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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50] 르누아르 : “인생이란 끝없는 휴일”

김은희
2024-08-05
조회수 783


예술가의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살펴보는 예술인문학자 이동섭 작가의 특집 칼럼입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르누아르입니다.


덥고 습하다. 매년 겪는 더위와 습도인데, 매번 새롭다.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여름이니 당연히 덥지!’라며 즐기(려)는 쪽과 ‘올여름은 역대급이야!’라며 에어컨만 찾아다니는 쪽이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는 쪽과 즐기지 못하면 피하자는 쪽, 둘 다 맞다. 만약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가 지금 한국에 있다면? 분명 그는 전자일 것이다.  

 

예쁜 것을 예쁘게 그린다.

<쥴리 마네(혹은 고양이를 안은 소녀)>, 캔버스에 유채, 65x54cm, 1887년, 오르세

금빛으로 빛나는 흰 원피스의 소녀가 고양이를 안고 있다. 고양이는 눈을 지긋히 감고 입은 활짝 웃고 있다. 소녀의 품이 따뜻하여 귀를 쫑긋 세운 채 반잠(demi sleep)에 빠져, 행복에 겨운 듯 갸르릉 갸르릉 거릴 듯하다. 고양이의 줄무늬와 소녀의 머리카락을 노랑이 감도는 갈색으로 같아서 둘의 통일성은 강조된다. 둘을 보며 그렸을 르누아르처럼, 우리도 기분이 좋아진다. 고양이처럼 스르르 미소가 입에 걸린다. 

 

흔히 3B(baby 아이, beast 동물, beauty 미녀)는 사람들의 호감과 애정을 일으키는 확실한 소재다. 그것을 르누아르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림은 예쁘고, 그림 속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이 르누아르가 그림을 그린 이유이자, 그가 바란 예술적 가치였다. 이런 이유로 동료 화가인 모네 등과 달리, 그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스타일을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소년과 고양이>, 캔버스에 유채, 123x66cm, 1868년, 오르세    
<피아노 앞의 두 소녀>, 캔버스에 유채, 116x90cm, 1892년, 오르세

르누아르는 좋아하는 화가의 기법을 솜씨좋게 그려냈고, 모네와 어울릴 때는 모네의 화법을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어슴푸레 감도는 차가운 녹색과 소년과 고양이가 서로 꼬옥 껴안고 있는 모습은 구도와 색채가 고전적이다. 반면에 <피아노 앞의 두 소녀>는 빛의 변화를 부드러운 붓질로 표현한 인상파 스타일로 그렸다. 양식은 달라도 두 점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가 그림에서 어떤 주의나 양식보다 그림은 예쁘게 잘 그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화가가 되었을까? 

 

실수로 화가가 된 점잖은 녀석’

소년 르누아르의 재능은 다방면에 걸쳐있었다. ‘아베 마리아’로 유명한 작곡가 샤를 구노는 천사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며 그에게 전문 성악가가 되길 권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커피잔과 숙녀용 부채, 푸줏간의 차양 등을 장식해 주고 돈을 벌었다.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이 없어지자, 화실에 등록했다. 그는 그림을 예술표현의 도구로 삼지 않았고, 그런 점을 간파한 마네는 그를 ‘실수로 화가가 된 점잖은 녀석’이라 불렀다. 

 

마네와 모네 등이 그림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려는 이상주의자라면, 르누아르는 현실주의자였다. 저들이 모여 카페에서 그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면, 르누아르는 혼자 목탄화로 낙서를 할 뿐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림은 재미있는 놀이자 돈벌이 수단이었다. 재미있지 않다면 그리지 않겠다던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그림을 예술적 재능보다 목공처럼 일종의 기능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우리가 이 멍청한 글쟁이들과 뭘 하는 거지? 이 사람들은 그림이 기술이라는 것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텐데 말이야. 그림은 도구로 그리는 것이지 관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고! 그런 관념은 작품이 완성된 뒤에야 생겨나는 것이지.” _ 르누아르


다소 날이 선 듯한 말에서 당시 평론가들의 비판에 대한 답답함이 느껴진다. 그의 대표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을 보면, 그의 말이 마음으로 와닿는다.

 

삶은 즐겁고, 그림은 예쁘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캔버스에 유채, 131x175cm, 1876년, 오르세
몽마르트에 위치한 주점 ‘물랭 드 라 갈레트(갈레트 풍차)’는 예술가들과 주민들이 모여서 춤추고 노는 곳이었다. 어느 화창한 오후에 밴드의 연주에 맞춰 춤추고(화면 왼쪽),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화면 오른쪽)이 대형 캔버스에 담겨있다. 나무와 사람에게 비는 빛을 사실적으로 잡아내기 위해, 그는 매일 작업실에서 캔버스를 꺼내 수레에 싣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옮겼다. 야외에서 이젤을 펼치고 그가 좋아하는 모델, 친한 동네 사람들과 친구 등을 그렸다. 신선한 빛으로 가득한 풍경은 밝은 색들로 채워진 팔레트로 완성됐다. 나무줄기와 잎사귀, 사람들의 얼굴과 옷에 드리운 그림자도 분홍과 파랑으로 처리했다. 1877년 세 번째 인상주의 전에 전시되었으나, 비평가들은 마네와 모네에게 그랬듯이 인물과 풍경이 선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며 혹평했다. 조르주 리비에르만이 파리 생활을 엄밀하고 정확하게 묘사한 귀중한 기념비이자 역사의 한 페이지라며 높이 평가했다. 
<뱃놀이 점심>, 캔버스에 유채, 130x173cm, 1880-1881년, 필립스컬렉션, 워싱턴 미국

<뱃놀이 점심>은 밝게 빛나지만, 당시 그의 미래는 아주 어두웠다. 경제적으로 궁핍했기에 130x173cm에 이르는 대형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1880년 4월부터 7월동안 파리 근교의 샤투chatou에서 모네와 함께 작업했었는데, 둘 다 물감과 음식을 살 돈조차 없었다.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나, 모네 같은 좋은 동료가 있어서 행복했다고 훗날 르누아르는 회상했다. 슬픈 그림을 그린 적이 없는 유일한 거장이라는 말처럼, 특유의 낙천성으로 그는 자신의 그림처럼 즐겁게 살아냈다.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이어야 한다. 가뜩이나 불쾌한 것이 많은 세상에 굳이 그림마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까?" _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고통을 싫어했다. 고통속에 있더라도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가난과 궁핍을 지켜보고 많은 부분을 참고 견디는 이웃을 보는 일이 그에겐 고통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힘없고 가난하면 세상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참아야만 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즐거운 순간만 그림으로 담으려 하지 않았을까? 우리도 특별한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것이 마치 내 일상의 평균치로 착각하고 싶듯이.
<시골의 춤>, 캔버스에 유채, 180x90cm, 1883년, 오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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