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

[조선일보]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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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上)

 

스코틀랜드 분리 찬반 투표후 "서로 다른 의견 있었지만 모두 스코틀랜드 사랑한 사람" 英 여왕의 발언 인상적
원효의 화쟁론 부처님 말 아닌게 없으니 모든 경전이 최고이고 부처님 얘기 다 못담기에 다 옳은 경전도 없어


'인문학 아고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조성택<사진>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경계와 차이를 넘어 함께 사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한 강연 내용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번 전체 강연 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럼 '어떻게'란 뭘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라는 질문은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점심때 뭘 먹을까. 짜장면, 짬뽕, 볶음밥…. 이런 식으로 고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는 다르다.

지난 세월 식민지 해방에서 근대 산업화에 민주화,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에게 '어떻게'라는 질문은 잊혀 왔다.

그런데 IMF 경제 위기를 겪고 뭔가 다른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어떤 합의가 우리 사회에서 이뤄졌다.

황지우 시인의 '마음의 지도 속 별자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길이라면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에서는 다르다. 그동안 걸어온 길은 보이나,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막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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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강정마을, 진도… 전국 지명(地名)이 다 갈등을 말하는 시대

 

소크라테스는 훌륭하게 살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훌륭하게 사는 것인가. 고전적 가치로 절제, 겸양, 배려, 관용이 거론된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건 함께 사는 지혜다. 함께 산다는 건 나와 다른 사람과 산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얼굴색, 키, 성격, 입맛, 이념이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차이와 경계를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왔다.

 

자연도 그렇고, 인간 세계도 진선미란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리면서 이뤄지는 것이다. 모두 똑같은 풍경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산과 물은 다르지만 함께 있어 아름답다. 단풍도 빨간색과 노란색이 다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사람, 심지어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회를 이뤄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 다른 것들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난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대립으로 얼룩진 광화문광장, 해군 기지 분쟁이 이어지는 제주 강정마을, 송전탑 갈등이 일상인 밀양, 용산 참사, 진도 세월호 사태까지 전국 지명(地名)이 다 갈등을 상징한다.

명절 때 가족이 모이면 가급적 정치 얘기 안 하려 한다. 자꾸 싸우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손연재가 금메달을 따자 김연아 팬들이 안티로 나섰다. 김연아를 좋아한다고 손연재를 미워할 이유가 있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고려대 대강당을 리노베이션한다니까 문과대 학생회가 "대강당 뺏어가는 놈은 귀싸대기 올려버린다"는 구호를 달더라. 전국 분쟁 현장마다 섬뜩한 구호가 일상화되고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라는 자료를 보면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56개국 중 우리가 최하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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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대사의 초상화. 

 

나도 옳고 너도 옳다

그렇다면 하나의 옳음만 존재하는가. 하나만 옳으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으면 내가 그른가? 다른 종교나 가치관, 다른 판단은 인정하고 포용할 수 없는가? 세월호 특검법을 주장하면 법질서를 세울 수가 없고. 법질서를 강조하면 유족의 아픔은 달랠 수 없는가?

얼마 전 스코틀랜드 분리 국민투표가 끝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지만, 모두가 스코틀랜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정치적 수사이긴 했지만, 정치가 그 정도는 돼야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출마했을 때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사람도 찬성하는 사람도 다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답했다. 더 짓궂게 "이라크와 전쟁했을 때 하나님이 미국 편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까지 들어오자 그는 "질문이 잘못됐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받아쳤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라고 하면 늘 투표, 혹은 다수결을 많이 생각한다. 민주주의 제도로서 투표나 다수결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과정이 선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투표에 이르는 그 과정이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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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8일(현지 시각)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분리·독립 지지 시위에 참가한 여성(왼쪽)이

자신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쓰인 ‘Yes’라는 문구를 가리키고 있다. ‘Yes’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찬성한다는 의미다.

독립에 반대하는 다른 여성(오른쪽)은 이 여성을 손가락질하며 항의하고 있다./AP뉴시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 그 이상은 아니다. 생활에서의 민주주의, 일상에서의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에 대해서는 취약하다.

미국은 1955년 과학기술을 국가 경쟁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과학재단(NSF)을 만들었다. 뒤이어 1965년 국립인문진흥재단이란 단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다인종, 다문화가 섞여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통합된 미국을 만들 것인지 고민 끝에 나온 산물이다. 그들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봤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97년 창조적인 미국 건설을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어 보고서를 냈는데 거기에는 "예술과 인문학이 명백한 공공재"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1945년 해방될 때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860달러였다. 가나는 1190달러. 지금은 2만5000달러와 1800달러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개발 독재, 국가 주도 발전 등등 많은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두께의 차이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왕의 언행을 500년간 매일 기록한 왕조실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우리글도 있다.

 

화엄사상의 핵심은'개시개비(皆是皆非)'

지금부터 말하려는 화엄사상도 우리가 가진 찬란한 유산 중 하나다. 7~8세기 동아시아 사상 주류는 화엄사상이다. 이 사상을 한국적인 사유 속에서 녹여냈던 게 원효다.

원효의 화쟁론(和諍論)은 그런 맥락이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 한국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변방이다. 불교 사상 역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걸 수입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 한국 대학 실정과 흡사하다. 그런데 원효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학을 못 갔다. 유학 갔다 오면 배우는 게 뭔가. 전체를 배워오는 게 아니라 유학 간 학교 일부 학풍을 배워서 온다.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으면서 동아시아 변방에 앉아 중국에서 벌어지는 불교의 다양한 학설을 스스로 소화했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