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지관

위클리 지관에서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잠시 '멈춤'신호를 받을 수 있는 삶의 물음들을 살펴봅니다. 책, 영화, 강연, 칼럼 등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서 매주 하나의 물음을 사유합니다. 매주 수요일,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Vol.47 #이름] 나는 나의 이름에 이른다.

관리자
2022-08-02
조회수 1055


‘이름’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네이버 사전에서 ‘이름’을 검색하면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이라는 정의가 나옵니다. 여기서 다시 ‘말’을 검색하면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쓰는 음성 기호, 이 기호로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행위”라는 정의가 나옵니다. 다시 ‘기호’를 검색하면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부호, 문자, 표지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는 정의가 나오죠.

이번 호 제목인 '나는 나의 이름에 이른다'에는 '나'라는 언어적 존재의 도정(道程)을 담았습니다. 당신 또한 수많은 경험과 사유를 하며 매 순간 변화해오셨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름 자체는 변하지 않죠. 이름의 입장에서 변화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을 호명하는 뉘앙스와 방법 그리고 주어진 상황과 역할 속에서 내 또 다른 이름들과 맺는 '언어적 관계'입니다. 

이번 호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나' 그리고 '이름'에 관련된 철학, 소설, 영화를 다룹니다.


 📚 『논리-철학 논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20.06)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

논리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학에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즉, 이것과 이것은 세계 내에 존재하고, 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외견상 그것은 우리가 모종의 가능성들을 배제한다고 전제하게 될 터인데, 이는 사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논리는 세계의 한계들을 넘어가야만 할 테니까; 요컨대 만일 논리가 이 한계들을 다른 쪽으로부터도 고찰할 수 있다면 말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100쪽)

『논리-철학 논고』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로 유명한 그의 전기 철학이 담겼습니다. 당시 철학계는 언어의 정교함을 중시하며 논리적으로 오류가 없는 완전한 언어를 추구했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발간하며 철학 난제를 모두 해결했다며 홀연 철학계를 떠나버립니다(...만, 사후 유고에 드러난 후기 철학에서 자신의 책을 비판 대상으로 삼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라는 주장을 합니다. 이 책의 핵심은 그림 이론입니다. 언어의 구조와 세계의 구조가 같다는 걸 설명하는데요. 다음 설명 대로 한 장면을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린넨 천을 배경으로, 상고 머리를 한 반곱슬의 남자가 입을 꾹 다문 채 왼쪽 얼굴을 보이며, 소매를 걷은 검은색 펠트 재킷과 회갈색 바지를 입고, 오른쪽 팔을 나무 의자에 올리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올려 비스듬하게 앉아 있다.'


어때요? 제가 설명한 게 사실인가요? 👨‍🎨 위 사진 속 인물은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어떻게 언어로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걸까요? 제가 말로 설명한 그의 모습과 그의 사진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책에서는 교통사고 재판에서 모형으로 사건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예로 들어 그림 이론을 설명합니다). 정리하자면 언어는 명제로, 세계는 사태로 구성 서로 데칼코마니처럼 동일한 구조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사태'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이 될 가능성'을 뜻합니다. 결국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사실적 세계가 아니라 이런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논리적 세계이고,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언어에 대응하는 사태가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이 이론이 중요한 이유는, 기존 철학에서 주류였던 주체와 객체라는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을 드러내고 매개하는 '언어'를 분석하여 당대 철학의 난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 이를 통해 사고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후 철학이 다룰 것은 자연 과학의 명제일 뿐, 기존 철학에서 다루던 신, 윤리, 감성을 포함하여 형이상학, 미학, 종교에서의 명제가 모두 철학의 언어로 말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죠. 하지만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은, 비트겐슈타인이 그것들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 그 의미 사용과 표현이 달라 철학에서 다루기 적합하지 않다고 한 논지입니다. 

이는 유작이 된 그의 후기 철학 책들에서 심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는 분야인 '사회, 문화, 역사, 종교, 예술' 등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하는지' 분석하는 언어 비판적 차원으로 나아갔죠.

문득 궁금합니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우리 시대의 최신 과학이론, 예술, 게임, SNS, A.I. 등을 접한다면 어떤 주장을 했을까요? 언어의 한계와 세계의 한계를 어느 지점에서 고찰할까요?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뮈엘 베케트 (전승화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6.07)

 내 이름보다 낯선 목소리, 단어들, 나의 뿌리들


지금은 어딜까? 지금은 언제일까? 지금은 누구일까? 나한테 묻지 말고. 나는이라고 말하기. 생각하지 말고. 그것들을 질문이라고, 가설이라고 부르기. (9쪽)


어떤 문학은 독자를 위한다거나 유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읽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죠. 안전 장치를 확보한 관람석 없이 그 작품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단하고 위험한 사유에 동참하도록 질질 끌어갑니다. '나'에서 소외된 내 존재의 구석으로, 돌이킬 수 없는 지하로, 분열하는 뿌리로.

소설에서 화자는 “피해야만 하는 건,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바로 체계적인 사고”라고 합니다. 뚜렷한 서사, 인물 묘사, 소설 진행에 대한 설명 없이 오로지 소설을 이끄는 것은 하나의 어눌한 목소리입니다. 끝없는 의문, 말을 할 수록 드러나는 의미의 결핍, 꼬리를 무는 순환론적 사고, 괴상한 자세와 움직임, 감각의 분열과 정교한 망상들이 독자의 의식을 휘젓습니다. 맥락을 알기 힘들게 훼손된 영상, 노이즈로 가득한 녹음 기록 같은 화자의 방백. 독자는 거기에 빨려 들어가 일그러진 텍스트의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나'라고 일컫는 자신과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 사이에 관계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을 경유하죠. 형이상학적인 것, 파편화된 감각과 고기에 가까운 육체, 부유하는 먼지이자 맥락 없는 단어인 것, 시선이 고인 웅덩이이자 물의 파동인 것, 말로 창조한 자의 권능이자 말로 창조된 피조물의 한계인 것을요.

그들은 몰라, 점점 더, 그들이 나를 닮아가고 있는데도, 더 이상 그들이 필요치 않아, (...) 더 이상 입이라는 걸 느끼지 못해, 입은 필요하지 않아, 사방에 깔린 게 말이니까, 내 안에, 내 밖에, (...) 그들의 말소리가 나한테 들려, 그 소리는 듣지 않아도 돼, 머리는 없어도 돼, 그 소리를 멈출 수가 없어, 멈춰지지가 않아, 나는 말 속에 있어, 나는 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 그 모든 낯선 단어들, 먼지 같은 그 말들이 다 나야, 내려앉을 바닥도 없고, 흩날릴 하늘도 없는데도, 말을 하려고 서로 충돌하고, 말을 하려고 서로 피하면서, 서로 결합하는 단어들, 서로 떨어지는 단어들, 그 모든 단어들이 다 나라고 말을 해, (153~154쪽)


오늘의 서가 첫 번째 코너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소개했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의 명제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는 명제에서 베케트의 작품을 바라보면, 오히려 '내 언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내 세계의 토대'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교훈과 성찰을 이끌어내 보여주는 소설과 달리, 베케트의 작품들은 기존 문학 문법의 비가시적 영역, 언어적 존재가 하는 발생하는 최소-최저의 장소를 확보하려는 분투를 보여주기 때문이죠(베케트는 낯선 감각, 관습에 물들지 않은 글쓰기를 위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교차하며 집필하고 자기 작품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특정 사건, 개념, 이름만으로 다 밝힐 수 없는, 존재의 뿌리를 파고드는 글쓰기. 무용(無用)의 무용(舞踊), 종결되지 않는 말과 시작되지 않는 침묵, 위계와 인과와 자의와 타의의 구분을 무화하기, 아직-아직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존재) 없이도 있는 말...


나는 이제 깨어날 거야, 침묵 속에서, 더 이상 잠들지 않을 거라고, 그게 나일 테니까, (...) 그것들이 있으니까, 그것들을 말해야만 해, 그 단어들이 나를 찾아낼 때까지, 그 단어들이 나한테 말을 걸 때까지, 참 이상한 벌이야, 참 이상한 잘못이지, 계속해야만 하니까, (...) 어쩌면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내 이야기로 통하는 문 앞까지 나를 데려갔을 수도 있고, (198쪽)


그렇다면 대체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자'는 누구이며 어떤 '상태'에 가까울까요? 당신이 오늘 잠자리에서 깨어나기 직전, 꿈의 소용돌이를 생각해 보죠. 당신이라는 나비가 ‘$%name%$’라는 꽃을 알아보고 날아와 앉기 이전에, 번데기 상태의 혼몽한 잠꼬대를요.

그 말의 주인은 누구였나요? 지금은 휘발된 그 환상적인 기억들은 과연 누가, 왜 겪어야만 했던 걸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내 삶에게 설득하기 위해서라고. 그 방법은 자본으로도, 과학으로도, 신앙으로도, 심리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이야기, 고유한 표현을 살아내려는 언어적 존재의 욕망 때문이라고요.


📺 기억상실증이 전염병이 되어버린 세상 [애플] 리뷰 (결말 포함)-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26분 내외)
당신의 이름조차 잊었을 때 당신은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버스 종점에 이르기까지 창가에 기대어 졸던 한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기억하는 것은 사과의 맛. 이유를 알 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는 그 질병을 다루는 전문 병원에서 생활합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병원 측은 미션을 주며 그의 인생을 새로 경험하게끔 돕습니다. 기억이 리셋되고 새로 형성되는 기억. 그때마다 떠올려지는 옛 기억의 잔해 속에서 빛나는 사과의 맛. 이 남자는 어째서 사과의 맛만큼은 잊지 않았을까요?
*반전이 있는 영화입니다. 영상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감상하신 뒤에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 여러분은 누구에겐가 이름을 붙여준 적이 있습니까? - 김석희 교수ㅣ경희대 IGA 인문도시 (16분 내외)
명명하는 존재의 역학

이름이란 무엇일까요? 길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던 남자의 이야기, 김사량의 소설 『빛 속으로』, 김춘수의 시 「꽃」,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통해 이름이 갖는 인문학적 의미를 고찰해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너무 사랑해서든, 너무 중요해서든,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의미입니다. (...) 누군가의 이름을 애써 기억한다는 것은 기꺼이 약자의 입장이 되겠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 터키가 갑자기 나라 이름을 바꾼 이유는? 튀르키예!? - 알파고 시나씨 l Creative Den (4분 내외)
네가 알던 그 터키는 이제 같은 터키가 아냐. 이제부터 튀르키예야. 뭐라고예...? 튀르키예?
이제 우리가 알던 터키는 더 이상 터키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터키가 '튀르키예(Turquiye)'로 국가 이름을 바꿨기 때문이죠. 11세기 이탈리아 기록에 이미 튀르키예라는 말이 등장하는데요. 영국에서 튀르키예라는 말을 터키(Turkey)로 표기하며 영어가 공통어로 자리 잡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터키, 아니, 튀르키예 출신 알파코 시나씨에게 그 사정을 들어봅니다. 

 🏛️ 이름 없는 주드 - 토마스 하디 l 고전5미닛 (5분 내외)
이름 없는 사람들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요? 성실함과 끈기, 추진력과 창의력 등 여러 가지 능력을 갖춘 개인은 사회의 인정과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한쪽에는 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회에서 거부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떠한 직책도, 지위도, 이름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토마스 하디의 『이름 없는 주드』를 소개합니다.  


이번 소장품 특별전에서는 마크 퀸살바도르 달리만 레이프랭크 스텔라 등 현대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해외 작가들의 걸작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소개하여, 그들의 철학과 이면의 서사들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국내외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소개할 세화미술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이번 《미지의 걸작 (The Unknown Masterpiece)》 전시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전시기간: 2022년 7월 26() ~ 11월 20()

*전시장소: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68 흥국생명빌딩 3층 세화미술관 제 1, 2 전시실

*관람시간: 화~일 10:00~18:00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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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맺는 말

이번 호는 비트겐슈타인의 유작이자 자신의 첫 책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철학적 탐구』한 부분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어린이는 자기 인형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에게 말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부르는 쓰임이 얼마나 독특한지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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