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지관

위클리 지관에서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잠시 '멈춤'신호를 받을 수 있는 삶의 물음들을 살펴봅니다. 책, 영화, 강연, 칼럼 등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서 매주 하나의 물음을 사유합니다. 매주 수요일,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VOL.103] "제 얘기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치훈
2023-09-06
조회수 2196


9월 첫 위클리 지관입니다. 새로운 달, 새로운 마음으로 맞고 계시나요? 9월에는 가을의 한가운데, 음력 팔월의 한가운데,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품은 추석() 명절이 들어, 벌써부터 그 넉넉하고 풍요로운 보름달 밤이 그리워집니다. 각자의 형편은 모두 다르겠으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옛 속담처럼, 모든 것이 풍성하고 즐거울 이번 가윗날을 고대하고 또 틈틈이 떠올리면서, 따뜻한 9월의 나날 만들어 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30대의 한 젊은이가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환각에 시달리며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가족과의 소통도 끊은 채 두문불출하며 지내기가 오래되자, 가족은 병원 진료를 권했으나 그는 거부했고, 애를 태우던 가족은 우연히 지역 내 시범사업 중인 ‘중증 정신질환자를 위한 새로운 치료 서비스(오픈  다이얼로그)’를 발견하고 신청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를 포함한 네 명의 의료진이 그의 집을 방문해, 가족을 동반하여 그와 대화를 시작했는데 그는 몹시 긴장했고, 한 단어 뒤에 다음 단어를 말하기까지 10초에서 30초까지 걸릴 만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습니다. 의료진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끈기 있게 경청했고, 숙련된 기술로 가족과 함께 그의 말들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공감해 주었습니다. 그는 차츰 의료진을 신뢰하고 자신의 얘기를 조금씩 편하게 꺼내놓았습니다.

“제 얘기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미에 그가 던진 말에 가족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전혀 소통되지 않던 그와 다시금 연결의 끈을 회복한 듯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의료진과의 만남이 이어졌고, 어느 날 그는 의료진에게 자신의 환청을 치료받고 싶다며 스스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통원 치료를 통해 상담과 약물로 그의 증상은 매우 호전됐고, 상당 기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 한 번의 입원 없이, 최근에 그는 직업훈련까지 병행하는 주간 재활 기관에서 치료받고 있습니다.

‘오픈 다이얼로그 (Open Dialogue)’ 는 조현병 전문가인 김성수 전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장이 2022년 9월부터 수원에서 시험 운영 중인 중증 정신질환자 치료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의료 시스템 입니다.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신개념 접근법으로, 위급 상황에서부터 재활까지 전 과정에서 환자를 중심으로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의 의료진이 함께합니다. 응급 상황이 발생하기 전부터 환자에게 조금 더 일찍 다가가, 환자를 존중하는 태도로 관계를 형성하고 대화를 시도하여, 본격적인 치료로 진입하는 과정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고 환자의 자발적 치료를 이끌어 치료의 효과도 높입니다. 실제로 병원의 ‘오픈 다이얼로그’ 시스템 도입 1년 후를 조사해 보니, 퇴원 한 달 이내 재입원율이 6.6%(전국 평균 26.3%)로 크게 떨어졌고, 중환자의 경우 입원할 때 신체적 결박을 경험한 환자도 6%(전국 평균 29%)까지 줄었으며, 평균 입원 기간도 국내 평균(199일)보다 엄청나게 짧은 21일이었습니다.

'남의 얘기'에 나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경청하는 자세.


김성수 전 병원장이 한국 최초로 영국 오픈 다이얼로그 협회의 공인 훈련을 마치고, 두 권의 번역서 ‘정신증을 위한 오픈 다이얼로그’와 ‘대화정신의학’을 펴내며, 현재 ‘한국 오픈 다이얼로그 학회’ 공동대표 역임까지 그야말로 '오픈 다이얼로그' 전도사가 된 데에는 그의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전공의 수련을 받을 당시 한국 정신의학의 주류는 약물치료였다. 전공의 1년 차 때 내가 열심히 치료해 퇴원시킨 환자들이 2년 차, 3년 차 때마다 반복해 재입원을 했다. '정신병은 낫지 않는 병인가?' 하는 회의감과 '약 처방만으로 환자를 고칠 수는 없을까?' 하는 자괴감이 깊어져 가던 상태에서 나는 전문의 자격을 얻었고, 이후 경기도 내 만성 환자 대상 정신병원에서 월급쟁이 의사로 일하게 됐다.

충격적이게도 의사 한 사람이 70~80명씩 입원 환자를 돌보는 병원이었는데, 그곳의 환자들은 의료수급 혜택에만 의지하며 10년, 20년씩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오는 가족도 없고 퇴원시킬 수 있는 길도, 갈 곳도 없었다. 어느 날 한 여자 환자를 만나게 됐다. 20년 가까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분이었다. 배가 아프다고 해서 진찰해 보니 심상치 않았다. 어렵게 종합병원으로 후송한 뒤에 위암 말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후 그 환자를 잊고 지냈는데, 인근 노인병원에서 야간 당직 아르바이트를 하다 중환자실에 위급한 환자가 있다고 해서 가보니 바로 그 환자였다. 보호자도 없고 치료 시기도 놓쳐서 수술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치의였던 나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반가워했는데, 금방 돌아가셨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용인정신병원으로 이직하여 새로운 치료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 이토록 참혹한 상황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했다.


용인시정신보건센터장을 맡으며 10년 넘게 병원 진료와 지역사회 일을 병행했다. 환자 집에서 밥도 같이 해 먹고, 정신장애 환자들과 해남까지 국토 종주 자전거 여행도 하고, 이마트에 장애인 고용도 알선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환자들 상태가 호전되고 삶이 나아지는 것을 목격하며 내 방식의 치료에 확신이 생겼다. 미술에 재능 있는 환자들을 위한 창작 공간을 만들고, 음악을 즐기는 환자들과는 밴드를 조직해 콘서트를 열어 함께 연주도 했다. 환자들이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도하다 보니 '오픈 다이얼로그'까지 온 거다.


영국 정신분석에서,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므로 의사라 하더라도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분류할 수 없다. 결국 정신 치료, 정신분석이라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고정관념을 겸허히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경청하며 환자의 마음에 함께 공명하는 거다. 이것이 오픈 다이얼로그의 핵심 정신이다."


한편, 스스로 '나의 얘기'에 얼마나 귀 기울여 주었는지, 또 나는 어떤 얘기를 꾹꾹 누르며 오래 삼키고 있진 않은지 돌아봅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로 추산한 조현병, 지속적 망상장애, 재발성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 중증 정신질환자 수는 지난해 107만 명으로 2017년보다 2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됩니다. 최근 들어, 연일 끔찍하고 받아들이기 힘겨운 사건 사고들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공포와 혐오는 점점 깊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이 곳곳에 빠르게 퍼져가는 현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향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깊이 숙고해 봅니다.


위 글은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하는 ‘삶이 묻는 것들에 답하다 2’ - 조현병 전문가 김성수 전 새로운경기도립정신병원장 인터뷰에서 발췌한 글들을 각색/편집하여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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