지각한 내용을 기억해내는데, 그들 중 90퍼센트는 객관적으로 확증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다.
흥미로운 것은,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의 변화다. 임사의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의 내부에 하나의 새로운 생명뿐 아니라 연결됨과 하나 됨을 경험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 영성이 고양되어 자비와 무조건적 사랑의 감각이 강화되고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죽음의 문턱은 평화와 희망의 감정이 지배한다. 임사체험 연구가 주는 또 다른 밝은 소식은, 오랫동안 우리가 꺼렸던 비명횡사든 천수를 누린 자연사든, 그러한 현상이 죽음의 형태와 상관없다는 것이다. 죽음의 사태가 진실로 그렇다면, 죽음의 두려움은 죽는 과정뿐이다.
그런데 임사체험이 없는 우리는, 죽으면 ‘나’가 없어진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두렵다. 신, 사후세계, 영혼 등의 문제를 놓고 수백 년간 긍정과 부정의 의견이 대립해 왔는데, 양측 모두 합리적 논거를 지니며, 어느 쪽도 반대편이 분명하게 잘못이라고 확증할 수 없다. 궁극적 판단과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대체적으로, 이성의 한계를 중시하거나 영성을 지닌 사람은 긍정의 입장을, 명석판명한 것에 주목하거나 과학적 정신을 지닌 사람은 부정의 입장을 견지한다. 제임스(William James)에 따르면, 전자가 진리를 붙잡기 위해 오류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후자는 오류를 회피하기 위해 진리의 개연성에 결코 뛰어들지 않는다. “거짓을 믿기보다 영원히 믿음 없는 편”을 택한다. 이쪽도 저쪽도 택하지 않는 불가지론자 아인슈타인 또한, 후자처럼 오류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운 대신 진리의 사태와 무관하다.
제임스는 전자를 주장한다. “어떤 사실은, 첫 단계의 믿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절대 도래할 수 없는, 그리고 어떤 사실에 대한 믿음이 그 사실을 창조하는 데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한 이후 자신이 생각한 사람으로 판명날지 여부를 온전히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청혼을 무한정 미룬다면, 그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사람과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 대상이 자신을 사랑하리라는 절대적 확신이 없어도 다가가야 한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리라는 확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가가지 않으면,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죽음으로 영혼이 사라진다는 입장과 그와 무관하게 영혼이 존속한다는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전자와 같은 사태를 직면하기 때문이다. 전자를 택할 경우 ‘나’의 소멸의 사건 앞에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과제가, 후자를 택할 경우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고 견고하게 유지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어느 쪽이든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의 두려움을 감당할 처지에 놓인다. 후자를 제안하는 제임스는 피츠(Fitz James Stephen)의 글로써 자신의 견해를 마무리한다.
“어떤 사람이 신과 미래에 대해 등을 돌리기로 결정한다면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다. 누구도 그가 잘못이라는 것을 합리적 의심을 넘어 보여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와 달리 생각하고 그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가 잘못이라는 것을 누구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이 최상이라 생각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며, 만약 그가 틀리다면 그에게 그만큼 나쁠 것이다. 우리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산길에 서 있는데, 그 사이로 기만적일지 모를 길을 가끔 일별한다. 우리가 가만히 서 있으면 얼어 죽을 것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택하면 부딪쳐 몸이 산산조각날 것이다. 올바른 길이 있는지 여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하거라, 그리고 훌륭한 용기를 내어라.’ 최상을 위해 행동하고, 최상을 희망하고, 그리고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여라.... 만일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면, 죽음을 그것보다 더 좋게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죽는 과정의 두려움은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죽는’ 과정을 죽기까지 ‘사는’ 순간들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여생을 한껏 사는 것이다. 렙 (Ignace Lepp)에 따르면, “삶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는 최상이자 유일하게 효과적인 해독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사르트르의 해결책 또한 그렇다. 죽음은 무(無) 곧 삶에 속하지 않는 까닭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에 몰두할 것. 삶은 곧 행위이니, 자신이 행하는 행위에 전념하는 것이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는 이렇게 썼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한 삶이다.” <세르반테스는 오직 하나>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이렇게 썼다. “죽음 그까짓 거, 이봐 형씨들 /힘든 건 /삶이라네.”
몰두하는 자는 무(無)시간적 존재다. 시간을 초월한다. “몰두는, 각각의 프로젝트로써 그때 거기서,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 각자를 불멸하게 만든다.” 사르트르는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문학과 자신의 생존을 동일시했다. 다시 부코스키의 말이다. “중요한 건 오직 다음 줄이었다. 다음 줄이 풀려나오지 않는다면, 기술적으론 비록 살아 있다 할지라도, 난 죽은 사람이었다.” 늘 자살을 생각한다는 말년의 그는, “좋은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시가 날 계속하도록 지탱해줄 버팀목이 된다.”고 썼다.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은 자신의 시 <파르카 여신에게(Walter Kaufmann 번역)>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단 하나의 여름은 나에게 위대한 힘을 허락하고, /단 하나의 가을은, 내 연주의 감미로움에 흠뻑 젖어, /온전히 익은 노래를 위한 것이니, /나의 심장은 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살아서, 신적 권리를 얻지 못한 /영혼은 아래 세계에서 안식할 수 없으나. /한 번 내가 마음 쏟은 것, 성스러운 것, /나의 시가 완성되었다. /그러니 그림자 세계의 고요가 환대되어야 하리! /내 리라가 거기 아래로 나와 동반할 수 없겠으나 /나는 만족하리. 나는 한 번 /신들처럼 살았으니, /더 필요한 것이 없구나.” 살아생전, 그리고 죽어서도 오랫동안 익명의 시인이었던 그가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노래한 것은, 자신이 완성한 시가 세상의 명성이나 부귀 따위의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흡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코스키의 삶도 그러했다고 말년에 쓴 그의 글로써 짐작할 수 있다. “난 그 어느 누구와 시합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불멸의 명성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따윈 전혀 관심 없다. 중요한 건 살아 있는 동안의 행동이다. (...) 영광은 활기차게 덤벼드는 자의 것이다. 죽음 따윈 엿이나 먹어라.”
이종건 건축가, 작가
건축가이자 작가다. 『텅 빈 충만』, 『문제들』, 『건축 없는 국가』 등 여러 권의 건축 비평서를 냈다. 에세이 『인생거울』과 『건축사건』을, 장편소설 『건축의 덫』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차이들: 현대 건축의 지형들』, 『건축 텍토닉과 기술 니힐리즘』 등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과 삶의 환경을 숙고하고자 건축 비평이 아닌 다른 장르의 글쓰기도 꾸준히 시도한다. 최근에 쓴 책으로는 『지금은 집을 지을 시간』, 『숨 멎은 공간: 그래서 건축 비평가로 산다』, 『좋은 삶의 기술』이 있다. 마인드 랩(M.lab) 편집 고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