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지관

위클리 지관에서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잠시 '멈춤'신호를 받을 수 있는 삶의 물음들을 살펴봅니다. 책, 영화, 강연, 칼럼 등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서 매주 하나의 물음을 사유합니다. 매주 수요일,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VOL.142] 판소리를 좋아하세요?

이치훈
2024-06-04
조회수 63


유월 들어 며칠 사이 하늘 위 펼쳐지는 풍광이 놀라우리만치 맑고 아름답습니다. 선명한 색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낮의 풍경과, 하늘 도화지 위를 주황빛부터 보라빛까지 그라데이션 물들이는 노을녘 풍경, 오후 8시 넘어서야 차츰 어스름해지는 여름 밤하늘 위에 눈썹처럼 걸린 그믐달의 풍경까지 모두가 아름다운 한때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청안해지니, 들리는 소리와 공기의 내음까지 그윽하고 풍요롭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 이 여름이 건넨 감각선물을 받지 못하셨다면, 잠시 하시던 일을 멈추고 창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시면 더 좋겠네요) 여름 한가운데로 고개를 내밀어보세요. 참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에 많은 청중들이 모이면,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소리꾼’이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 노래와 말 그리고 몸짓을 섞어가며 긴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효녀 심청이 태어나자마자 시련을 겪으며 효행으로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가 물 아래 용궁에서 황후가 되고 맹인 잔치를 여는데 그 자리에서 다시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부터 음담패설, 사회풍자, 탐관오리 비판까지, 판소리는 조선 후기 시대 서민들의 눈물과 웃음이 고스란히 담긴 오락이자 마당 위에서 펼쳐지는 민속 연희로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양반들도 즐기는 문화가 되고, 왕을 위한 예술 공연으로까지 이어지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지나며 그 맥이 끊기게 되는데, 1인창이었던 판소리는 여러 소리꾼이 함께하는 창극과 마당극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가까스로 판소리의 명맥을 입에서 입으로, 호흡에서 호흡으로 이어오는,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채수정 명창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소리’, 판소리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채수정 명창은 소리꾼이기도 하지만 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최초의 판소리 음악학 박사가 됐을 뿐 아니라, 경희대 국문과에서 고전문학인 판소리 사설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국악고 2학년 때 스승 인간문화재 박송희를 만나 스승이 세상을 떠나는 2017년까지 30년 넘게 사사했는데, 채 선생은 내공 깊은 국문학자들이 스승을 찾아와 소리를 배우는 것을 보면서 문학으로서의 판소리에 관한 공부 욕심이 발동했다고 말합니다. 2011년 임방울국악제에서 ‘흥보가’ 중 ‘두 손 합장’ 대목으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명창 반열에 오른 채 선생은 국내와 미국·일본·영국·프랑스·브라질 등지에서 ‘흥보가’와 ‘적벽가’를 여러 차례 완창하였습니다. 또한, 2022년에는 세계판소리협회를 출범한 후 〈판소리 세계화의 현황과 미래전략〉, <판소리 20시간 릴레이 프로젝트> 등 신선한 판소리 공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판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일도 맡고 있습니다.


“우리가 노래라고 할 때는 인간의 목소리로 가사를 부르는 것을 말하잖아요. 판소리의 소리는 훨씬 더 넓어요.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심지어 귀신 소리까지 있어요. 예를 들어, 춘향가에서 이도령을 그리는 춘향이가 옥중에서 내일 죽게 생겼는데 귀신들이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있어요. 이런 소리까지 내야 하니 소리꾼이 표현해야 하는 소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발성에서 머리나 가슴을 안 쓰고 단전에서 밀고 나오는 호흡으로 하기 때문에 동굴 속에서도, 폭포수 밑에서도 소리를 하는 겁니다. 자연에서 연마해 득음의 소리를 얻어내는 게 판소리의 매력이죠.”


판소리는 17세기 중·후반 서민층을 중심으로 주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전라도권에서 섬진강을 기준으로 동편제, 서편제로 유파를 분류하고 육자배기와 무속음악 씻김굿 등 명창이 많이 나오긴 하였지만, 경기도·충청도·경상남도·경상북도에도 다 명창이 있었다고 채 선생은 말합니다. 판소리의 종류에는 "열두 마당"이라고 하는 12개의 소리가 정해져 있는데, 널리 알려진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를 포함하여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이 있습니다. 똑같은 흥보가를 30년 동안 부르는 채 선생은, 분명히 부를 때마다 완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뿐더러, ‘귀명창’들도 ‘채수정이 작년 소리 다르고 올해 소리 다르다’ 말한다고 합니다.


“귀명창은, 소리꾼들의 호흡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듣는 사람들이에요. 클래식의 경우에도 마니아들은 마리아 칼라스가 살이 쪘을 때와 빠졌을 때 소리가 다르다는 걸 안다고 하잖아요. 귀 밝은 귀명창들이 오시면 공연의 판이 확 살아요, 같이 응원해 줍니다. 잘되면 ‘얼씨구’ ‘좋구나’ 추임새를 그 자리에서 넣어주는 식으로요. 그래서 같은 흥보가라고 해도 관객이 다르기 때문에 매번 달라요.


판소리는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2003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 2008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어 우리의 소리로서 보존되고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작년, 판소리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주년을 기념하여 채 선생은 제1회 월드판소리페스티벌을 열어 이틀 동안 전국의 소리꾼 60명과 고수 20명이 함께 판소리 심포니 릴레이로 판소리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축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선생은 국악계 전반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크다고 말합니다.


판소리 같은 무형문화재는 보유자들이 돌아가시면 다 없어져요. 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호흡에서 호흡으로, 무릎과 무릎을 맞대며 이어져야 하는데 말이죠. 저희들은 ‘선생님 침을 먹고 소리를 배운다’고 했어요. 20년 이상씩 시봉을 하면서 도를 닦듯이 음(音)으로 세상을 얻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이른바 득음을 하는 명창이 계속 나와야 판소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소리꾼에게 득음의 경지란 것이 30년 공부를 해도 될까 말까인데 요즘 사람들이 어떻게 30년을 학습하겠습니까? 강요할 수도 없고요. 득음의 경지라는 게 참 어렵습니다. 큰스님께 ‘득도하셨습니까?’ 묻는 거나 똑같아요. 그 경지가 뭔지는 잘 모르는데 아주 미세하게 찾아가지는 지점은 보이거든요.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소리를 다 낼 수 있는 경지죠. 높은 소리, 낮은 소리, 큰 소리, 작은 소리를 자유자재로 내면서 가사가 담고 있는 뜻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가슴으로 받아서 부르는 경지입니다. 판소리는 1인극이잖아요. 남자, 여자, 노인부터 아기 목소리, 귀신 소리까지 내야 할 때가 있고 직업도 다양합니다. 이 모든 걸 내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할 때 득음했다고 할 수 있겠죠. 득음의 경지로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득음을 위해 목이 쉬어 터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산에서 수련하는 ‘100일 공부’를 하는데 목을 파괴하고 그 기운을 얻기 위한 거예요. 폭포수에서 혹은 동굴 속에서 온 정신을 쏟아서, 목이 쉰 상태에서 계속 노래를 하다 보면 힘만 들어가고 소리가 안 나오는데 그때 공력이 붙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 배 속에 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소리가 나요. 그렇게 해야 하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러한 수련 과정을 대부분 하기 힘들어해요."


채 선생은 적벽가 중 적벽강에서 죽은 백만 군사가 조조를 원망하는 새가 돼서 그 한을 뿜어내는 대목인 "새타령"을 특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 노래에는 병을 고쳐주고 싶어 하는 새, 가난을 극복하려고 하는 새 등 새마다 각 스토리가 있는데, 그걸 표현하면서 부르다 보면 마치 적벽강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적벽가는 중국 고전소설의 걸작 〈삼국지연의〉의 작가이며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나관중의 적벽대전(赤壁大戰)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민족의 삶, 애환과 해학을 더해 예술적 가치를 높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금년 1월에 발매된, 러닝타임이 3시간이 넘는 <채수정의 적벽가> 음반에 수록된 음원으로 "새타령"을 감상해 보시죠.


“옛날에는 초상집에 가서도 창을 했잖아요.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실제로 판소리를 하며 '아이고 아이고 어쩌고 가셨어요? 이제 가면 언제 와요? 올 날이나 일러주소.' 이렇게 말이죠. 그게 판소리입니다. 판소리로 우울증 치료를 받은 사람도 많아요. 사람들하고 소통하고 자기 스스로를 돋보이게 할 수 있게 하니까요. 요즘 같은 계절에 등산 가서 산꼭대기에 올라 판소리로,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 곧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만 세상사 쓸쓸하더라~' 이러면서 내 감정을 자연에 표현해 보세요. 속이 뻥 뚫릴걸요."


위 글은 신동아 X 플라톤아카데미 ‘길에서 만나는 인문 활동가’ 시리즈 여섯 번째 주인공, 판소리 세계화를 일구고 있는 채수정 명창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글들을 각색/편집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문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platonacademy.org/28/?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22228008&t=board  

끝으로, 서두에 언급했던, 효녀 심청이 용궁에서 열린 맹인 잔치에서 아버지와 재회하는 장면을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이 구연하고 현대적 음악 장치가 함께 어우러진 뮤지컬 <서편제> 한 부분을 남깁니다. 현대화된 국악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판소리가 우리 고유의 음악으로서 그 자리를 잘 보존하며 오래 전승되기를 깊이 바라며, 앞으로 세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기를 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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