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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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희망] 학습된 무기력 (Learned Helplessness) (나진경 교수)

2022-01-05

학습된 무기력 (Learned Helplessness)

1967년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마틴 셀리그만의 연구실에서 매우 흥미로운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칸막이를 통해 두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는 상자를 이용해 개들의 행동을 관찰하였다. 구체적으로 연구자들은 상자의 두 구역 중에 한 구역에 전기 충격을 가했을 때 개들이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다른 구역으로 칸막이를 넘어 이동하는 것을 얼마나 빨리 학습하는지를 관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개들은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어렵지 않게 터득하였다. 하지만 특별한 사전 조치를 경험했던 개들은 흥미로운 행동패턴을 보였다. 이 개들은 상자에 들어가기 전에 무선적으로 주어지는 전기 충격에 노출되었는데, 이런 경험을 갖고 있는 개들은 칸막이를 넘어가는 간단한 행동으로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웅크린 채 전기 충격을 받아들였다. 마치 전기 충격은 어차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학습한 것처럼 무기력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이 현상을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불렸다. 이 연구의 결과에서 두 가지 지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기력한 반응은 통제할 수 없이 무선적으로 주어지는 전기 충격을 통해 학습되었다는 점이다. 즉, 다른 “보통의” 개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면 같은 행동 패턴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학습된 무기력은 새로운 상황으로 전이 된다. 일단, 무망감을 학습하게 된 개들은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을 때에도 수동적으로 반응했다.

보통의 개를 간단한 장애물도 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동시에 무서운 결과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에 관한 이야기, 특히 철저하게 통제된 연구실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 개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여러 후속 연구들이 학습된 무기력이 보통의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례로 우리 연구실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불공정한 경험을 빈번하게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하위 계층의 사람들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일상 생활을 영위할 가능성이 높은 고소득 전문직 종사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에서 실험 동조자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불공정한 제안을 받았을 때, 하위 계층의 참가자들은 상위 계층의 참가자들에 비해 제안이 덜 불공정하다고 지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런 지각은 새로운 상황에서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전 단계에서 불공정한 제안에 둔감하게 반응한 사람일수록 불공정한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행동에 소극적이었고, 또한 앞으로도 불공정한 처우가 기대되는 디폴트 옵션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높았다. 즉, 일상에서 통제감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이 있어 불공정한 대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이런 수동성은 더욱 큰 불공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희망의 부재를 목격할 수 있다. 한국의 청년 세대를 N포 세대라고 한다. 현재 한국의 상황을 감안하면 연애를, 결혼을, 취업을, 육아를 포기해야 한다는 자조적인 의미이다. 이런 현상은 청년세대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10명 중 8명이 한국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보고했으며, 계층 이동 가능성을 10%이하로 보고한 사람들도 50.5%나 있었다. 이처럼 희망의 부재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에 기반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정”을 한국 사회의 핵심 이슈로 꼽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그에 합당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두 연구의 결과는 이전의 경험이 학습된 무기력의 핵심적인 요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전기 충격에 관한 사전 경험이 개의 반응을 결정하였으며, 삶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상/하위 계층의 차이가 불공정한 제안에 대한 반응의 차이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학습된 무력감이 아닌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현재의 상황만이 아닌 각자의 배경과 삶의 역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출처

· Seligman, M. E., & Maier, S. F. (1967). Failure to escape traumatic shock.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74(1), 1–9. https://doi.org/10.1037/h0024514

· 닐슨 "한국인 80%, 사회 공정하지 않다 생각” (2017.3.9).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09/0200000000AKR20170309081400030.HTML


#희망 #공정



나진경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및 희망연구소 소장
사회문화적인 요인을 중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