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철학자 강연 후기
*본 강연 후기는 지관서가 매니아 황윤정님과 스노우님의 후기를 편집-취합한 것입니다.
*큰따옴표(“”) 부분은 한병철 철학자의 말을 정리한 것입니다.
"행복은 수작업이다"

3월 4일 토요일 오후 3시.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와 SBS Biz 공동주최로 고려대 문과대학에서 《행복에 관하여》 한병철 철학자의 강연이 열렸다. 그의 신간 『정보의 지배』 발간 기념 강연에 백여 명의 참석자와 스탭들이 함께 했다. 사회를 맡은 장태순 덕성여대 철학과 교수의 소개대로 그는 작가이자 문화 평론가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전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고려대 슬로건이 '자유, 정의, 진리'죠? 진리는 불변 지속성을 갖는데, 현대사회는 진리의 자리에 변화를 추동하며 순간적인 정보만 있어요. 단적으로는 가치, 의미, 방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파편화해서 자극, 쾌락, 허무를 주죠. 이 사회에서 정말 행복하려면 정보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해요.”
20여 년을 독일에서 보낸 한병철 철학자는 장문으로 말하고 듣기가 어렵다며 짧은 말로 강의를 진행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사유 흐름이 더 명료하게 느껴졌다. 그는 “행복은 수작업”이라는 말로 본 강연의 첫 코를 뀄다.
“행복은 손을 통해서 들어온다. 행복은 수작업이다. 행복은 손으로 완성된다. 행복은 낯선 것이다. 행복은 신체적이다. 인간은 손을 쓸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고된 유학 생활과 공부에서 나름의 기쁨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쁨과 행복은 다르다고 했다. 앎에 도달하거나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생각이 들면 기쁘다고,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안식을 취하면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복을 설명하며 손을 들어 설명했다. 인간은 손을 통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한병철 철학자가 행복을 느끼는 대상은‘땅’과 ‘피아노’다. 그는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며 세상의 더러움을 씻고 날아오르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손수 정원을 가꿔왔다고 했다. 베를린의 겨울은 굉장히 어둡고 축축하고 추운데 낯선 저항을 만나고 극복하며 낯선 것을 사랑하니 몸속에 행복감이 들어왔단다. 이러한 강연자의 경험은 그의 저서 『땅의 예찬』에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행복의 원천은 땅이 아니라 스마트폰(디지털화)과 대면이 되었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참된 행복을 잃어버렸단다. 『1984』, 『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도 전쟁이 계속되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장미를 심고 텃밭을 가꿨다. 조지 오웰은 육체적 행위를 통해 거짓과 부조리한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생생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그것은 기쁨으로 저항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난생 처음 땅을 파며 흙이라는, 베를린의 회색빛의 어두운 모래를 신기하게 바라봤어요. 땅 아래 낯선 세계가 나에게 저항하는, 어떤 부정성을 강하게 느꼈죠. 거친 땅을 대하며 힘들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행복감이 밀려왔어요. 땅의 느낌! 그 육박해오는 행복감... 디지털화되어 멀어져만 가는 행복은 흙과 동의어 같아요. 이렇게 말할 수 있죠. 행복으로 돌아가라. 흙으로 돌아가라.”

저항 혹은 낯선 대상과의 대립 상태를 극복하는 일, 애써 문지방을 넘어 새로운 세상이 발견할 때 찾아오는 것이 행복인데, 마치 현대는 자동문 사회와 같다고 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저항성, 부정성, 타자가 있어야만 하며. ‘좋아요’만 있고, 편리하기만 하며 남과 부딪히지 않으면 결국 세계가 없어진다는 것이 강연자의 주장이다. 스마트폰이 왜 문제냐면 저항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자를 편하게 해주려고 상대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상대가 있어야 내가 성립되고 힘찬 자아가 생긴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 빠져들며, 타자와의 세계가 없어지는 게 우울증이라고 강연자는 진단했다.
그는 하이데거 전공자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진리와 현존재의 진실을 사유하며 세계(드러남)와 대지(드러나지 않음)의 관계를 논했다. 또 고흐가 그린 흙투성이 신발 그림을 두고 땅을 일구며 열심히 일한 노동자의 진실을 드러낸다며 ‘작품은 진실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병철 철학자는 현대사회 인간도 결국엔 ‘땅’을 딛고 살아가야 행복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강연장에 들어서기 전에, 어떤 낯선 행복을 발에 느껴지는 압박감과 발소리로부터 느꼈다. 다소 휑하고 낮은 조도로 밝혀진 대학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 그것은 나를 앞지르기도 나를 뒤따르기도 하며 걸음마다 중첩됐다. ‘내가 여기 있었고, 다시 여기 있고, 조금 달라진 내가 여기 있을 것’이라는 중첩. 그 관계가 이루는 어떤 서늘하고도 행복한 긴장이 느껴졌다. 강연장 바닥이 흙 깔린 땅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일군 땅처럼 나는 내가 딛고 있는 그것을 낯섦과 설렘으로 인식했다.
“한국의 궁궐에는 높은 문지방이 있는데 그걸 넘어가면 좋은 공간이 보여요. 현대는 투명한 자동문입니다. 문지방, 손잡이 즉, 부정과 저항이 없죠. 편하지만 행복하지 않아요. 부정성이 없으면 내가 성립이 안 되고 자신에게 떨어지고 자신과 계속해서 부딪쳐 외롭고 우울하죠. 스마트폰은 모든 저항과 부정 그리고 상대를 없애버려요. 너무나 매끄럽게 모든 것을 소비로 몰아가고 그걸 촉진해요.”
그는 스마트폰, 유비쿼터스 디지털 기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른 교육을 통해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치자고 했다. 무조건적 비난이 아니라, 그것이 ‘도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도구의 도구가 되지 말자고. 저항하고 반발하며 매끄러워지지 말라고.
『감시 자본주의 사회』의 저자 쇼샤나 주보프는 이런 기기를 “빅 아더(big other)”로 칭하며 ‘빅 브라더’의 친절하고 은밀한 착취 기계로 분석한다. 이런 기계는 결국 인간의 자율성, 주도성, 프라이버시, 고유하고 직접적인 경험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고. 같은 맥락에서 한병철 철학자는 이런 디지털화는 주체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타자를 도구로 만들거나 불신하고 없애버려 결국 자아가 몸과 세계를 포함하지 못하도록 가속한다고 비판했다. 또 스마트폰은 손가락으로 계속 클릭하며 내 마음대로 보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저항감을 느끼기 힘들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저항 없는 지배를 당하고 소비의 가축이 된다고 진단했다. 이는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성과사회에서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기를 채찍질한다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정보는 순간적인 자극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정보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 카톡 알림음은 사유를 끊어내고 더 머물지 못하게 한다. 정보는 진리가 아니다. 정보는 시간을 원자화시킨다. 시간 집약적인 실행들이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허무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정보화되어 자극 후의 허무함이 생긴다. 삶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느린 것인데, 빠른 것을 추종하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과 반대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정치다.”

그가 “민주주의는 느리다”고 표현한 것은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수평적이고 다양하기에 느리다. 또 시끄럽고 유난이다. 그가 비판한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는 알고리즘적이기에 매끄럽고 빠르다. 그리고 조용하고 은밀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시간 정치”는 이런 정보 지배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뿌리인 개인과 공동체의 시간 집약적 활동을 늘리고 자신과 공동체를 확립하라는 말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는 순간적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자극하고 사라지기에 지속성이 없다. 머물러 있어야 사유가 되고 행복이 되는데 정보는 머무를 수 없으니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정보의 단기성은 숙고를 요구하는 민주주의도 파괴한다. 시간 집약적인 행위(신뢰, 맹세, 영원성)는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게 순간적이니 허무함도 생겨난다.
한병철 철학자의 대다수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삶의 저항’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저항 방법은, 일생을 건 거대한 계획과 투신보다는, 일상을 통한 지속적인 저항이다. 그것은 명상, 산책, 사색, 정원을 가꾸기, 물건을 오래 사용하기,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배우는 일처럼 자기 삶을 통한 정치이자 저항을 주문한다.
한병철 철학자의 강연이 끝나고 장태순 교수와 한충수 교수와의 대담 그리고 강연 참석자들 간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그중 기억에 남은 답변을 정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는 겁니다. 땅, 하늘, 꽃, 아기의 눈, 사진 같은 것들. 손으로 현존과 접촉하는 법을 교육해야 합니다. 정원 가꾸기, 노래하기 등. 스마트폰과 거리가 있는 교육을 유치원부터 시작해야죠. 디지털 세계 바깥에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야 해요. 권력, 생산, 자본만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저항해야 합니다. 나는 책을 쓰며 저항합니다. 자본주의가 저항마저도 삼키지만, 저항은 분명 빛을 밝힐 거라 믿어요. 현존을, 세계를 체험해야 합니다. 타자를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은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제에요. 정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각성하고 계몽하고 대화하는 겁니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나오는 과정에서 좌절과 회의를 겪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생기죠. 하지만 디지털화는 좌절과 회의가 아닌 기쁨이 있으니 빠져나올 생각을 못 한다. 각성이 아니라 마비를 겪습니다.”
“인공지능은 과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은 결국 계산입니다. 인간은 몸, 사랑, 의식을 전제하죠. 사고는 생명체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소름은 생각의 첫 이미지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소름을 느낄 수 있을까요?”
《행복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철학자 강연 후기
*본 강연 후기는 지관서가 매니아 황윤정님과 스노우님의 후기를 편집-취합한 것입니다.
*큰따옴표(“”) 부분은 한병철 철학자의 말을 정리한 것입니다.
3월 4일 토요일 오후 3시.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와 SBS Biz 공동주최로 고려대 문과대학에서 《행복에 관하여》 한병철 철학자의 강연이 열렸다. 그의 신간 『정보의 지배』 발간 기념 강연에 백여 명의 참석자와 스탭들이 함께 했다. 사회를 맡은 장태순 덕성여대 철학과 교수의 소개대로 그는 작가이자 문화 평론가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전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고려대 슬로건이 '자유, 정의, 진리'죠? 진리는 불변 지속성을 갖는데, 현대사회는 진리의 자리에 변화를 추동하며 순간적인 정보만 있어요. 단적으로는 가치, 의미, 방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파편화해서 자극, 쾌락, 허무를 주죠. 이 사회에서 정말 행복하려면 정보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해요.”
20여 년을 독일에서 보낸 한병철 철학자는 장문으로 말하고 듣기가 어렵다며 짧은 말로 강의를 진행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사유 흐름이 더 명료하게 느껴졌다. 그는 “행복은 수작업”이라는 말로 본 강연의 첫 코를 뀄다.
“행복은 손을 통해서 들어온다. 행복은 수작업이다. 행복은 손으로 완성된다. 행복은 낯선 것이다. 행복은 신체적이다. 인간은 손을 쓸 때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고된 유학 생활과 공부에서 나름의 기쁨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쁨과 행복은 다르다고 했다. 앎에 도달하거나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생각이 들면 기쁘다고,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안식을 취하면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복을 설명하며 손을 들어 설명했다. 인간은 손을 통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한병철 철학자가 행복을 느끼는 대상은‘땅’과 ‘피아노’다. 그는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며 세상의 더러움을 씻고 날아오르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손수 정원을 가꿔왔다고 했다. 베를린의 겨울은 굉장히 어둡고 축축하고 추운데 낯선 저항을 만나고 극복하며 낯선 것을 사랑하니 몸속에 행복감이 들어왔단다. 이러한 강연자의 경험은 그의 저서 『땅의 예찬』에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행복의 원천은 땅이 아니라 스마트폰(디지털화)과 대면이 되었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참된 행복을 잃어버렸단다. 『1984』, 『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도 전쟁이 계속되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장미를 심고 텃밭을 가꿨다. 조지 오웰은 육체적 행위를 통해 거짓과 부조리한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생생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그것은 기쁨으로 저항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난생 처음 땅을 파며 흙이라는, 베를린의 회색빛의 어두운 모래를 신기하게 바라봤어요. 땅 아래 낯선 세계가 나에게 저항하는, 어떤 부정성을 강하게 느꼈죠. 거친 땅을 대하며 힘들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행복감이 밀려왔어요. 땅의 느낌! 그 육박해오는 행복감... 디지털화되어 멀어져만 가는 행복은 흙과 동의어 같아요. 이렇게 말할 수 있죠. 행복으로 돌아가라. 흙으로 돌아가라.”
저항 혹은 낯선 대상과의 대립 상태를 극복하는 일, 애써 문지방을 넘어 새로운 세상이 발견할 때 찾아오는 것이 행복인데, 마치 현대는 자동문 사회와 같다고 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저항성, 부정성, 타자가 있어야만 하며. ‘좋아요’만 있고, 편리하기만 하며 남과 부딪히지 않으면 결국 세계가 없어진다는 것이 강연자의 주장이다. 스마트폰이 왜 문제냐면 저항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자를 편하게 해주려고 상대를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상대가 있어야 내가 성립되고 힘찬 자아가 생긴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 빠져들며, 타자와의 세계가 없어지는 게 우울증이라고 강연자는 진단했다.
그는 하이데거 전공자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에서 진리와 현존재의 진실을 사유하며 세계(드러남)와 대지(드러나지 않음)의 관계를 논했다. 또 고흐가 그린 흙투성이 신발 그림을 두고 땅을 일구며 열심히 일한 노동자의 진실을 드러낸다며 ‘작품은 진실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병철 철학자는 현대사회 인간도 결국엔 ‘땅’을 딛고 살아가야 행복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강연장에 들어서기 전에, 어떤 낯선 행복을 발에 느껴지는 압박감과 발소리로부터 느꼈다. 다소 휑하고 낮은 조도로 밝혀진 대학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 그것은 나를 앞지르기도 나를 뒤따르기도 하며 걸음마다 중첩됐다. ‘내가 여기 있었고, 다시 여기 있고, 조금 달라진 내가 여기 있을 것’이라는 중첩. 그 관계가 이루는 어떤 서늘하고도 행복한 긴장이 느껴졌다. 강연장 바닥이 흙 깔린 땅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일군 땅처럼 나는 내가 딛고 있는 그것을 낯섦과 설렘으로 인식했다.
“한국의 궁궐에는 높은 문지방이 있는데 그걸 넘어가면 좋은 공간이 보여요. 현대는 투명한 자동문입니다. 문지방, 손잡이 즉, 부정과 저항이 없죠. 편하지만 행복하지 않아요. 부정성이 없으면 내가 성립이 안 되고 자신에게 떨어지고 자신과 계속해서 부딪쳐 외롭고 우울하죠. 스마트폰은 모든 저항과 부정 그리고 상대를 없애버려요. 너무나 매끄럽게 모든 것을 소비로 몰아가고 그걸 촉진해요.”
그는 스마트폰, 유비쿼터스 디지털 기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른 교육을 통해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치자고 했다. 무조건적 비난이 아니라, 그것이 ‘도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도구의 도구가 되지 말자고. 저항하고 반발하며 매끄러워지지 말라고.
『감시 자본주의 사회』의 저자 쇼샤나 주보프는 이런 기기를 “빅 아더(big other)”로 칭하며 ‘빅 브라더’의 친절하고 은밀한 착취 기계로 분석한다. 이런 기계는 결국 인간의 자율성, 주도성, 프라이버시, 고유하고 직접적인 경험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고. 같은 맥락에서 한병철 철학자는 이런 디지털화는 주체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타자를 도구로 만들거나 불신하고 없애버려 결국 자아가 몸과 세계를 포함하지 못하도록 가속한다고 비판했다. 또 스마트폰은 손가락으로 계속 클릭하며 내 마음대로 보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저항감을 느끼기 힘들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저항 없는 지배를 당하고 소비의 가축이 된다고 진단했다. 이는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성과사회에서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기를 채찍질한다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정보는 순간적인 자극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정보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 카톡 알림음은 사유를 끊어내고 더 머물지 못하게 한다. 정보는 진리가 아니다. 정보는 시간을 원자화시킨다. 시간 집약적인 실행들이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허무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정보화되어 자극 후의 허무함이 생긴다. 삶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느린 것인데, 빠른 것을 추종하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과 반대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정치다.”
그가 “민주주의는 느리다”고 표현한 것은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수평적이고 다양하기에 느리다. 또 시끄럽고 유난이다. 그가 비판한 정보가 지배하는 사회는 알고리즘적이기에 매끄럽고 빠르다. 그리고 조용하고 은밀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시간 정치”는 이런 정보 지배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뿌리인 개인과 공동체의 시간 집약적 활동을 늘리고 자신과 공동체를 확립하라는 말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는 순간적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자극하고 사라지기에 지속성이 없다. 머물러 있어야 사유가 되고 행복이 되는데 정보는 머무를 수 없으니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정보의 단기성은 숙고를 요구하는 민주주의도 파괴한다. 시간 집약적인 행위(신뢰, 맹세, 영원성)는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게 순간적이니 허무함도 생겨난다.
한병철 철학자의 대다수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삶의 저항’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저항 방법은, 일생을 건 거대한 계획과 투신보다는, 일상을 통한 지속적인 저항이다. 그것은 명상, 산책, 사색, 정원을 가꾸기, 물건을 오래 사용하기,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배우는 일처럼 자기 삶을 통한 정치이자 저항을 주문한다.
한병철 철학자의 강연이 끝나고 장태순 교수와 한충수 교수와의 대담 그리고 강연 참석자들 간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그중 기억에 남은 답변을 정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는 겁니다. 땅, 하늘, 꽃, 아기의 눈, 사진 같은 것들. 손으로 현존과 접촉하는 법을 교육해야 합니다. 정원 가꾸기, 노래하기 등. 스마트폰과 거리가 있는 교육을 유치원부터 시작해야죠. 디지털 세계 바깥에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야 해요. 권력, 생산, 자본만을 생각하는 자들에게 저항해야 합니다. 나는 책을 쓰며 저항합니다. 자본주의가 저항마저도 삼키지만, 저항은 분명 빛을 밝힐 거라 믿어요. 현존을, 세계를 체험해야 합니다. 타자를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은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제에요. 정보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각성하고 계몽하고 대화하는 겁니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었다가 나오는 과정에서 좌절과 회의를 겪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생기죠. 하지만 디지털화는 좌절과 회의가 아닌 기쁨이 있으니 빠져나올 생각을 못 한다. 각성이 아니라 마비를 겪습니다.”
“인공지능은 과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은 결국 계산입니다. 인간은 몸, 사랑, 의식을 전제하죠. 사고는 생명체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소름은 생각의 첫 이미지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소름을 느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