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보도

[중앙일보] 『산해경』이 답하다... 서구 콤플렉스 벗어나게 해 줄 동양신화의 보고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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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이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힘, 그것은 바로 상상력에서 시작합니다. 비단 문학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스티브 잡스는 남의 것을 베끼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중앙일보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는 ‘동양고전에 묻다’의 이번 주제는 ‘왜 지금 다시 상상력인가’입니다. 신화집 『산해경』을 살펴봅니다.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1899~1986)의 『상상동물 이야기』에는 동서고금의 이상한 동물이 출현한다. 그러나 괴짜의 대가 보르헤스도 경탄을 금치 못할, 『상상동물 이야기』의 원조 같은 책이 있다. 다름 아닌 중국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이다.


[책과 지식] 동양고전에 묻다 ④ 왜 지금 다시 상상력인가
도연명 “잠깐 사이에 우주를 돌아본 듯 했다”는 그 책

 

기원전 3-4세기경 무당들에 의해 쓰여진 이 책에는 중국과 변방 지역의 기이한 신·인간·사물에 대한 기록과 그들에 대한 기괴한 그림이 함께 실려 있다. 보르헤스는 『상상동물 이야기』 서문에서 자기 책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신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것의 총체, 즉 우주”라고 추켜세운 바 있는데 사실 이러한 찬사는 『산해경』에게 바쳐져야 할 것이다.

모든 이야기의 조상이자, 상상력의 근원인 신화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대개 알고 있지만 동양의 신화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황제(黃帝)가 제우스로, 서왕모(西王母)가 헤라로 대체돼 옛 동양의 신은 이제 ‘사라진 신’이 됐기 때문이다. 『산해경』에는 고스란히 이 신들이 남아 있어서 우리가 호출할 때 뛰어나와 무의식에 각인된 그들의 이미지를 환기시켜 준다.

 

 

『산해경』에 나오는 꼬리 아홉 달린 짐승.


『산해경』은 신화집이니까 물론 고전소설과도 다르다. 여기에 비하면 같은 신화라도 그리스 로마 신화는 너무나 인간중심적이고 구조도 소설처럼 잘 짜여 있다. 『산해경』은 온갖 신들과 괴물들이 제각기 출현할 뿐 일정한 줄거리가 없다. 파편화된 이미지의 행진일 뿐이다. 가령 다음 같은 구절을 보자.

‘다시 동쪽으로 300리를 가면 청구산이라는 곳인데 그 남쪽에서는 옥이, 북쪽에서는 푸른 흙이 많이 난다.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여우 같은데 아홉 개의 꼬리가 있으며 그 소리는 마치 어린애 같고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 이것을 먹으면 요사스러운 기운에 빠지지 않는다.’(남산경·南山經)

위의 예문을 보고 눈치 빠른 독자는 청구산에 사는 짐승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것은 구미호이다. 야담에서 많이 나오는 사악한 여우, 혹은 요사스러운 여자의 대명사인 구미호의 아키타입(archetype·원형)이 『산해경』에 있다.

『산해경』의 글은 이처럼 이미지에 의존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어디에 무엇이 있고’ 하는 식의 이야기, 그것을 계속 읽노라면 마치 무당의 주문을 암송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지금 얼핏 본 한 구절에서 느꼈듯이 『산해경』의 단편적인 이미지 하나하나는 동양적 상상력의 원형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