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고독'하면 떠오르는 책이나 영화가 있으신가요? 이번 호 주제는 ‘고독’입니다. 김홍중 교수의 《지혜의 나무》 선정 도서와 추천사가 함께 실립니다. 고독과 관련된 소설과 인문학 책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를 다룬 영상 콘텐츠와 영화까지 알차게 준비했습니다. |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 2006) |
새벽 세 시, 냉장고를 열면 흘러나오는 고독
<캘리포니아 걸스> 레코드는 아직도 내 레코드 선반 한구석에 있다. 나는 여름이 오면 언제나 그걸 꺼내서 몇 번씩 듣곤 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대해 생각하면서 맥주를 마신다. 레코드를 얹어놓은 선반 옆에는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메말라서 미라처럼 된 풀 뭉치가 매달려 있다. 소의 위장에서 꺼낸 풀이다. 죽은 불문과 여학생의 사진은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치 보이스는 오랜만에 새로운 앨범을 냈다. (145쪽) |
하루키의 첫 소설이다. 마치 작열하는 여름 햇빛 아래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웃고, 걷고, 뛰노는 어떤 해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막막함과 친근함과 고독감 속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들의 일상이 나른하면서도 예리하게 펼쳐진다. 이 비범한 중편소설에서 우리는 고독이라는 감정에 대한 가장 매력적인 동시에 세련된 표상과 만날 수 있다. ―김홍중 교수 |
주인공인 나는 어느 날 술집 화장실에 쓰러진 한 여자를 발견합니다. 그녀가 깨어나면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는 핑계로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내죠. 레코드점 판매원인 그녀는 "여덟 살 때 진공청소기의 모터에 새끼손가락이 끼어서" 잘려나갔고 그 새끼손가락의 행방을 궁금해 한 유일한 사람인 나는 과거 연인들을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나의 오랜 친구이자 부자, 룸펜이자 작가 지망생인 '쥐'는 그가 만나던 여자와 잘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손쓸 수 없는 일"을 충치에 비유하며 불평합니다.
"예를 들면 충치 같은 거야. 어느 날 갑자기 쑤시기 시작하지. 누가 위로해 줘도 통증은 멈추지를 않아.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나기 시작하지. 그리고 그 다음엔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는 녀석들에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기 시작하는 거야. 알겠어?" "조금은." (112쪽) 이 소설은 "새벽 세 시에 잠이 깨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흘러나오는 친근하고 서늘한 불빛을, 고가도로 어디선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창백한 손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진 챠콜필터 담배향이 생각납니다. 중심을 관통하는 사건이나 서사 없이 '만남과 이동, 대화와 회상, 작가 설명과 라디오 방송'이 40장의 뒤섞인 카드처럼 전개됩니다. 이는 안착할 수 없는 젊은 날의 불안과 외로움 그리고 김이 빠져 한 층 누그러진 문체로 단정하지만 위트 있는 고독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맞부딪치기보다는 어긋나는 방식으로. 마찰을 일으킨다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느리게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하루키의 말마따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이죠. |
📚 『화산 아래서』 맬컴 라우리 (권수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 |
이른 아침 술집 창을 통해 보이는 햇살의 고독
나를 받아주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둔 천국의 문조차도 불안하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몸을 떠는 영혼들을 받아들이는 술집의 미닫이문이나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철제 셔터 문보다 더한 천상의 복잡하고 절망적인 기쁨으로 나를 채울 수는 없다오. 모든 비밀, 모든 희망, 모든 실망. 그래요, 모든 재앙이 여기, 바로 저 흔들거리는 문 너머에 있다오. (81쪽) |
알콜 중독자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그 하루는 영원 같고, 장난 같고, 슬프고, 환각적이며, 결국에는 고독하다. 술이란 무엇일까? 술이 생성시키는 길은 처음에는 서로 함께 나누는 감정과 함께 있음의 기쁨 같은 것들로 왁자지껄하지만, 결국 언제나 자아가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처절하고 고독한, 자기 자신의 폐허에 이르는 길이다. 『화산 아래서』는 위험한 책이다. 나는 이 소설보다 더 죽음충동을 정확하게 그려낸 작품을 본 기억이 없다. ― 김홍중 교수 |
1938년 11월 2일 멕시코, 죽은 자의 날(Day of the Dead). 두 사람이 1년 전 죽은 멕시코 주재 영국 영사 제프리 퍼민을 회상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당시 퍼민은 멕시코와 영국의 국교 단절로 영사직을 사임하고 아내 이본과의 이혼 등 여러 풍파를 겪었습니다. 죽은 자가 되살아난 것처럼 여러 환영을 볼 정도로 그의 알코올 중독은 심각한 상태였죠. 아내 '이본'과 이복동생인 '휴'가 찾아와 다시 잘 지내보려 노력하지만 퍼민은 따를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찾는 것은 "고독 속에 들이켜는 한 잔"의 맥주, 헤레스, 아바네로, 카탈란, 파라스, 사르사모라, 말라가, 두라스노, 멤브리요, 룸포페, 테킬라, 메스칼, 아구아트디엔테, 아니스, 헤레스, 하이랜드 퀸... 오로지 술뿐입니다. 이 여정에는 구체적인 목표나 보상이 없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겪었고 또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제 다만 남루한 존재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알코올 노정이 파국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러면서도 시대상과 문화가 담긴 지적인 대화 그리고 독특하고 위트 있는 표현들은 그의 취한 의식이 오히려 취한 세상을 바라보는 명징하고 합당한 시선으로 느껴질 정도로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저자인 맬컴 라우리는 두번 째 부인의 도움을 받아 이 작품을 10년 동안 네 번 이상 퇴고했습니다. 물론 술과 함께요. 48세에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글에서는 분노와 고독이 한꺼번에 느껴집니다. 해소되지 않는 숙취와 알코올에 대한 갈급증처럼요. 저는 술을 못 해서 취한 사람의 상태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나마 느낀 대로 표현하면, 현재의 물결에 몸을 싣고 기름띠 같은 멀미를 앓는 기분이라는 거죠. 조금 전 잠을 이루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더니, 누군가의 거칠고 유려한 목소리가 들리는듯합니다.
당신이 나처럼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침 7시에 도미노 게임을 하는 타라스코 노파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겠소? (81쪽) |
🎥 《토니 타키타니》 - 이치카와 준 감독, 미야자와 리에 & 잇세 오가타 주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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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고독에 걸린 731벌의 그림자 *포스터를 클릭하면 리뷰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뭐랄까, 옷은 말이에요. 자기 안에 부족한 부분이 있잖아요. 그걸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천천히 그 모습을 바꿨고 모습을 바꿀 때마다 흐려졌다.” |
토니 타키타니(Tony Takitani)는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재즈 트롬본 연주자로 떠도는 아버지 밑에서 혼자가 익숙한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미술을 전공하며 '그림에 감정이 결여 되었다'는 평을 들었지만, 그에게 '감정'이란 체계가 없고 부정확하며 미성숙하다는 징표였죠. 그는 기계나 건물에 관련된 그림을 그리며 정확성과 엄밀성의 세계에만 매진했습니다. 그러던 중 에이코를 만나며 자신의 갑옷이자 감옥인 고독을 대면하게 됩니다. 에이코는 "옷을 입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마치 황금비율의 마네킹처럼 맵시가 좋았습니다. 그녀에게 옷이란 내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존재감을 충족시켜주는 물건 이상의 것이었죠. 토니는 그런 에이코의 삶의 양식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지만 온전히 끌어안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옷 쇼핑을 줄이는 게 어떻겠느냐 말하게 되고 결국 에이코는 이에 수긍하며 노력하던 중, 교통사고로 죽게 됩니다. 이후 토니의 고독은 더 짙어지고 선명해졌습니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고유한 이름과 정체성은 이제 누구도 열고 들어올 수 없는 "감옥"이 되었죠. 토니는 결국 그녀가 떠난 뒤 남은 옷 731벌을 처분하지 못합니다. 대신 에키오와 같은 '165cm, 230mm, size 2'의 비서를 고용하며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죠. 복사한 열쇠처럼 죽은 아내와 신체가 꼭 맞는 사람을 집에 들인 토니. 그는 과연 자신의 감옥을 열 수 있을까요? 이 영화는 앞서 소개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 소설이 원작입니다. 문학 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경우, 영상 스펙터클과 흥미 요소에만 치중하며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영화는 원작의 인물 간 구도와 색감과 전개 방식을 해석하여 작품을 읽지 않고 감상해도 충분한 완성도와 그에 상응하는 고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큰 역할을 하죠. 《토니 타키타니》 OST를 듣고 싶은 분은 디스크를 클릭해 주세요💿 |
🏛️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 셔우드 앤더슨 I 고전5미닛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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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독에는 저마다의 진실이 살고 있다 이상한 사람들의 사연이 공개됩니다. 스물두 편의 단편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와인즈버그(Winesbug)'라는 도시를 따로 또 함께 구성합니다. 각 서사에는 기이하게만 보이는 인물들의 고독한 사연이 수놓아져 있죠. 한 세기 전에 쓰인 작품이 우리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인물들의 고독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고독과 그 메커니즘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와 개인 사이의 긴장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뒤틀림과 고립, 소통의 부재와 단절,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부족에 기인하죠. 저자는 이런 소외된 개인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며 어떤 문학적 구원을 시도한 것을 아닐까요? 미국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의 선두 주자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소개합니다. |
📺 꼭 알아둬야 할 외로움의 진짜 이유 - 김교수의 세 가지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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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외로움을 낳는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은 혼자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래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죠. 외로움을 전진기어와 후진기어에 비유하며 좋은 외로움과 나쁜 외로움을 구분합니다. 좋은 외로움은 사람과의 소통과 관계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지만 나쁜 외로움은 고립과 단절로 후퇴하도록 이끈다는 것이죠. 나쁜 외로움은 관계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고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김교수는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고독을 통해 관계에 대한 기대를 덜어내고 그만큼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신의 고독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요? |
✍️맺는말 고독이 감정이 아닌 하나의 차원이라면, 고독에 속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겠죠. 오늘은 그 사람들을 응원하며 잠시 하늘을 바라보겠습니다. 12월 중순에 들어 한파와 함께 눈 소식도 잦습니다. 많이 추우니까 밖에서 오래 서성이지 마시기를, 돌아와서는 부디 자신의 온기를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인문 큐레이션 레터 《위클리 지관》 어떠셨나요? 당신의 소중한 의견은 저희를 춤추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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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고독'하면 떠오르는 책이나 영화가 있으신가요?
이번 호 주제는 ‘고독’입니다. 김홍중 교수의 《지혜의 나무》 선정 도서와 추천사가 함께 실립니다. 고독과 관련된 소설과 인문학 책 그리고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를 다룬 영상 콘텐츠와 영화까지 알차게 준비했습니다.
레코드를 얹어놓은 선반 옆에는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메말라서 미라처럼 된 풀 뭉치가 매달려 있다. 소의 위장에서 꺼낸 풀이다.
죽은 불문과 여학생의 사진은 이사하면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비치 보이스는 오랜만에 새로운 앨범을 냈다. (145쪽)
하루키의 첫 소설이다. 마치 작열하는 여름 햇빛 아래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웃고, 걷고, 뛰노는 어떤 해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막막함과 친근함과 고독감 속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청년들의 일상이 나른하면서도 예리하게 펼쳐진다. 이 비범한 중편소설에서 우리는 고독이라는 감정에 대한 가장 매력적인 동시에 세련된 표상과 만날 수 있다. ―김홍중 교수
이른 아침 술집 창을 통해 보이는 햇살의 고독
나를 받아주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둔 천국의 문조차도 불안하게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몸을 떠는 영혼들을 받아들이는 술집의 미닫이문이나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철제 셔터 문보다 더한 천상의 복잡하고 절망적인 기쁨으로 나를 채울 수는 없다오. 모든 비밀, 모든 희망, 모든 실망. 그래요, 모든 재앙이 여기, 바로 저 흔들거리는 문 너머에 있다오. (81쪽)
알콜 중독자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그 하루는 영원 같고, 장난 같고, 슬프고, 환각적이며, 결국에는 고독하다. 술이란 무엇일까? 술이 생성시키는 길은 처음에는 서로 함께 나누는 감정과 함께 있음의 기쁨 같은 것들로 왁자지껄하지만, 결국 언제나 자아가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처절하고 고독한, 자기 자신의 폐허에 이르는 길이다. 『화산 아래서』는 위험한 책이다. 나는 이 소설보다 더 죽음충동을 정확하게 그려낸 작품을 본 기억이 없다. ― 김홍중 교수
"기억은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천천히 그 모습을 바꿨고
모습을 바꿀 때마다 흐려졌다.”
모든 고독에는 저마다의 진실이 살고 있다
이상한 사람들의 사연이 공개됩니다. 스물두 편의 단편은 마치 모자이크처럼 '와인즈버그(Winesbug)'라는 도시를 따로 또 함께 구성합니다. 각 서사에는 기이하게만 보이는 인물들의 고독한 사연이 수놓아져 있죠. 한 세기 전에 쓰인 작품이 우리에게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인물들의 고독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고독과 그 메커니즘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와 개인 사이의 긴장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뒤틀림과 고립, 소통의 부재와 단절,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부족에 기인하죠. 저자는 이런 소외된 개인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며 어떤 문학적 구원을 시도한 것을 아닐까요? 미국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의 선두 주자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를 소개합니다.
관계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외로움을 낳는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은 혼자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래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죠. 외로움을 전진기어와 후진기어에 비유하며 좋은 외로움과 나쁜 외로움을 구분합니다. 좋은 외로움은 사람과의 소통과 관계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지만 나쁜 외로움은 고립과 단절로 후퇴하도록 이끈다는 것이죠. 나쁜 외로움은 관계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고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김교수는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고독을 통해 관계에 대한 기대를 덜어내고 그만큼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신의 고독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