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K정신이다.]③ 인문 사상 종교, 중국서 꽃 피고 한국서 열매 맺어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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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플라톤 아카데미 공동기획] 이것이 K정신이다
③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이선경 차기 주역학회장 부녀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과 이선경 차기 주역학회장 부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류가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되고 있다. 과연 한류의 무엇이 세계인들을 열광하게 하는 걸까. 우리 스스로 답하지 못하는 사이 지구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 어떤 문화예술도 정신 사상의 뿌리 없이 지속적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신명과 정감이 흐르는 한류의 뿌리를 찾아 <한겨레>와 (재)플라톤 아카데미가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종교·인문학 고수들을 찾아 듣는 ‘이것이 케이(K)정신이다’ 인터뷰를 진행한다. 세 번째는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과 이선경 차기 주역학회장 부녀다.



이동준(85)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장 겸 유학대학원장,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장을 지냈고, 한국사상연구원 설립자이자 원장이다. 그의 집안은 한국 철학의 기둥이다. 부친 학산 이정호(1913~2004)는 ‘정역’(조선 후기 김항이 <주역> 원리를 독자적으로 이해해 주창한 역학사상) 연구의 일인자였다. 학산의 애제자이자 도반이고, 이 교수의 손윗동서인 류승국(1923~2011) 전 정신문화연구원장은 우리 문화의 원류인 동방문화를 밝힌 주역이었다. 이 교수의 딸 이선경(55) 박사는 대만국립정치대학에서 주역을 연구한 뒤 <한국주역대전> 편찬팀장을 거쳐, 차기 주역학회장으로 선임된 상태다. 지난달 24일 경기도 과천에서 부녀를 만났다. 이 교수가 지어 40여 년을 산 단독주택은 학산이 말년에 함께 머물고, 류승국이 자주 드나들던 집이다.


학산은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과를 거쳐 의예과에서 의학도 공부한 수재였다. 해방 뒤 일석 이희승이 서울대에 국문학과를 재건하자며 그를 세번이나 찾아왔으나 응하지 않았다. 대신 계룡산에 들어가 3년간 정역을 만든 김항의 조카 덕당 김홍현으로부터 정역을 전수하였다. 그가 세상에 드러낸 정역은 조선의 패망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적 자존감이 꺾인 한민족에게 희망의 싹을 틔웠다. 우리나라가 세계 변화의 중심이 되어, 조화로운 화합 시대인 후천 시대로 세상을 이끈다는 정역은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국수주의자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쯤으로 치부되기도 했으나, 한국이 선진국이 되고 한류가 세계를 휩쓸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 교수는 사상과 문화에 대해 “중국에서 꽃이 활짝 핀다면 한국에선 열매를 맺는다”며 한국 정신을 ‘다양성의 조화’라고 결론짓는다.


정역 연구의 일인자였던 학산 이정호.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한국 사상은 오랜 세월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때로는 상반된 길을 달렸지만, 궁극적으로 이질성의 통합과 다양성의 조화라는 특징을 지녔다. 천지인 삼재라든가, 유불도 삼교를 포함한 풍류도 등 고대 정신에도 포용성과 통합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형이상의 정신과 형이하의 물질의 양면적 사고가 깔려 있으며, 어느 일면으로 기울어지다가도 다시 양면으로 통합하는 성격을 지닌다. 유불도(교) 모두가 이 땅에 들어온 뒤 그랬다. 한국 사상이 지향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명의 존엄과 인격의 존중이다. 그것이 한국인의 성격과 가치관의 중핵이다.”


그는 또 “한국인들은 평화와 인(仁·사랑)을 지향하면서도, 기질적으로는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정신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무사도 정신이 지배하고, 중국은 좋아도 싫어도 ‘하오하오’ 하며 원만한 군자를 지향한다면, 한국인은 백이숙제와 같은 의리학파가 뿌리내려 불의에 항거하는 선비정신이 강하다. 그래서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지만, 돈을 준다고 해서 반드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면 돈을 줘도 ‘누굴 거지로 아느냐’면서 돈을 내던지는 게 한국인이다. 학문을 하면서도 목숨을 내거는 게 선비다. 가치중립을 지향한다면서 누군가 자기 새끼를 죽이고 있는데도 ‘난 <중용>이나 읽을게’ 해선 선비라 할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과 700명의 의사를 보라. 700명은 무사나 농부가 아니라, 모두가 선비였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싸운 것이다.”


이선경 박사는 “우리나라엔 경학 고문헌 가운데 역(易)에 관한 것이 가장 많을 정도로 고대부터 정신의 저류에 주역을 비롯한 역의 사유 방식이 흐르고 있었고, 근대에 정역의 등장으로 또 한번 사고 전환의 일대 계기를 맞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문일답이다. 


1975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명륜당에서 류승국의 박사학위 수여식 때
학산 이정호와 류승국 전 정신문화연구원장.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한국 철학에 역이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보는 까닭은?

이선경(이하 경) “한국, 한국인의 사유 방식에서 역학적 사고방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훈민정음과 태극기를 봐도 그렇다. 류승국은 갑골문을 통해 상고대 동이의 ‘인방족’과 ‘어질 인(仁)’이 한국사상문화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어질 인(仁)’의 인도주의는 단군신화, 최치원 풍류도, 성리학의 태극, 훈민정음, 동학의 인내천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정역에서는 황극이라는 인간론으로 점을 찍었다. 중국에서 황극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이었지만, 정역이 말하는 황극은 보통의 인간이 절대주체로 선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18째 아들인 담양군의 13대손인 연담 이운규로부터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남학 창시자 광화 김치인, 일부 김항 세분이 동문수학했다고 하는데?

이동준(이하 준) “연담이 세분을 불러서 이걸 하라고 했다기보다는 최제우는 선도를 중심으로 법을 펴고, 김치인은 불교를 중심으로, 김항은 유교를 중심으로 법을 펴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진실은 다 알 수 없다. 연담은 실학자 이서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006년 ‘학산 이정호와 정역’에 대해 학술 발표를 하고 있는 류승국.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정역은 어떻게 공부를 했나?

준 “학산과 도원(류승국) 등 8~9명이 계룡산 향적산방에 모여 밤엔 영가(음·아·어·이·우 노래)를 하고, 무도(춤)를 했다. 무도를 하다 신명이 나면 튀어 오른다. 영가 무도를 하면 동물과 자연물도 감응한다고 했다. 영가를 하면 그 소리를 들은 호랑이가 찾아왔다가 사람이 눈에 띄면 휙 사라진다고 했다. 겨울에 나가 보면 눈 위에 큰 발자국이 있었다.”


―정역이란 무엇인가?

준 “김항이 36살 때 연담 이운규에게 화두를 받고 54살에 정역의 세계를 깨쳤다. 복희 문왕 팔괘는 봄여름, 정역은 후천 시대인 가을 결실기를 제시한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간방(艮方)이 정역에서 중심이 되면서 간방 중심의 세상이 열리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봄여름 성장기엔 경쟁이 심해 모순이 대립해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다툼이 없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어른이 된다. 그런 여름이 가야 가을이 온다. 진(팔괘의 ‘震’, 현실에선 중국)이라는 것은 번성하고 화려하게 드러난다. 정역에서 보면 중국이 꽃이라면 우리나라는 열매다. 중국에서 핀 꽃들이 여기에 와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단군 이전 ‘구이’족이 가진 동방문화의 기반에서 유불도와 기독교까지 받아들여 통합했다고 했는데?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이 부친인 학산 이정호가 역의 원리로 밝혀낸 훈민정음의 원리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준 “강자가 약자를,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의 모순과 갈등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정역에서는 조양율음(調陽律陰, 음양의 조화)의 시대가 온다고 봤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음의 시대가 지나면 양의 시대가 도래한다. 고려 시대엔 가요와 문학이 발달했다. 조선 시대는 고려의 문화예술을 당하지 못했다. 반면 고려는 조선 시대의 철학을 당하지 못한다. 고려는 악이 발달했고, 조선은 예가 발달했다. 고려 말에 자유로움이 심해져 너무 문란해지니 조선 시대는 예법으로 다스린 것이다. 그러자 학문·철학은 발달했지만 부드러움은 사라졌다. 다시 뼈에 살을 붙여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음악, 무용, 연극 등 예체능이 보완되어야 영육쌍전(정신과 육신의 균형 있는 발전)으로 온전해진다.”


―학산이 말한 훈민정음의 핵심은?

준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制字解)에 ‘천지의 도는 하나의 음양오행일 뿐’이라고 했다. 해례본은 역리와 성리학으로 설명되니 언어학만으로 해명이 어렵다. 1940년대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엔 훈민정음의 원리를 알 수 없었다. 1970년대 초 국립중앙도서관이 세계에 알릴 첫번째 우리 책으로 훈민정음을 정한 뒤 이창세 관장이 국문학자들을 찾아다녀도 역학을 모르니 제대로 해설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일석 이희승이 대전으로 학산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훈민정음의 구조 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정음 글자에는 음양, 오행, 천지인 삼재 그리고 하도의 원리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뿌리 깊은 인도주의 정신 및 영육쌍전 사상이 뼈대가 되는 원리가 담겨 있다.”


2019년 미국 캔자스대학에 방문교수로 간 이선경 박사가 한국 사상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한국사상연구원 제공


―태극기의 원리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경 “류승국이 ‘우주 만유의 근원이 태극인데, 내 주체가 남의 주체이니 남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한 것은 기초적인 설명이다. 태극 모양은 동지부터 하지까지 밤낮 길이의 변화를 말한다. 45도 각도로 줄어들고 늘어나는 비율을 그리면 자연의 리듬을 따른 태극 문양이 된다. 태극 문양은 우리 고대부터 있었다. 태극을 중국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음악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틀이지 피타고라스가 만들었다고 그리스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역도 보편적인 사유의 틀이다. ‘기원이 어디냐’보다 그것이 우리 삶 속에서 무엇을 변화시키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출처: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49828.html?_ga=2.42951271.314873819.1659945989-478906861.1652947546 한겨레 휴심정, 플라톤 아카데미 ‘이것이 K정신이다’ 인문 사상 종교, 중국서 꽃 피고 한국서 열매 맺어 (이동준 한국사상연구원장·이선경 차기 주역학회장 부녀 ) 인터뷰

필자_조현 기자
걷고 읽고 땀흘리고 어우러져 마시며 사랑하고 쓰고 그리며 여행하며 휴심하고 날며…. 저서로 <그리스 인생학교>(문화관광부장관 추천도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누리꾼 투표 인문교양 1위), 숨은 영성가들의 <울림>(한신대, 장신대, 감신대, 서울신대가 권하는 인문교양 100대 필독서). 숨은 선사들의 <은둔>(불교출판문화상과 불서상), 오지암자기행 <하늘이 감춘땅>(불교출판상).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우리시대 대표작가 300인’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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