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연세대 교수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지금 대한민국은… 배가 좌초돼 꼼짝 못하는 아포리아 상태
잠시 노를 내려놓고 인생의 좌표를 생각할 때
소크라테스의 깨달음
포티다이아 3년 공성전서 포위당해 굶주린 시민들
서로 잡아먹는 것에 충격 "탁월함이란 바로 절제"
플라톤의 리더십
동굴 속 갇힌 노예처럼 아포리아에 빠진 그리스
"쇠사슬 끊고 돌아보라… 환영의 실체를 보라"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인문학 대중 강연 프로그램 '인문학 아고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김상근〈사진〉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가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플라톤의 국가'란 제목으로 한 강연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인문학은 'studia humanitatis'라는 말의 번역이다. 많은 분들은 인문학이 사회 과학이나 자연과학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학 구조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 고대 그리스나 중세 유럽 대학에서 인문학이 태동할 때, 그것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 출발했다. 노예가 익혀야 할 섬기는 기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영어에서 인문학을 'liberal arts'라 한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것이란 뜻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에, 인문학은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아포리아(aporia)'라 규정한다. 배가 좌초되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고대 그리스인은 아포리아라고 했다. 이는 위기보다도 더 심각한 단계다. 위기는 도움을 청하거나 노를 저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아포리아는 그보다 더 심각한 '길 없음'의 상태에 접어들었음을 말한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남에게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은 그 손가락질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인문학은 어떻게 빨리 노를 저어서 이 아포리아를 극복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노를 내려놓고 밤하늘의 별을 볼 것을 권한다. 내 인생의 좌표는 어디에 있는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위기보다 더 심각한 길없음의 상태 '아포리아'
고대 그리스는 흔히 철학의 세계, 신화의 세계, 호메로스의 세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리스는 사람 땀 냄새, 전쟁의 피 냄새가 진동하고, 살육의 아픔이 수없이 벌어졌던 곳이다. BC 490년경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이 그들의 첫 번째 아포리아였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무려 500만 명 이상이 그리스를 침공해 왔다. 당시 아테네 인구가 30만 정도였으니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보라.
그리스가 살라미스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뒤 채 50년이 못 가서 또다시 아포리아가 닥쳤다. 이번에는 내전이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갈라져서 전쟁을 했다. 이어 세 번째 아포리아가 닥쳤다. 민주주의를 자랑하던 그리스에 참주(tyrannos·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가 등장했고,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림 한가운데 한 손으로는 천국을 가리키며 독배를 받아드는 노인이 소크라테스다.
왼쪽에 보이는 노인은 플라톤이다. 그림에선 노인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소크라테스가 죽을 당시 플라톤은 28살이었다. / 조선일보 DB
해답 대신 질문을 가르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금속제 갑옷과 방패 등으로 무장한 중장(重裝)보병으로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분기점이었던 포티다이아 공성전(攻城戰)에 참전했다. 이곳에서 3년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염병이 돌아서 아테네의 군사들 1000여 명이 죽었고, 그 시체들은 매장되지 않은 채 3년 동안 방치되면서 짐승들이 그 시신을 뜯어 먹었다. 포위를 당한 포티다이아 시민들은 양식이 떨어지자, 서로 잡아먹었다. 소크라테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시기에 '탁월함'(아레테)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알키비아데스의 증언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포티다이아 평원에서 온종일 서서 깊은 사색에 빠졌다고 한다. 그동안 그리스에서 탁월함은 남성다움, 신체적 탁월함, 혹은 군사적 용맹이라고 생각돼 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헌신, 정의의 실천과 지혜의 추구가 진정한 탁월함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전쟁 후 고향 아테네로 돌아온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피스트들처럼 장광설을 따라 한 게 아니라, 질문을 했다. 해답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의문을 갖게 한 것이다. 상대방이 탁월함의 실체에 스스로 도달할 때까지 질문을 계속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숨을 쉬고 그럴 능력이 있는 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 보시오! 당신은 아테네인이요. 당신의 도시는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하며 지혜롭고 강력하기로 그 명성이 자자하오. 그러나 부와 명예와 명성은 그렇게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당신들은 부끄럽지 않소'라고 지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보았다. 나 역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여러분은 대한민국 국민들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전화기를 만들고, 세계에서 제일 배를 잘 만드는 나라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부와 명예와 명성은 그렇게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소?"
제자 잘못 둬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진정한 지혜를 설파하던 시절에 갑자기 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맹주의 싸움이었는데, 도중에 아테네군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나게 된다. 그 원정을 주장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였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고, 스파르타의 지지를 받던 30인의 참주가 아테네를 통치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게 된다.
정치적 혼란기에 소크라테스는 희생양이 되었다. 패전의 원인이 된 시칠리아 원정을 부추긴 장군의 스승이 소크라테스였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화살을 엉뚱한 데로 돌렸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이름으로 순교를 당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는다. 플라톤은 스승을 죽인 아테네를 떠나 이집트, 시칠리아,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크레타 섬을 돌며 넓은 세상을 본 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다. 플라톤은 아테네 외곽에 정착해 아카데미아를 연다. 요즘 대학의 원조격이다. 플라톤이 거기서 쓴 책이 바로 '국가'다. 총체적 아포리아에 빠진 아테네를 구하기 위한 책이었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이상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해야 한다. 통치자는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통치자를 위한 지혜는 일반적인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나라에 도움이 되는 그런 전문 지식이다. 수호자는 소신을 보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욕망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소신을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다.
시민은 절제해야 한다. 절제한다는 것은 질서를 지키는 것이며, 이는 국가나 개인의 차원에서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통치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마지막 '절제'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플라톤은 우수한 사람들이 통치하고 우수하지 못한 사람은 그 지배를 받으라고 가르쳤다. 상호 참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같은 엘리트주의적 사고에 대해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에서 플라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칼 포퍼는 '국가'의 앞부분까지만 읽고, 뒷부분은 자세히 안 읽은 것 같다.
플라톤은 '국가'의 후반부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주제를 다룬다. '이상 국가를 통치할 수호자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통치자와 수호자 같은 지도자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들의 리더십은 반드시 철저한 교육을 받은 다음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을 받지 않고, 그래서 무자격자가 지도자가 된다면, 그 권력은 절대로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결국 계급 간의 상호 참견 금지가 핵심이 아니라, 지도자가 적절한 교육을 받고 참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할 때 그 권력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약자와 아픔을 같이하는 게 인문학적 삶
플라톤은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동굴 속에 갇힌 노예처럼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뒤를 돌아보라. 횃불 앞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환영의 실체를 보라. 지금까지 당신이 믿고 있는 실체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보라"고 했다. 플라톤은 "교육이란 혼의 지적 기관을 어떤 방법을 써야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전향시킬까에 대한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니라"고 했다.
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환영의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쇠사슬을 끊은 다음, 몸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체를 보란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반전이 등장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본다면, 이는 전향을 한 것이다. 참된 교육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인간이다. 그런데 그다음 단계가 있다.
인문학의 두 번째 단계다. 플라톤의 표현대로 "일단 올라가 충분히 본 다음에는"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을 한 다음에는, 다시 방향을 돌려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굴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노예처럼 살고 있는 불쌍한 내 형제 자매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고, 가능하면 그들이 쇠사슬을 끊고 어둠의 동굴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방송을 통해서 들렸던 소리는 "가만히 있으라"였다. 어린 학생들을 구해야 할 위치에 이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면서 자신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찬 바다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과 함께, 특별히 우리 사회 약자들과 함께 그들의 아픔에 함께 참여하는 삶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문학적 삶이다. 인문학적 삶은 내가 누구인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연결되어야 한다. 어두운 동굴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 추구하는 두 번째 삶의 목표이다.
<하략>
김상근 연세대 교수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지금 대한민국은… 배가 좌초돼 꼼짝 못하는 아포리아 상태
잠시 노를 내려놓고 인생의 좌표를 생각할 때
소크라테스의 깨달음
포티다이아 3년 공성전서 포위당해 굶주린 시민들
서로 잡아먹는 것에 충격 "탁월함이란 바로 절제"
플라톤의 리더십
동굴 속 갇힌 노예처럼 아포리아에 빠진 그리스
"쇠사슬 끊고 돌아보라… 환영의 실체를 보라"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인문학 대중 강연 프로그램 '인문학 아고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김상근〈사진〉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가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플라톤의 국가'란 제목으로 한 강연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인문학은 'studia humanitatis'라는 말의 번역이다. 많은 분들은 인문학이 사회 과학이나 자연과학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학 구조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 고대 그리스나 중세 유럽 대학에서 인문학이 태동할 때, 그것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 출발했다. 노예가 익혀야 할 섬기는 기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영어에서 인문학을 'liberal arts'라 한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이 반드시 공부해야 할 것이란 뜻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학문이기에, 인문학은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아포리아(aporia)'라 규정한다. 배가 좌초되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고대 그리스인은 아포리아라고 했다. 이는 위기보다도 더 심각한 단계다. 위기는 도움을 청하거나 노를 저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아포리아는 그보다 더 심각한 '길 없음'의 상태에 접어들었음을 말한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남에게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은 그 손가락질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인문학은 어떻게 빨리 노를 저어서 이 아포리아를 극복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노를 내려놓고 밤하늘의 별을 볼 것을 권한다. 내 인생의 좌표는 어디에 있는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위기보다 더 심각한 길없음의 상태 '아포리아'
고대 그리스는 흔히 철학의 세계, 신화의 세계, 호메로스의 세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리스는 사람 땀 냄새, 전쟁의 피 냄새가 진동하고, 살육의 아픔이 수없이 벌어졌던 곳이다. BC 490년경 시작된 페르시아 전쟁이 그들의 첫 번째 아포리아였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무려 500만 명 이상이 그리스를 침공해 왔다. 당시 아테네 인구가 30만 정도였으니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보라.
그리스가 살라미스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뒤 채 50년이 못 가서 또다시 아포리아가 닥쳤다. 이번에는 내전이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갈라져서 전쟁을 했다. 이어 세 번째 아포리아가 닥쳤다. 민주주의를 자랑하던 그리스에 참주(tyrannos·비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가 등장했고,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림 한가운데 한 손으로는 천국을 가리키며 독배를 받아드는 노인이 소크라테스다.
왼쪽에 보이는 노인은 플라톤이다. 그림에선 노인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소크라테스가 죽을 당시 플라톤은 28살이었다. / 조선일보 DB
해답 대신 질문을 가르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금속제 갑옷과 방패 등으로 무장한 중장(重裝)보병으로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분기점이었던 포티다이아 공성전(攻城戰)에 참전했다. 이곳에서 3년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염병이 돌아서 아테네의 군사들 1000여 명이 죽었고, 그 시체들은 매장되지 않은 채 3년 동안 방치되면서 짐승들이 그 시신을 뜯어 먹었다. 포위를 당한 포티다이아 시민들은 양식이 떨어지자, 서로 잡아먹었다. 소크라테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시기에 '탁월함'(아레테)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알키비아데스의 증언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포티다이아 평원에서 온종일 서서 깊은 사색에 빠졌다고 한다. 그동안 그리스에서 탁월함은 남성다움, 신체적 탁월함, 혹은 군사적 용맹이라고 생각돼 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헌신, 정의의 실천과 지혜의 추구가 진정한 탁월함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전쟁 후 고향 아테네로 돌아온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피스트들처럼 장광설을 따라 한 게 아니라, 질문을 했다. 해답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의문을 갖게 한 것이다. 상대방이 탁월함의 실체에 스스로 도달할 때까지 질문을 계속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숨을 쉬고 그럴 능력이 있는 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 보시오! 당신은 아테네인이요. 당신의 도시는 그리스에서 가장 위대하며 지혜롭고 강력하기로 그 명성이 자자하오. 그러나 부와 명예와 명성은 그렇게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당신들은 부끄럽지 않소'라고 지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보았다. 나 역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여러분은 대한민국 국민들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전화기를 만들고, 세계에서 제일 배를 잘 만드는 나라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부와 명예와 명성은 그렇게 많이 획득하려고 안달하면서도 지혜와 진리와 혼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부끄럽지 않소?"
제자 잘못 둬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진정한 지혜를 설파하던 시절에 갑자기 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맹주의 싸움이었는데, 도중에 아테네군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나게 된다. 그 원정을 주장했던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였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고, 스파르타의 지지를 받던 30인의 참주가 아테네를 통치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나게 된다.
정치적 혼란기에 소크라테스는 희생양이 되었다. 패전의 원인이 된 시칠리아 원정을 부추긴 장군의 스승이 소크라테스였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화살을 엉뚱한 데로 돌렸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이름으로 순교를 당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는다. 플라톤은 스승을 죽인 아테네를 떠나 이집트, 시칠리아,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크레타 섬을 돌며 넓은 세상을 본 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다. 플라톤은 아테네 외곽에 정착해 아카데미아를 연다. 요즘 대학의 원조격이다. 플라톤이 거기서 쓴 책이 바로 '국가'다. 총체적 아포리아에 빠진 아테네를 구하기 위한 책이었다.
그의 생각은 이랬다. "이상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해야 한다. 통치자는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통치자를 위한 지혜는 일반적인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나라에 도움이 되는 그런 전문 지식이다. 수호자는 소신을 보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욕망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도 소신을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기다.
시민은 절제해야 한다. 절제한다는 것은 질서를 지키는 것이며, 이는 국가나 개인의 차원에서 더 나은 부분이 더 못한 부분을 통치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마지막 '절제'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플라톤은 우수한 사람들이 통치하고 우수하지 못한 사람은 그 지배를 받으라고 가르쳤다. 상호 참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같은 엘리트주의적 사고에 대해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에서 플라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칼 포퍼는 '국가'의 앞부분까지만 읽고, 뒷부분은 자세히 안 읽은 것 같다.
플라톤은 '국가'의 후반부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주제를 다룬다. '이상 국가를 통치할 수호자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통치자와 수호자 같은 지도자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들의 리더십은 반드시 철저한 교육을 받은 다음에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을 받지 않고, 그래서 무자격자가 지도자가 된다면, 그 권력은 절대로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결국 계급 간의 상호 참견 금지가 핵심이 아니라, 지도자가 적절한 교육을 받고 참된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할 때 그 권력이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약자와 아픔을 같이하는 게 인문학적 삶
플라톤은 아테네의 아포리아를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동굴 속에 갇힌 노예처럼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스스로 쇠사슬을 끊고 뒤를 돌아보라. 횃불 앞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환영의 실체를 보라. 지금까지 당신이 믿고 있는 실체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말고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보라"고 했다. 플라톤은 "교육이란 혼의 지적 기관을 어떤 방법을 써야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전향시킬까에 대한 기술이지, 그 기관에 시력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니라"고 했다.
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환영의 세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쇠사슬을 끊은 다음, 몸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체를 보란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반전이 등장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본다면, 이는 전향을 한 것이다. 참된 교육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인간이다. 그런데 그다음 단계가 있다.
인문학의 두 번째 단계다. 플라톤의 표현대로 "일단 올라가 충분히 본 다음에는"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을 한 다음에는, 다시 방향을 돌려 동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굴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노예처럼 살고 있는 불쌍한 내 형제 자매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고, 가능하면 그들이 쇠사슬을 끊고 어둠의 동굴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방송을 통해서 들렸던 소리는 "가만히 있으라"였다. 어린 학생들을 구해야 할 위치에 이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면서 자신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찬 바다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방향을 돌려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과 함께, 특별히 우리 사회 약자들과 함께 그들의 아픔에 함께 참여하는 삶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문학적 삶이다. 인문학적 삶은 내가 누구인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연결되어야 한다. 어두운 동굴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 추구하는 두 번째 삶의 목표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